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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문득 아이 아버지냐고 묻던 르네가 생각났다. 몸에 익숙하게 밴 예법과 언행은 누가 봐도 현숙한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귀족 부인처럼 우아하면서, 정작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라니.

‘세르반은 잘도 그런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있었군.’

세르반이 내건 조건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마차에서 내리던 르네를 봤을 때 놀랐다. 어두운 마차에서 눈치채지 못한 모습을 보고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와 볼우물이 깊게 패도록 짓는 미소. 그녀는 단출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피부의 르네를 보는 순간 자신이 무례하게 군 적이 있었나 돌아볼 정도였다.

새삼스레 가녀린 몸과 부푼 배가 눈에 들어와 신경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세르반이 소중히 여기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얼굴을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똑똑.

“들어와.”

“공작님, 아일레스 부인을 처소에 모셨습니다. 부인께서 책을 찾으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함께 온 시종이 부탁하던가.”

“아닙니다. 부인께서 먼저 서재가 있는지 물으셨고,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본관 서재에 에드워드가 보던 책들이 아직 있나.”

“네, 따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더 이상 보지 않는 책을 별관으로 옮기면 되겠군. 내일 사람들을 시켜 옮기게.”

“늦게까지 업무를 보시면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시중은 필요치 않으니 그만 물러가게.”

“알겠습니다.”

“……프레오.”

“네.”

마차 안에서 배를 감싸고 문지르던 여자가 생각났다. 잠시 고민하던 클레르건 공작은 프레오를 불러 세웠다.

스스로 생각해도 과한 친절이었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부인이 마차를 타고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내일 의원을 불러 살피도록 하게.”

“네, 공작님.”

홀로 앉아 있는 집무실은 적막했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습한 초여름의 바람이 들어와 클레르건 공작의 머릿결과 등불을 흔들었다.

공작의 얼굴에 그림자가 일렁이며 그의 마음에도 의문이 더해졌다.

‘예법에 익숙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슬럼가 여자라…….’



***



별관으로 향한 르네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척 피곤했다. 계속되는 긴장과 무거운 몸, 흔들리는 마차에 시달린 몸은 생각보다 빨리 지쳤다.

방에 들어서자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차마 사용인들 앞에서 그럴 수 없었다. 소파를 찾아 앉는 순간 골반과 허리를 누르는 묵직한 통증 때문에 작게 미간을 구겼다.

“프레오, 오늘은 밤이 늦어 고단하니 따뜻한 물수건만 준비해 주게. 그리고 로이드의 처소는 가까운 곳에 배정해 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부인.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르네는 자그마한 배를 잠시 내려다봤다.

“혹 별관에도 서재가 있는가?”

“네. 2층에 작은 서재가 있습니다. 내일 안내해 드릴까요?”

“그리해 주게. 별관 서재에 아이들이 읽을 책이 있을지 모르겠군.”

“별관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으나 본관에는 최신간까지 제법 있습니다. 공작님께 여쭈어 별관 서재에도 준비해 드릴까요?”

“그러면 좋겠군. 수고했으니 이만 물러가게.”

“네, 하녀를 곧 보내겠습니다.”

르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오가 나가고, 구석에서 방을 둘러보는 로이드를 불렀다.

“로이드, 잠깐 물어볼 것이 있어요.”

“르네, 굉장히 자연스럽네. 진짜 귀족 같아.”

르네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하는 로이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짜 귀족…… 그렇겠지. 익숙하게 사용인들을 부리던 때가 있었지.’

“르네?”

재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공작님이 애써 만들어 준 신분인데 잘 사용하면 좋죠. 로이드는 제 개인 시종으로 함께 지내나요?”

“배 속의 아이도 챙기고 너도 돌보고, 혼자서 지내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그는 어떻게 됐어요?”

“2, 3구역 녀석들 처리하는 일은 문제없어.”

“세르반은 많이 다쳤나요?”

“세르반? 다칠 만큼 약하지 않아. 네 생각 하느라 한눈팔다 그랬겠지, 뭐. 당분간은 내가 오가며 소식 전해 줄게.”

“약해 보여서 묻는 게 아니라…….”

“세르반도 평소 지골로 구역을 좋아하지 않았어. 네가 자꾸 쏘다니니까 적당히 내버려 뒀는데 이번에 전부 정리할 모양이야.”

