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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 여자애를 찾으러 동쪽 끝 작은 영지까지 갔는데, 그곳에서 산지기 부부를 만났지. 산지기 남편은 귀족과 시비가 붙어 죽은 후였고, 임신한 부인이 넋을 놓고 있길래 혼자 둘 수 없어서 세르반이 이곳에 데려왔거든.”

묵묵히 로이드의 이야기를 듣던 르네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거듭 물었다.

“설마, 그 부인이 나야?”

“잘 아네?”

르네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류로 눈을 돌렸다. 단순한 동정으로 베푸는 친절이라니, 이 모든 것들이? 엄청난 재산까지 주면서?

“여긴 로이센 제국 수도야. 처음 지골로 구역으로 너를 데려왔을 때 세르반의 여자라고 소문이 나긴 했지만 정작 세르반은 신경 쓰지 않더라. 너도 크게 의미 둘 필요 없어. 세르반은 널 돌보는 것뿐이고, 그 덕에 네 생활이 나아진다면 좋은 조건 아니야?”

“……쉽게 생각하면 그렇지.”

그렇게 애타게 찾던 동생 대신이라니, 말과 다르게 쉽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불쌍해서 아내로 삼았다는 말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세르반은 계속 여동생을 찾고 있어?”

“그건 세르반 문제니까 알아서 하겠지. 우리가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리고 이 서류들은 굳이 돌려줄 필요 없어. 세르반이 받지도 않겠지만.”

순간 머릿속에 작은 생각 하나가 스쳤다.

‘세르반을 대신해서 나설 귀족이 필요해 나를 이용했나?’

세르반은 지골로 구역의 로드고, 상단과 정보상의 주인인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재산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괜한 주목을 받아 곤란할 수 있으니 대리자가 필요했다.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오갈 곳 없는 르네를 거두고, 귀족 신분을 만들어 이용한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

‘클레르건 공작과 이익이 맞물려 나를 포함한 계약을 했겠지.’

문득 기억을 못 하냐고 묻는 로이드의 말을 곱씹었다.

마지막 기억은 임신을 알게 된 날이었다. 하지만 공작가 의원은 이제 막 임신 5개월에 들어섰다며 가벼운 운동과 함께 조금씩 출산 준비를 하라고 알려 줬다.

‘왜 시간 차이가 나지.’

머리가 복잡해진 르네는 들고 있던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클레르건 공작에게 이끌려 세르반을 처음 만난 날이 다시 눈을 뜬 날이 아닌가.

‘채찍질을 당한 날 바로 죽지 않고, 의식 불명 상태로 지내다가 뒤늦게 죽었을까? 그래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나.’

고민하던 르네는 머리를 흔들었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도 살아 있는 지금이 중요했다.

당장은 귀족 신분까지 얻고 공작가에서 편하게 지내지만 영원한 혜택은 아니었다. 세르반에게 계약에 관한 것과 아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더 듣고 싶었다.

“로이드, 세르반을 만날 수 있을까? 최대한 빨리.”

“언제쯤 가능한지 알아볼게.”

“고마워.”

대화가 끝나자 작은 쿠션이 얹어진 스툴 위로 다리를 올렸다.

“신발은 불편하지 않아?”

“음…… 조금 꽉 끼는 느낌도 들고.”

“임신하면 혈액량이 늘어서 발이 쉽게 부어. 조금 여유 있는 크기의 신발을 사야겠다.”

“로이드.”

“응?”

“아침에도 아기 옷이랑 내가 입을 드레스를 잔뜩 사 왔잖아.”

“아직도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세르반이 주는 돈도 있지만, 클레르건 공작도 네가 말하면 뭐든지 주니까 필요할 때마다 말해.”

“……혹시 공작이 원한 것이 세르반의 길드에서 주는 정보야?”

“그렇지. 세르반은 그 대가로 네가 무사히 출산할 수 있도록 돌봐 달라고 했지.”

르네는 순순히 말하는 로이드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세르반이 단순히 르네를 불쌍히 여기고 찾지 못한 동생의 대체품으로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일이 가능할까? 가짜 귀족 신분을 이용하기 위해 자신을 거두었다는 가정에 점점 더 결론이 기울었다.

르네는 미심쩍은 마음을 숨기고 흐릿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난, 운이 좋았네.”

“글쎄, 그렇게 생각해?”

로이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지만, 눈이 마주치자 금세 표정을 바꾸고 히죽거렸다. 벌떡 일어나 제법 시종다운 모습으로 멋들어지게 인사했다.

“부인, 저녁에 돌아오겠습니다.”

“풋, 알았어.”

“신난다. 신발 사러 가야지!”

그 멋짐과 건들거림의 간격이 커서 르네는 헛웃음을 흘렸다.

혼자 남은 르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남편이 죽고 임신한 몸으로 홀로 남은 여자. 우연한 도움으로 귀족 신분을 얻고 공작가의 예법 선생으로 지내게 된다. 조건 없이 돕는 남자와 조건 때문에 여자를 돕는 남자.

‘이러다 둘 중에 한 명과 사랑에 빠지면 완벽하겠는데?’

소설 같은 이야기네.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던 르네는 입을 다물었다. 동그란 배를 슬슬 문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좋은 생각, 좋은 말만 하자. 산달이 다가오기 전에 내 살길도 찾아야지.’

무엇보다 이번 삶에서는 평범하게 죽고 싶었다.

르네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가장 두려운 점은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프거나 괴롭지 않고, 평안하게 죽고 싶어.’

맹목적으로 보이는 세르반의 지나친 친절과 배려도 신뢰할 수 없었다. 받는 것에 비해 되돌려 줄 것이 없었던 르네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조건 없는 호의만 믿고 지낼 수는 없으니까, 내가…… 일을 해서라도…….’

