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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습기가 스며든 신문을 펼쳐 보았지만 딱히 그런 내용은 없었다. 집사는 당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탄식했다.

“도련님도 성년이 되셨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도련님에게 무심하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걸 잊고 계실 줄이야.”

“……벌써?”

집사의 첫 손녀인 달리아를 언급할 때보다 건조해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집사는 경악한 듯했다.

“공작 각하께서 그만큼 오래 떠나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혹 그동안 어디 계셨는지요? 저는 늘 공작 각하께서 어디 계신지 몰라 노심초사했습니다. 일개 집사인 저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뿐인 아드님이신 도련님은 얼마나 마음고생하셨겠습니까. 실제로 도련님은 매번 제게 공작 각하의 거취를 질문하셨습니다. 도련님의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을 해 드릴 수 없어 몹시 죄송한 마음이었지요.”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호칭이 거슬렸던 그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헨리. 정 궁금하거든 그저 내가 여러 국가를 여행했다고만 알아 두게.”

제가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안 집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작 각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집사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이번엔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십니까?”

그는 손가락을 접어 날짜를 세며 대답했다.

“연회가 일주일 후였지. 연회로부터 사흘간만 더 수도에 머무르다가 포헤베르테에 들른 후, 곧장 떠날 생각이네. 국왕과 처리할 문제가 남아 있거든.”

“사흘은 너무 이르십니다. 도련님도 만나 보셔야지요.”

입을 굳게 다문 그를 집사가 집요하게 설득했다.

“에르히 도련님은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 일전에 도련님이 공작 각하께서 계시지 않는 포헤베르테 영지에는 여름휴가 동안 내려가지 않겠다 의사를 밝히셨습니다만, 이리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셨으니 마음이 달라지셨을 겁니다. 마침 각하께서 포헤베르테에 갈 의중이 있다고 하시니 연회에 참석한 후에 두 분이 함께 여름휴가를 그곳에서 보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는 결국 집사의 간절한 청을 이기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고려해 보겠네.”

격변하는 시대에 그가 영주로서 포헤베르테를 다스릴 필요는 소멸되었다. 그래서 그는 늘 어딘가로 떠나 있었다. 그는 수도에도, 그리고 영지인 포헤베르테에도 뿌리를 내려 정착하지 못했다. 누군가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 본 적도 없었다. 그는 너무 오래 살았고, 대부분의 귀족은 그가 알고 있던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 클로드는 짙은 은회색 눈을 무심하게 깜박였다. 아들인 에르히는 고작 스무 살의 젊은 청년이었지만 그는 자그마치 900년을 살았다. 포헤베르테 영지의 주인이자 용 군트람과 여왕 레기나의 아들인 클로드 군트람은 900년 전에 태어났다.

<클로드 군트람>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용인이었다.



*



오래된 기록에 따르자면 용은 희귀한 존재였다. 종교적 박해에 의해 눈부셨던 마법과 연금술의 시대는 저물었고, 검과 창을 들고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용을 죽이는 시대였다. 용이란 포악하고 잔인한 짐승으로, 주로 공주나 영주의 딸을 납치해 그 대가로 보석과 황금, 그리고 잡아먹을 인간을 요구하는 극악무도한 존재였다.

용들은 반짝이는 것, 즉 보석과 황금을 그들의 둥지에 넘쳐흐를 정도로 소유하길 원했다. 왕과 귀족, 그리고 영주들은 딸을 구하기 위해서 재물과 산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군트람은 탐욕스러운 동족과는 달랐다. 북부의 용이었던 군트람은 보석과 황금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흥미를 드러냈다. 그것도 상당히 노골적으로.

군트람은 수십 년의 관찰 끝에 바다를 접한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붉은 머리의 레기나를 찾아갔다. 왕의 숲에서 사냥을 즐기던 레기나는 숲속에서 나온 아름답고 이질적인 남자를 보고 그를 가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것은 군트람도 마찬가지였다.

군트람은 수십 년간 인간을 관찰해서 얻은 방대한 지식과 유려한 언변으로 레기나를 사로잡았다. 레기나는 사냥이 끝나자 군트람을 데리고 그녀의 왕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레기나는 그동안 들어왔던 구혼을 모두 거절하고 군트람과 결혼했다.

군트람은 성대한 결혼식에서 진정한 형태를 드러냈고, 레기나는 두려워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밝게 웃으며 군트람의 검은 비늘을 어루만졌다. 그리곤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군트람, 당신은 정말 완벽한 존재야.」



검은 용 군트람은 사랑하는 레기나에게 순순히 굴종했다. 군트람과 레기나는 바닷가 왕국을 다스렸다. 용인 군트람을 두려워하던 자들은 제발 그 간악한 용을 멀리하라고 레기나에게 간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기나는 군트람을 곁에 두고 사랑을 나눴다.

