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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설마…… 계약 조건이야?”

“응.”

“왜?”

“난 모르지.”

태연한 답변에 결국 이마를 붙잡았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자 로이드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래? 머리가 아파?”

얘는 눈치가 없는 걸까, 일부러 없는 척하는 걸까. 르네는 대화를 나눌수록 심란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혹시 공작님이 매일 찾아오실까?”

“아마도.”

“물론 난 저택의 손님이니까, 아주 관대하게 생각하면 손님 대접을 위해 티타임을 가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매일 찾아오면 아무래도 오해를…….”

거기까지 말을 잇던 르네는 로이드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세르반이 일부러 그런 조건을 넣었어?”

“글쎄,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오해를 하나?”

“로이드, 난 예법 선생이라지만 하는 일도 없이 별관만 차지하고 있어. 그런데 공작님이 날마다 찾아와. 알고 보니 임신한 여인이라면 분명히 누군가는 엉뚱한 상상을…….”

“소문이 나도 저택 안에서만 날 텐데 뭐 어때, 그 정도는 공작이 알아서 하겠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로이드를 보면서 이곳의 가치관이 생각보다 자유분방한가 추측했다. 정작 자신은 배 속의 아이 아버지, 남편의 얼굴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깟 소문 따위 새삼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흠, 뭔가 빈정거리는 느낌인데?”

“오, 로이드. 난 그런 의도가 없지만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맞겠지.”

“……응?”

로이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서 고민하자 슬쩍 등을 밀었다. 과하게 다정한 미소도 잊지 않으면서 로이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로이드, 오늘 저녁은 조금 늦게 먹을까? 지금은 잠깐 쉬고 싶어.”

“그럴까?”

“물론 너도 쉬어. 아니면 먼저 저녁을 먹어도 좋고.”

“좋아! 혹시 내가 필요하면 불러.”

금세 히죽거리는 낯으로 변한 로이드를 보며 르네도 활짝 미소 지었다.

“이제 나가 주겠니?”

“음, 지금?”

“그럼 언제 나가려고?”

“하하! 그렇지, 지금 가야지.”

호탕하게 웃으며 사라지는 로이드의 뒷모습을 보며 르네는 긴 의자에 몸을 기울였다.

갑자기 찾아온 클레르건 공작도, 마음대로 계약 조건을 정한 세르반도 모두 불편했다. 르네에게 안정된 지위와 환경을 마련해 줬지만 고마운 마음만큼 부담감도 컸다.

“전부 남의 도움으로 얻은 것들이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그녀는 지금 당장 공작가에서 하녀로 일하라고 해도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투성이 세르반과 연결된 공작가라면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드레스의 부드러운 질감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로이드가 챙겨 놓은 자수틀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습관처럼 놓던 단색의 물망초였다.

“자수를 놓아서 작은 장식품이나 소품을 팔까?”

하녀로 일할 때는 비싼 원사를 구하는 일조차 어려웠다. 당연히 아무리 잔사를 털어 내고 다듬어도 이렇게 매끈한 표면이 나오지 않았다.

수놓아진 표면을 손으로 쓸어 보던 르네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자수틀을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방금 찾았다.



***



며칠 뒤, 별관은 새로운 가구를 들이느라 분주했다. 멀쩡한 소파 여러 개가 하인들 손에 의해 별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프레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공방에 주문한 가구가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했습니다. 소란스러우셨습니까?”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프레오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르네는 윤기가 흐르는 벨벳 소파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네. 혹시, 공작님이 지시하셨나?”

“네, 거위 솜털로 속을 채운 쿠션과 폭이 넓은 소파를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

“이 소파는 어떠신가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다양한 색상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르네는 자신의 의향을 묻는 프레오에게 의아함을 감춘 채 예의를 차렸다.

“마음에 드네, 공작님께도 감사 인사 전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졸던 르네는 로이드의 손에 이끌려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먼저 기다리던 클레르건 공작은 묵묵히 본인 일에 집중하더니 기어코 한 시간을 채우고 별관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별관에 각종 자수용 실과 원단들이 도착했다.

그다음 날은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굽 낮은 신발을 선물받았다.

그다음 날은 각종 과일들이 별관 주방을 가득 채웠다.

그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



“아…….”

한가롭다.

르네는 정원용 소파에 앉아 한숨 섞인 탄성을 터뜨렸다.

불안한 마음과 다르게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고 여유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르네는 이 아름드리나무 그늘 밑을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 있으면 불안한 생각이 잠시 수그러들었다.

“부인, 오늘도 여기서 쉬어 가시려고요?”

“그래.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편히 앉아서 늦여름 햇살을 만끽하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풀 내음을 맡으며 하염없이 하늘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빠져나오는 햇빛은 바람이 불어 흔들릴 때마다 반짝이는 별처럼 보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르네는 문득 발이 조여 답답했다.

“마리, 작은 스툴을 하나 가져오렴. 다리를 올려놔야 할 것 같아.”

“네, 부인.”

이제 15살이 된 마리는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와 코 주변의 주근깨가 귀여웠다.

“어…… 부인, 별관으로 가는 길이 어디였죠?”

“마리, 네가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헷갈리니.”

“헤헤, 오늘 알려 주시면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르네는 부채를 들어 방향을 일러 주고 종종거리며 가는 마리를 쳐다봤다.