르네는 앞으로의 생활을 고민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임신으로 쉽게 피로가 쌓여 어느 순간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르네.”

“…….”

“응접실…… 공작…….”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르네는 가볍게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으음…… 로이드?”

“불편하지 않아? 설마 내가 나간 뒤로 계속 이런 자세로 잤어?”

“아, 시간이…….”

르네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로이드는 르네의 발끝에 달랑거리는 신발을 제대로 신겨 주고 치맛단을 정리했다. 흐트러진 머리까지 매만지는 손길이 제법 노련했다.

“클레르건 공작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가자.”

“하암, 그래…… 응?”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하던 르네는 뒤늦게 로이드의 말을 이해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이 시간에 공작이 자신을 만나려고 기다린다는 사실도 의아했다.

“공작님이?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와?”

로이드는 매무새 정리를 마치고 서둘러 르네를 이끌었다. 얼떨결에 따라 나선 르네는 응접실에 들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시오. 아일레스 부인.”

“……클레르건 공작님.”

미리 연락을 줬다면 늦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뻔했다.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맞는 클레르건 공작을 보면서 순간 자신이 진짜 귀족이라고 착각했다.

이곳에서 르네는 신분 위조로 귀족 행세를 하는 거리의 여자에 불과했다. 불편한 마음을 빠르게 해소하며 한결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클레르건 공작은 대답 대신 르네를 에스코트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워진 찻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차를 마시겠소?”

애초에 답을 기다리지 않았는지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를 소파에 앉히고 프레오에게 눈짓했다. 테이블 맞은편으로 돌아가는 사이, 어느새 르네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이 준비되었다.

물끄러미 붉은 찻물을 보던 르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색에 맞춰 예의를 차리는 것 같지만 공작은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인지한 르네는 맞은편의 클레르건 공작을 향해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클레르건 공작은 과하게 밝은 미소를 보고 멈칫했지만 이내 들고 있던 서류에 집중했다.

프레오마저 나가자 응접실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고 묘한 정적이 흘렀다. 멀뚱히 앉은 르네는 서류만 넘겨 보는 클레르건 공작을 빤히 쳐다봤다.

‘먼저 찾아와서 말도 없이 뭐 하는 거지.’

한숨을 삼키던 그때 로이드가 들어와 르네에게 뭔가 속삭였다. 이후에는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와 옷감 스치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한참 서류를 보던 클레르건 공작은 문득 조용한 맞은편을 쳐다봤다. 자수를 놓던 르네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

“자수를 놓을 줄 아는군.”

르네는 서류를 내려놓는 클레르건 공작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느새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는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네, 배울 기회가 있었죠.”

“혹시 따로 예법 수업도 받았나.”

르네의 입매가 설핏 굳었지만 다시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네. 그것도 기회가 있었죠.”

클레르건 공작은 세르반이 르네를 꽤 아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다른 목적이 있어 교육시킨 것 같았다.

태생이 귀족이 아닌 이들은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버리지 못한 습관들이 있었는데 르네는 달랐다.

르네처럼 익숙하게 몸에 밴 듯한 태도는 하급 귀족들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처음 저택에 도착했을 때도 느꼈지만, 신분을 모르고 르네를 만난다면 양질의 교육을 받은 고위 귀족 영애라고 여길 만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선생이 꽤 훌륭했나 보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감사해요.”

예의상의 인사를 한 르네는 다시 자수 놓는 일에 집중했다.

한 시간이 되도록 앉아 있는 일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몇 시간도 앉아 있었겠지만 동그랗게 나온 배가 신경 쓰여 한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들썩이고 싶은 엉덩이를 애써 꾹 누르며 이 쓸데없는 시간을 왜 가져야 하는지 의문도 함께 눌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지금요?”

번쩍 고개를 든 르네가 저도 모르게 묻자 오히려 클레르건 공작은 뭐가 문제냐는 듯 쳐다봤다. 르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 나는 진짜 귀족이 아니지.’

“네, 알겠어요.”

굳은 허리를 붙잡고 기우뚱거리며 일어서자 어느새 다가온 공작이 르네를 부축했다. 놀란 르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클레르건 공작은 오히려 몸이 불편한지 살폈다.

“의원을 불러야 하나?”

“아…… 괜찮아요.”

르네는 클레르건 공작의 무례함과 친절함 사이에서 심중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슬그머니 붙잡힌 팔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단단히 붙들린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작님, 정말 괜찮아요.”

“문밖까지 부축하지.”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 몸이 좀 굳었을 뿐이에요.”

“…….”

“공작님.”

르네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흘깃 배를 쳐다보는 클레르건 공작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 클레르건 공작의 친절이 임신과 관련한 부분임을 깨달았다.

“걱정 마세요. 임신 전보다 빨리 피곤을 느끼지만 아직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에요.”

“좀 더 편한 의자가 있어야겠군.”

“괜찮은……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선뜻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밝게 웃는 모습을 보더니 클레르건 공작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르네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 모습을 보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잘난 남자가 자신에게 매력을 느껴 수줍어할 이유가 없었다.

“내일 또 오지.”

“……네?”

이 의미 없는 시간을 또 보내야 하나? 당황한 르네와 다르게 클레르건 공작은 문밖에 대기하던 로이드에게 르네의 부축을 맡기고 한 발 물러섰다.

어느새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모습이었다.

“편히 쉬시오.”

“아! 조심히 돌아가세요.”

로이드가 허리춤을 꾹 누르자 르네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클레르건 공작이 복도에서 사라지자 르네는 곁에 선 로이드를 조용히 불렀다.

“로이드.”

“응?”

“대체 공작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

“와야 하니까.”

심드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르네는 고개를 휙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