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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오랫동안 주인을 그리워했던 공작저는 클로드를 반겼다. 비록 클로드는 공작저의 내실 소파에 앉아 습기가 스며든 신문을 읽는 행위만 반복했지만. 하녀들은 그런 클로드를 보고 겁도 없이 수군거리다가 집사에게 혼이 나기 일쑤였다.

헨리가 두 사람의 만남에 집착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20년 전, 클로드는 지금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강보에 싸인 아기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용 군트람의 피를 물려받아 빠르게 자란 후, 극히 느린 속도로 노화한 그는 900년을 살았는데도 고작 서른 초중반으로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담담한 은회색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수심이 드리워진 음울한 표정은 20년 전보다는 한결 밝아 보였기에 집사는 안도했다.

클로드는 집사의 시선을 의식하다가 조간신문을 펼쳤다. 연회는 당장 내일이었다. 가지고 있던 옷을 입고 갈 생각이었으나 집사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유능한 재단사에게 새 옷 한 벌을 맞췄다. 어차피 연회 같은 것은 질색이기에 국왕과 인사한 뒤 곧바로 테라스에 나가 있을 생각이었다. 클로드는 집사의 집요한 시선을 의식하다가 비가 멈추는 기색이 보이자 정원으로 나왔다. 여름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은 공작저의 유일무이한 자랑이었다.

철도가 깔려 증기를 내뿜는 기차가 거침없이 선로를 달리고, 온갖 과학의 산물이 쏟아지는 세상이었다. 900년 전, 레기나가 제게 한 말대로였다. 레기나의 왕국은 번영의 절정을 맞이했다. 동시에 레기나가 다스리던 왕국의 낡아 빠진 유산도 아직 살아 숨 쉬었다.

클로드는 약간의 환멸감을 느꼈다. 검은 용 군트람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다른 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용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용인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졌다. 클로드가 기억하던 마법과 연금술의 기록은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트람과 레기나의 자손인 클로드는 질기게도 살아남았다.



「사랑스러운 작은 용, 너도 언젠간 속절없이 사랑에 빠질 거란다. 내가 군트람을 사랑했던 것처럼.」



여전히 품위가 넘치는 붉은 머리의 여왕 레기나는 클로드의 희고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클로드,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 다오.」



레기나는 그에게 사명을 부여했다. 용 군트람은 전설이 아닌, 클로드의 이름에 남았다.



「사랑해, 클로드.」



그리고 누군가 수줍게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랑하는 클로드, 그가 속삭일 때마다 클로드는 장미처럼 두 뺨이 붉어졌다.



「클로드, 미안해. 나는…….」



그러나 ‘누군가’는 클로드가 바라는 만큼 그의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정원을 걷던 클로드는 저 외에 아무도 없을 정원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빗방울에 젖은, 황금처럼 반짝이는 금발에 눈부신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 놀란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그 ‘누군가’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람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입을 열자 클로드가 애써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와 다른, 그보다 좀 더 낮고 매혹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청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곧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클로드에게 다가왔다. 클로드는 그 청년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클로드가 지금껏 피해 온 악몽이었다.

검은 용 군트람을 닮아 검고 차가운 클로드 군트람, 포헤베르테의 주인. 그리고 에르히 군트람이 경애하는 아버지. 수시로 포헤베르테를 떠났고, 이번에는 정말 영영 떠나 버린 줄 알았던 아버지가 드디어 돌아오셨다.

청년, 에르히는 집사인 헨리가 급하게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깨달았다. 아버지가 귀국해서였다. 기대감에 부푼 에르히는 성큼성큼 걸어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아버지, 연락도 없이 귀국하시다니요. 제게 연락을 해 주셨다면 기꺼이 마중 나갔을 텐데…….”

클로드가 알기론, 에르히는 분명 대학의 기숙사나 근처의 플랫에 거주했다. 클로드의 공작저 방문을 헨리가 발설한 게 틀림없었다. 에르히가 중얼거렸다.

“돌아오실 줄 몰랐어요. 불현듯 예감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싶었는데. 아버지, 오랫동안 아버지가 돌아오실 날을 기다려 왔어요.”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간 슬픔에 잠긴 클로드는 그의 의무를 모두 외면했다. 사람들은 클로드가 영원히 영지를, 사랑하는 연인을 닮은 아들의 곁을 떠날 것이라 단언했다.

그들이 틀렸다. 아버지는 돌아왔다. 영지인 포헤베르테는 아니지만, 제 앞에 나타났다. 에르히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그가 기숙 학교에 입학하던 날, 클로드는 편지 한 통만 남기고 포헤베르테에서 사라졌다. 그 후로 10년 만이었다.

