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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공작저는 주인이 꽤 오랫동안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희게 칠한 외관 위에 올려진 군청색 지붕은 비를 맞아 더 어두워 보였다.

그가 수도의 항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세찬 비가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마부는 심한 남부 사투리로 무어라 욕설을 지껄이더니 비가 내리는 바람에 빗물이 고인 웅덩이 사이로 거침없이 마차를 몰고 빠져나갔다. 마차의 크고 동그란 바퀴가 웅덩이를 구르면서 그가 입은 낡은 정장과 코트에 온통 진흙탕물이 튀어 더러워졌다.

그는 단벌뿐인 코트가 더러워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코트의 깃을 뻣뻣하게 세운 채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와 저택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하고 낡은 철문 위로 손을 대었다. 그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체질이었으나 소유한 영토에 있는 모든 것들은, 늘 주인을 인식했다.

진정한 주인을 알아본 철문은 끼이익, 쇠가 바닥을 끄는 소리를 내면서 저절로 열렸다. 스르륵 열리는 문 사이로 들어온 그는 짧게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흰 돌이 깔린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가 오래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저는 꽤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의 대리인이 어지간히 힘쓴 모양이었다. 가지치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이 다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온유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곧 흰 돌이 깔린 길을 지나 저택 문 앞에 당도하자 짐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흰 문을 똑똑 두드렸다. 오늘처럼 궂은 날엔 손님이 오고 있는지 창문 밖을 내다보는 사용인도 없을 터였다. 세찬 빗소리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묻혔는지 한참 동안 묵묵부답이었다.

빗물이 옷자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세찬 비를 맞았더니 몸이 축축 늘어지고 무거워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세 번, 그는 한 치의 오차 없이 균일하게 세 번을 더 두드렸다. 그의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다행히도 곧 무거운 문이 열리더니 공작저를 관리하는 연로한 집사가 피로한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군트람 공작 각하를 찾아오셨다면, 그분은 저택에 안 계십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공작저에 방문하려면 왕성에 허락을 받고 오셔야 할 텐데요.”

갑작스런 불청객을 올려다보던 집사는 단번에 눈을 크게 떴다.

“고, 공작 각하.”

그가 모자를 벗어 보이자 비에 젖어 축 달라붙은 머리카락과 섬세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오랜만일세, 헨리.”

그는 북부의 공국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찬바람처럼 스산하고 건조한 음성으로 인사했다. 군트람 공작저의 집사, 헨리는 주인에게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 귀국하실 줄 알았더라면 미리 채비하여 항구로 마중 나갔을 겁니다. 신이시여,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집사의 목소리엔 섭섭함과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이번 귀국은 즉흥적이었어, 헨리. 자네의 실책은 아니지.”

여전히 비가 거세게 내렸다. 마치 뼛속까지 물기로 젖어 드는 기분이었다.

“그보다 헨리, 언제까지 주인을 비 내리는 바깥에 세워 둘 생각인가?”

딱히 비꼬는 어조는 아니었지만 집사는 무척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부디 너그럽게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공작 각하. 변명하자면 공작 각하께서 떠나신 후로 저도 꽤 나이가 들어서…….”

“이 나라에서 자네보다 뛰어난 집사는 찾기 힘들 거야. 정원 손질부터 저택 외관까지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더군. 주인 없이 관리하느라 꽤 힘들었을 텐데. 헨리, 난 자네가 적어도 백 살까지는 집사를 맡아 줬으면 해. 자네보다 더 뛰어난 집사를 어디서 찾으란 말이야?”

집사가 옆으로 비키자 그는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겨 저택 내부로 들어왔다. 그는 주로 영지의 저택에 머무르기 때문에, 수도 외곽에 위치한 공작저는 오랜만이었다. 집사가 문을 굳게 닫으며 대답했다.

“짓궂은 농담은 여전하십니다. 저는 지금도 버겁습니다. 공작 각하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은퇴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집사의 머리는 희게 센 백발이었다. 집사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공작 각하와 다르게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자, 코트를 벗어서 이 늙은이에게 주시지요. 세상에! 정말로 흠뻑 젖으셨군요. 무얼 타고 오신 겁니까? 이곳까지 걸어오긴 힘드셨을 텐데요.”

비에 젖어 무거워진, 사슴이 새겨진 은장 단추가 달린 검은 코트를 벗어 준 그는 물끄러미 집사를 쳐다보았다.

그가 기억하기로 집사인 헨리는 짙은 갈색 머리에 콧잔등엔 주근깨가 박혔던 호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헨리는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노인이었다.

그는 늘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는 얌전히 주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집사에게 말을 건넸다.

