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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가족―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까지 셋이다―은 쭉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나는 그 동네에서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를 나왔으며, 당연히 고등학교까지 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진학을 앞둔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물었다.

“엽아. 우리 다른 나라에서 사는 건 어때?”

내 이름은 신대엽이다. 부모님이나 친구 몇몇은 나를 가리켜 친근하게 ‘엽’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거기서 얼마나 살려고?”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나는 엄마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결정은 아무래도 단번에 내리기 힘들었다.

“확실히 언제 돌아올지는 몰라. 네 아빠가 본사로 발령받았거든.”

우리 아빠는 외국계 기업의 한국 지사에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승진을 하면서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본사로 가게 된 것이다.

“마침 거기 사는 지인이 있어서, 엄마 일자리도 그분이 마련해 주시겠대.”

엄마는 영어권 국가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가르치는 일을 한다. 전 직장에서 계약 기간이 끝나 쉬던 참이었는데, 아빠의 소식을 듣고 지인에게 부탁하여 비어 있는 튜터 자리에 들어가기로 했단다.

“일이 다 끼워 맞춘 것처럼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어. 이제 너만 허락하면…….”

“난 여기 있을래.”

내 말에 엄마도 아빠도 일순 찬물을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니, 너만 여기 놔두고 우리가 어떻게 거길 가? 응?”

당황한 엄마가 나를 붙잡고 사정하듯 물었다.

“나보다 어린 애들도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잘 사는데. 괜찮아.”

“……네가 아니라 우리가 안 괜찮다!”

안절부절못하던 아빠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엄마도 대번에 아빠 역성을 들었다.

그날부터 며칠간, 엄마와 아빠는 나를 설득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한국에 남겠다고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묘안을 생각해 냈다며 식구들을 소집했다.



‘너, 곡이 아저씨 알지? 백곡. 아빠 친구.’



곡이 아저씨는 아빠와 가장 친한 친구로, 순천시에서 가장 큰 대입 전문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저씨가 나를 봐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대학에는 기숙사가 있지만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머물 데가 있어야 하잖아. 네가 곡이 아저씨네 집에서 지내면 우리도 안심이지.’

‘……순천이면 전학은 불가피하겠네.’

‘왜, 좀 그래?’

‘아냐. 그래도 미국 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아빠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튿날 친구들에게 전학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전혀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 대엽신 없으면 학교 재미없어서 어떻게 다님?”

“근데 되게 갑작스럽다.”

“우리 다 여기 두고 어딜 간다는 거?”

친구들의 말은 언뜻 장난스러웠지만 서운해하는 기색 또한 역력했다. 동아리다 뭐다 해서 맨날 우르르 몰려다니던 애들이랑 하루아침에 떨어져야 한다니. 나도 서운했지만 나까지 그걸 내색해 버리면 분위기가 정말 이상해질 것 같아서 참았다.



***



전학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수속을 마치고 서울을 떠나던 날, 친구들이 선물을 잔뜩 안겨 주었다. 빵 한 보따리에 항공기 프라모델, 다 같이 모여서 밤새 놀았던 날 함께 맞췄던 퍼즐 액자, 그리고 온갖 글로 빼곡한 롤링페이퍼까지. 코끝이 절로 시큰해졌다.

“친구들이 의리가 있다. 응? 우리 엽이 서운해서 어떡해.”

단출한 짐을 싣고 곡이 아저씨네 집으로 향하던 중, 아빠가 내게 말했다.

“그래도 곡이 아저씨네 가면 ‘찬이’ 있잖아. 너희 둘이 어렸을 때 친하기도 했고.”

“……응.”

곡이 아저씨에게는 나와 동갑인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백지찬. 어렸을 땐 곧잘 놀았는데 크면서 부쩍 사이가 서먹해진 애다. 서로 사는 곳이 멀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까 찬이랑은 얼마 만에 보는 거야?”

“한 4년 됐나.”

“오래됐네. 아무튼 잘됐어. 둘이 형제처럼 지내면 좋잖아. 응?”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아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아빠는 정원이 잘 꾸며진 2층짜리 단독 주택 앞에 차를 세웠다. 나와 아빠가 차에서 내린 뒤 트렁크에서 짐을 빼는 동안, 곡이 아저씨가 허둥지둥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이고, 대엽이 아니야? 못 본 새에 더 의젓해진 것 같네!”

곡이 아저씨는 내게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래. 공부 열심히 잘 하고 학교도 잘 다니지? 우리 집 꼴통은…… 아유, 말을 말자.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나와 백지찬의 사이가 좋아지기 어려운 까닭 중 하나는 곡이 아저씨의 이런 화법이다. 매번 이렇게 당신 아들과 나를 놓고 비교하니, 내가 백지찬이라도 비교 대상인 내가 싫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층 복도 끝의 빈방. 아저씨는 그곳을 내 방으로 정해 준 뒤,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리가 끝나 갈 즈음 아저씨가 내 방 바로 옆에 있는 방의 문을 덜컥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온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백지찬이 있었다. 나는 짐을 옮기다 말고 그의 방 주변을 기웃거렸다.