에르히는 기다렸지만, 클로드에겐 아니었다. 클로드는 냉랭하게 에르히를 밀쳐 냈다. 방심하다가 뒤로 밀려난 에르히가 푸른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 절 알아보지 못하시겠어요?”

그 순간, 에르히 군트람은 큰 상처를 받았다. 에르히는 클로드의 짙고 검은 머리와 어두운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제 금발과 푸른 눈을 떠올렸다. 군트람이라는 성이 아니면 아무도 에르히를 클로드의 아들이라고 연상 짓지 못했다. 에르히는 클로드가 무척 사랑했던 연인을 닮았다. 지독할 정도로. 클로드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널 보려고 귀국한 게 아니다. 날 아버지라 부르지 마. 나는 널 아들이라고 여긴 적 없다.”

클로드는 단지 부정하는 중이었다. 에르히는, 그 아름다운 청년은 아버지에게 축복받지 못한 제 존재를 변명해야만 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아버지. 저는 에르히 군트람이에요. 군트람이란 성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 저와 아버지, 단 두 사람뿐인걸요. 물론 저는 아버지를 닮은 곳이 하나도 없지만…….”

사교계의 사람들은 에르히를 볼 때마다 수군거렸다. 때로는 뒤에서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용공작은 그보다 몇백 살은 어린 여자를 건드린 파렴치한 작자였다. 클로드 군트람은 결이 고운 눈부신 금발에 바다처럼 푸르고 영롱한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다. 그 축복받지 못한 결실이 바로 에르히 군트람이었다.

에르히는 말끝을 흐렸다. 무엇을 말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만 같았다. 심지어 아버지는 기껏해야 서른 초반쯤으로 보였다. 10년 만에 재회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교계의 뜨거운 추문대로 에르히와 나이 차가 좀 날 뿐인 먼 친척 사촌처럼 여겨졌다. 클로드는 스무 살이 된 장성한 아들이 있다고 하기엔 여전히 젊었다.

클로드를 붙잡을 만한 말을 떠올리던 에르히는 문득 자신과 아버지의 눈높이가 비슷하다는 걸, 아니 그보다도 제 시선이 더 위에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멍해졌다. 에르히가 희미하고 옅은 기억으로 만든 상상 속에 존재하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보다 크고 강한 사람이었다.

상상 속의 아버지는 어린 에르히를 가볍게 안아 들기도 하고, 에르히에게 목마를 태워 주며 높은 나무 위에 있는 새 둥지를 보여 주기도 했다. 현실의 에르히가 자라도 상상 속의 아버지는 늘 그대로였다. 에르히는 기숙 학교의 친우들에게서 들은 아버지와의 추억담으로 상상 속의 아버지와 그 세계를 더 흥미롭게, 아름답게 구성했다.

그는 무척 건장한 체격에, 친우들의 아버지처럼 멋들어진 콧수염이 있고, 장식이 없는 수수한 모자를 벗어도 비슷한 연배의 신사들보다 키가 커서 매번 허리를 숙여 어린 에르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긴 코트 자락은 바닥에 끌리지 않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상상 속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클로드 군트람은 에르히 군트람에게 있어 경애하는 아버지라는 존재이면서도, 위압적이기도 했다. 아버지란 존재는 매번 아들을 혼내면서도 위로하는 그런 존재라고 친우들이 말해 주었다. 그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항상 가문과 가족을 책임지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에르히도 내심 동감했었다. 그러나 성년을 맞이한 에르히가 마주한 아버지는…….

에르히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10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는 에르히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가 이런 느낌이었던가? 물론 여전히 냉랭하고, 제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는 것은 그 희미한 기억 속과 똑같았다.

에르히가 보기에 그는 어쩐지 큰 키에 비해 마른 체격이었으며, 헛된 상상 속에서처럼 크리켓이나 보트 타기 등의 활동적인 신사의 취미와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클로드, 아버지는 크고 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딘지 고아한 인상을 풍겼다. 마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나 왕궁의 빛나는 금장식처럼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듯했다.

새카만 의복에 감춰졌으나 여실하게 태가 드러난 마른 몸은 유연하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섬세한 유리 세공품처럼 유약해 보였다.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에 뜨거운 햇볕이 스쳐 지나가자 클로드가 살며시 눈을 찡그렸다. 에르히는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제게 있어 아버지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에르히는 신보다는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의지했다. 에르히가 힘들어할 때마다 그 ‘아버지’는 너른 품으로 끌어안아 에르히에게 쉴 곳을 내주었다. 그러면 에르히는 약간의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아버지’는 저보다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었으며, 젊고 혈기 넘치는 청년인 자신과 비교해서 더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아버지에게 가졌던 환상은 오르골의 손잡이를 돌리면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것은 성당의 벽을 장식한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로 된 세공품처럼 산산이 깨지며 에르히를 현실로 끌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