“기차역에서 내린 후 조합을 찾아가 개인 마차를 불렀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곧 거센 비로 변하더군. 내가 생각하기엔.”

비가 내린 이유야 뻔했다. 그는 갑작스레 비가 내린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돌아와서겠지. 포헤베르테에 돌아갔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포헤베르테는 그의 영지명이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곳을 포헤베르테라 불렀다. 그곳의 저택 후문으로는 푸른 녹음이 우거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어쨌든 귀국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로 공작 각하를 두 번 다시 뵙지 못하고 눈을 감는 줄 알았습니다.”

그가 음울한 표정을 짓자 너스레를 떤 집사는 재빠르게 내실로 안내했다.

“공작 각하라고 부르지 말아 줘, 내가 공작이었던 시절은 아주 오래전일세. 더는 공작 각하라고 불릴 만한 지위도 아니지.”

그는 오래전에 작위를 반납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를 군트람 공작이라고 칭했다. 집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에겐 늘 거두어 주신 은인인 군트람 공작 각하십니다.”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그는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았다. 다른 영지의 주인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포헤베르테 영지의 주인은 변함없이 항상 그였다. 영지민들은 늘 젊은 주인을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었다. 시대가 바뀐 후로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에 불과했다.

내실에 도착하자 그는 붉은 벨벳 소파에 앉아 집사가 건넨 수건으로 축축한 물기를 닦아 냈다. 집사가 넌지시 말했다.

“씻으실 수 있도록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몸을 말리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고는 문을 나섰다. 벽난로 안에선 장작이 타들어 갔다. 멍하니 그 불길을 바라보던 그는 마침내 공작저에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추천장을 가져와서 쭈뼛쭈뼛 건네던 젊고 어리숙하던 헨리는 세월이 흘러 어느새 등이 굽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기꺼이 추천장을 써 주었던 헨리의 옛 주인인 하급 귀족도 벌써 수명을 다했을 테지.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시간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 것을 체감했다.

곧 집사가 와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두었노라 말했다. 그는 빗방울에 젖은 몸을 뜨거운 물로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나왔다.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내실에 더 머무르고 싶어 하는 그를 위해 집사가 오늘 자 신문을 가져다주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신문 발간일이었다. 예상보다 그는 꽤 오랫동안 이 나라를 떠나 있었다. 심지어 그의 영지를 떠났던 건 더 오래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포헤베르테엔 그가 묻어 둔 기억들이 존재했다. 그가 외면하고 싶은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공작 각하.”

벽난로에서 타들어 가는 마른 장작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집사의 부름에 붉은 벨벳 소파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으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불현듯 비가 내릴 때마다 흠뻑 젖어 들어가던 포헤베르테의 녹음을 떠올렸다. 집사는 주인을 일어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당황하며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앉아 계십시오. 그저 공작 각하께 궁금한 점이 있어 여쭤보려고 불렀을 따름입니다.”

“자네가 평소 내게 궁금해하는 게 있었나? 질문한 적이 드물었는데 말이야.”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듯 저도 나이가 들어서 달라졌습니다. 공작 각하께 처음 밝히지만 조만간 증손녀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벌써? 빠르기도 하군. 자네의 첫 손녀인 달리아의 결혼 선물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었는데.”

그는 유독 헨리를 닮았던 소녀를 떠올렸다. 헨리의 가족들은 삼대에 걸쳐 포헤베르테 영지에 있는 그의 저택에 살았었다.

“아닙니다. 저와 제 아내가 결혼할 때 공작 각하께서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떠올리면 아직도 감격스럽습니다. 그보다 제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내 맞은편에 앉아. 연로한 노인을 오래 세워 둘 만큼 매정하진 못하네.”

부드러운 권유에도 선뜻 소파에 앉지 못하던 집사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가 눈짓으로 종용하자 겨우 앉았다. 집사는 주름이 깊게 팬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갑자기 귀국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 예상한 범주의 질문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원래는 수도가 아니라 영지로 돌아갈 계획이었네. 포헤베르테의 숲이 보고 싶었거든. 하지만 국왕이 연회에 초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정을 미루고 이곳부터 오게 됐지.”

“국왕 폐하께서 이번에 성년을 맞이하신 왕세자 전하를 축하하기 위해 열겠다고 한 연회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네. 난 그저 초대장과 함께 통보를 받았을 뿐이야.”

그가 무심하게 대답하자 집사가 머뭇거리더니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공작 각하, 이번에 성년을 맞이한 것은 왕세자 전하뿐만이 아니십니다.”

“내가 아는 왕족은 그 아이, 마르그리트뿐이야. 국왕에게 내가 모르는 사생아라도 있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