“야, 꼴통! 지금이 몇 시인데 손님 맞을 생각도 안 하고 자빠져 자고 있냐?”

“……방학이라 늦잠 좀 자겠다는데 뭐가 꼬와서 그래, 진짜!”

아저씨가 깨우기 무섭게 백지찬이 짜증을 잔뜩 내며 몸부림을 쳤다.

“인마, 석구 아저씨랑 대엽이도 왔는데.”

아저씨의 말에, 잠이 덜 깬 백지찬이 실눈을 뜨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관찰하던 그는 침대 밖으로 꾸물꾸물 빠져나와 내 앞에 섰다.

“뭐야…….”

백지찬이 한쪽 손으로 제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그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사뭇 달랐다. 변성기가 와서 잔뜩 낮아진 목소리나 붉은 갈색으로 염색한, 텁수룩한 머리도 그렇고. 아랫입술 한쪽이나 귀 주변에 매달린 피어싱들도 전부 처음 보는 것이다.

“이건 대체 뭘 처먹고 다니길래 볼 때마다 존나 커져서 오냐.”

백지찬이 배를 벅벅 긁으며 빈정거리듯이 중얼거렸다. 내 키는 190cm가 조금 넘는다. 하지만 백지찬도 결코 작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런 애한테서 이런 말을 듣자니 조금 억울했다.

“……어른들도 보고 있는데 말하는 게 왜 그래.”

나는 백지찬에게 따져 묻고는 유유히 짐을 옮겼다. 등 뒤에서 백지찬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 대한 백지찬의 태도는 못 본 새에 더 나빠져 있었다.

“대엽아. 미안하다. 응? 아저씨 잘못이야.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거를 저 모양으로 키워 놔서.”

곡이 아저씨는 백지찬이 내게 저지른 무례를 연신 사과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지찬은 왜 자기가 잘못해 놓고 자기 아빠가 대신 사과하게 만들지?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우리도 저 나이 때 만만찮았잖아. 입만 열었다 하면…….”

백지찬의 발언 이후 잠시 얼어 있던 아빠가 상황을 수습하러 나섰다.

“야, 신석구. 내가 지금껏 누구 부러워한 적이 없는데…… 네 아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방금도 얘가 저 꼴통한테 말하는 거 봐. 어른들 앞에서 왜 말을 그렇게 하냐고. 야, 어느 집안 자식이 말을 이렇게 해? 애를 어떻게 키우면 이렇게 반듯하게 크냐?”

곡이 아저씨가 특유의 과장된 몸짓을 섞어 가며 말했다. 민망하니까 아빠 쪽에서 얼른 멈춰 줬으면 좋겠건만, 아빠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만 있었다.

“아이, 왜 그래, 진짜? 지찬이 듣는데 무안하게.”

“저게 무안할 줄 아는 놈이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내가 명색이 학원 선생인데, 아들이 저리 막 나갈 줄 누가 알았겠냐?”

아빠와 곡이 아저씨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묵묵히 짐을 옮겼다. 마지막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느 틈에 옷을 갈아입은 백지찬이 누군가와 큰 소리로 통화하며 현관으로 나왔다.

“집인데. 존나 시끄러워서 깼어. 아, 그냥 누가 왔어. 뭘 캐물어, 씨발? 말하면 네가 아냐? 뭐? 아빠 손님이라고! 뭐가? 어? 아무튼 거기서 기다려. 갈 테니까.”

통화를 마친 백지찬이 운동화를 신을 때, 곡이 아저씨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려고? 점심 먹어야지.”

“방금 일어났는데 뭔 점심을 먹어?”

백지찬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밥도 안 먹고 어딜 가려고?”

“왜 붙잡아 놓으려고 난리야? 배도 안 고픈데.”

“일찍 들어와.”

“아빠 나가면 들어올 거야, 존나.”

백지찬은 곡이 아저씨에게 된통 툴툴거리고는 신을 다 신자마자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곡이 아저씨는 그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올 거라고 했다.

“저걸 어떡하면 좋냐.”

백지찬이 쾅 닫고 나가 버린 문을 망연히 바라보던 곡이 아저씨가 아빠에게 물었다.

“그래도 애들끼리는 통하는 데가 있어. 엽이랑은 금방 잘 지낼 거야.”

아빠가 내 팔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솔직히 백지찬과 잘 지낼 자신은 없다.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 소원이 없겠다. 저 꼴통 저거, 어떻게 된 게 친구도 저 같은 것만 사귀어요.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가끔 울화통 터져서……. 사실 엽이 오라고 한 것도 반 이상은 저 새끼 때문이야. 같이 살면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 받을까 싶어서.”

아빠는 때가 되면 다들 철이 들게 돼 있다고 했지만, 곡이 아저씨는 아빠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