하녀 일을 이제 배우는 마리는 대부분 서툴렀다. 클레르건 공작 나름대로 르네 수준에 맞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붙여 준 모양이었다.

‘귀족 생활을 잘 모르는 아이니까 내가 실수해도 모를 거라 생각했겠지.’

마리는 실수할 때마다 배시시 웃으며 넘어갔지만 야박하게 굴 생각도 없었다.

“부인, 여기 가져왔어요.”

“수고했어. 너도 앉아서 쉬렴.”

르네는 신발까지 벗고 발을 올렸다. 로이드가 새 신발을 구해 와서 한결 편해졌지만 발이 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타인의 시선과 기척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았다.

“아일레스 부인.”

“어머, 클레르건 공작님.”

“…….”

“오늘도, 오셨네요.”

클레르건 공작이 움찔했지만 르네는 그저 화사하게 웃었다.

‘이 남자, 또 왔어!’

누가 봐도 바쁜 사람이었다.

고위 귀족이니 가문에 속한 가신들의 보고와 영지 일만 처리해도 하루가 모자랄 사람이었다. 그런 공작이 매일 르네를 찾아와 꼭 한 시간씩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다.

“오늘은 황실에 가지 않으시나요?”

“쉬는 날이오.”

“네, 그렇군요.”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한 친절이라 여기고 사양도 했었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서 오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몰랐다. 미리 언질을 주거나, 시간을 정하면 좋을 텐데 진짜 귀족도 아닌 자신이 요구하기엔 과한 것 같아 말하지 못했다.

‘확실히 불편하다……. 계약 때문이라면 차라리 직접 말해 볼까.’

클레르건 공작은 자연스럽게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클레르건 공작님. 몸이 무거워 재빨리 일어나기가 어렵네요. 양해 부탁드려요.”

“괜찮소. 편하게 앉아 있으시오.”

클레르건 공작은 오랜만에 정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익숙한 연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당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뒤늦게 스스로의 행동에 놀랐다.

쨍그랑.

“으핫, 죄송해요!”

부산스럽게 차를 준비하던 마리가 기어코 찻잔을 떨어뜨렸다.

클레르건 공작은 고개를 돌리다가 스툴 위에 놓여 있는 발을 알아챘다. 드러난 살갗을 보고 놀란 시선이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르네에게 향했다.

“부인, 실례했소. 쉬는 시간을 방해한 것 같군.”

“햇볕이 따뜻해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어요. 혹시 공작님도 볕이 좋아 산책 나오셨나요?”

“…….”

“아니면 오늘도 저를 만나러 오셨나요?”

“……몸은 괜찮소?”

르네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클레르건 공작을 살폈다.

“혹시 매일 저를 찾아오시는 이유가 세르반과 맺은 계약 때문인가요?”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는지 클레르건 공작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도 자신의 모습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한 시간씩 그대와 시간을 보내라는 조건이 있기는 했소.”

“꽤 상세한 조건이네요.”

“오늘은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오.”

“공작님께서 계약 조건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전할게요. 불편하면…… 아니, 바쁘실 테니 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서로 필요에 의해서 계약을 맺었고, 조건을 이행하는 것이니 그 부분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소.”

무뚝뚝해 보이는 클레르건 공작이 생각보다 섬세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

큰 의미 없이 보내는 한 시간이지만, 그때마다 공작은 르네의 필요를 잘 알아차렸다. 클레르건 공작이 돌아가면 곧장 르네에게 필요한 물품이나 사람을 보내 주곤 했다.

“공작님, 그렇다면 다음부터 시간을 정해서 방문해 주세요.”

클레르건 공작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엄밀히 말해서 저는 진짜 귀족도 아니니, 무리한 요구인 것 같아서 고민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임신한 상태라서 불쑥불쑥 찾아오시면…….”

“내 일정만 신경 쓰느라 미처 부인을 생각하지 못했소. 미안하오.”

세상에, 고위 귀족인 공작이 슬럼가 여인에게 사과라니. 르네는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다. 자신이 진짜 귀부인으로 보이나.

“공작님, 사과를 바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어요. 지금도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걸요. 마리를 보내 주신 것도 감사해요.”

클레르건 공작은 서툴게 차를 따르는 마리를 슬쩍 쳐다보고 르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앞의 여자는 만날수록 새로웠다.

슬럼가 여인이라는 전제만 없으면 의심할 수 없는 현숙한 귀부인이었다. 귀부인이라면 전속 시녀가 있어야했다. 저렇게 어리고 서툰 하녀가 아니라.

클레르건 공작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부인, 혹시 시중들 시녀가 필요하면 다시 알아보겠소.”

르네는 의아한 눈빛을 띠다가 공작의 말에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마리를 쳐다봤다. 신경 쓰지 말고 공작님 차나 잘 따라 드려.

“공작님, 저는 괜찮아요. 저에게 딱 맞는 아이에요.”

“으앗!”

르네는 마리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부채를 들어 내저었다. 찻물이 넘치는 찻잔을 보고 서둘러 클레르건 공작을 불렀다.

“잠시 산책을 할까 하는데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산책할 생각은 없었지만 차 마시기는 그른 것 같아 다른 부탁을 했다. 클레르건 공작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