레기나는 스물두 살에 군트람의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스물세 살에 군트람의 알을 해산했다. 레기나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 드디어 알이 깨지고 아이가 태어났다. 군트람을 닮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다.

레기나가 서른 살이 되던 해, 군트람은 레기나를 영원히 떠났다. 레기나는 용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에게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인간의 왕은 오직 인간이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부군이 사라진 첫 번째 결혼을 종지부 맺고 인간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리하여 레기나는 바닷가 왕국에 이어 통합 왕국을 다스렸다.

레기나가 서른세 살 되던 해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정복 전쟁을 되풀이하던 서른여덟 살에 신의 부름을 받았다. 레기나의 첫아들, 군트람을 꼭 닮은 아들 클로드는 그녀의 임종을 지켰다. 사람들은 불치의 열병이 옮을까 봐 레기나의 곁에 가기 두려워했다. 레기나는 전신에 뜨겁게 열이 올라 고통을 느끼면서도 첫사랑을 닮은 클로드에게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마침내 레기나가 눈을 감았을 때, 클로드는 제 마지막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는 가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클로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인을 추모하는 대신 레기나를 관에 옮기고 그녀의 손 위를 가지런하게 정리한 뒤 관을 닫았다.

레기나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클로드의 계부도 곧이어 부인을 따라 죽었다. 누구나 클로드가 레기나의 뜻을 어기고 왕위에 오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배다른 동생이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공으로서 왕국을 다스린 뒤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레기나의 관을 씌워 주었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르자면 클로드는 용 군트람의 아들이면서 그녀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레기나는 군트람을 처음 만났던 숲인 포헤베르테에 딸린 작은 영지를 클로드에게 상속했다. 또한 클로드의 성을 아버지의 이름인 군트람으로 정했다.

지난날, 군트람이 둥지에 남기고 간 금화와 보물을 모조리 클로드가 물려받았다. 용은 수천 년을 사는 존재였고 군트람의 피를 물려받은 클로드가 홀로 수백 년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신빙성이 짙었다. 레기나는 정복 전쟁의 자금이 부족할 때도 영주들의 금고를 몰수할지언정 군트람의 유산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었다.

클로드는 갓 왕위에 오른 배다른 동생에게 유산의 절반을 떼 주었다. 왕은 보석과 황금을 나눠 준 클로드를 용공작이라 명명한 뒤 대대로 그에게 간섭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클로드는 포헤베르테에 틀어박혔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수십 명의 왕이 바뀌었다. 모든 왕들은 클로드를 두려워하면서도 경배했다.

용의 피를 물려받은 클로드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유산뿐만 아니라 그 외모에 홀려 여러 사람이 접근해 왔지만 클로드는 늘 정중히 돌려보냈다. 물론 클로드도 모든 순간이 외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용 군트람과 정복 군주 레기나의 결혼처럼 종종 부왕이 억지로 맺어 준 정혼자 대신 용과 결혼하는 용감한 공주가 여럿 있었다. 그리하여 클로드와 같은 존재들이 늘어났다. 최후의 마법사와 연금술사는 그 존재를 용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중에서 클로드보다 오래 산 용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레기나의 고손녀, 대공 엘레노어의 아들이었던 마지막 용인 생 제르맹 백작까지 명을 달리한 후로 클로드는 오랫동안 혼자였다. 군트람이 떠난 뒤로 다른 용들도 차츰 자취를 감추어서 새 용인의 탄생 또한 멈춰 버렸다. 클로드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포헤베르테를 떠났던 클로드는 태어난 지 고작 석 달 된 아기를 데려왔다.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아주 어여쁜 아이였다.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 없던 클로드는 품에 안은 아이가 사랑하던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 연인에 관해서 클로드가 더 밝힌 바는 없었지만 아이의 생모가 죽었기 때문에 영지로 돌아온 것이라고 모두가 어림짐작했다. 사람들은 클로드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 수군거렸다.

클로드는 차마 연인을 닮은 아이를 마주 볼 수 없었는지 포헤베르테 영지에 몇 달 머무르다 떠나길 반복했다. 영지에 관련한 것들은 모조리 집사인 헨리와 변호사, 그리고 동생의 먼 후손인 국왕에게 일임했다. 선조가 남긴 절대적인 유언으로 인하여 클로드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국왕은 유모와 시종을 보내 주었다.

클로드는 포헤베르테 저택의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혹은 떠나 있었다. 에르히의 나이가 어느 정도 차자 기숙 학교로 보내 버린 후엔 아예 영지를 떠났다. 그런 클로드가 갑자기 귀국했다. 국왕의 초대장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변덕 때문일지도 몰랐다.

헨리는 수도에서 대학을 다니는 에르히를 보필하기 위해 공작저에 올라와 있던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클로드와 에르히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혹은 연회에서 두 부자가 만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