“…….”

“아이가 있으면 더 피곤하다며? 너 아까부터 인상 쓰고 있어. 이만 쉬어.”

로이드는 시종일관 가볍고 진지한 구석이 없었다. 르네는 자신의 불안을 덜어 주기 위해서 유독 가볍게 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 편하게 해. 어차피 나이 같은 거 의미 없어.”

“음……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편하게 말해도 될까?”

“응? 아하! 내가 어려 보이기는 하지! 그래, 일단 쉬어. 한숨 자고 생각해도 늦지 않아.”

르네는 피로감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소파에 올리고,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 힘없이 눈을 깜박이다가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는 로이드를 보며 고민했다.

“부인, 시종 앞에서 보이기에는 경망스러운 자세이니 예의를 갖추시는 게 좋겠습니다.”

놀리듯 빈정대는 로이드의 말투가 거슬렸지만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차라리 침대에 가서 쉬자는 마음에 허리를 세워 앉았다. 도와주려고 다가오는 로이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

“응?”

“……혹시 너는 알고 있어?”

“뭘? 그 아이?”

로이드는 르네가 감싼 자그마한 배를 내려다봤다.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진 배는 자세히 봐야 눈치챌 만큼 티가 나지 않았다.

로이드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 없자 르네는 초조해졌다.

“로이드, 설마.”

“응?”

“혹시 아이 아버지가…….”

르네가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 말없이 뚫어져라 보는 시간이 길어지던 순간, 로이드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배를 붙잡고 웃는 로이드를 보자 김이 샜다. 로이드도 아이 아버지가 아니네.

“크큭, 르네…… 오늘 하루 중 가장 웃기는 순간이었어. 설마 내가 아이 아버지인지 궁금했어? 그러면 내가 너랑…… 어휴, 세르반이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생각만 해도 무섭다. 난 아니야, 절대 아니야. 큭.”

눈물까지 흘리는 로이드를 보자 민망해졌다.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저런 격렬한 부정이라니.

“아니, 너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이지.”

“요 조그만 머릿속이 복잡하네. 산모에게는 안정과 휴식이 중요하니까 일단 쉬시죠. 부인.”

“알았어.”

새침하게 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로이드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보다 못한 르네는 서둘러 로이드를 쫓아내듯 내보냈다.

“배도 뭉치고 발도 붓고, 이 몸에 적응하기 쉽지 않구나.”

신음처럼 혼잣말을 하고 동그란 배를 쓰다듬었다.

“네 아버지도 모르는 엄마라니, 파격적이다. 그치? 아가, 엄마가 가끔 제정신이 아닌 것 같고 지금도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지만…….”

나는 네가 보고 싶다. 너무 궁금해. 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릿해질수록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이번에는 꼭 만나자. 알았지?”

문득 가죽 가방의 내용물이 생각나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올랐다. 뻐근한 몸을 축 늘어뜨리고 가방을 쥔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지만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가죽 가방 안에 담긴 서류들을 꺼내 한 장씩 넘겨 보던 르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전부 뭐지? 왜 내 이름으로…….”

남은 서류를 훑어보던 르네는 늦은 밤까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



다음 날, 의원이 진료를 보고 돌아간 직후였다. 이른 아침부터 별관을 찾아온 프레오 집사는 살뜰하게 르네를 보살폈다.

“부인, 2층 서재 청소와 서고 정리가 끝났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수고했네. 공작가 집사인 자네가 잘했겠지. 지금은 피곤하니 나중에 가서 보겠네.”

“그러면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고맙지만 지금은 쉬고 싶네. 자네도 그만 물러가게.”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방문 옆에 서 있던 로이드는 방을 나서는 프레오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제법 그럴싸했다.

다만 프레오가 나가자마자 짝다리를 짚는 것을 보면서 르네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들 앞에서는 저렇게 멀쩡한 모습인데 단둘만 있으면 건들건들, 시정잡배가 따로 없었다.

질 좋은 시종복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까지 넘기니 로이드는 소년과 청년 사이의 앳된 외모였다. 하루 종일 얼굴을 붉히고 호들갑을 떠는 별관 하녀들도 이해가 됐다. 세르반처럼 흑발과 금안이라서 형제인지 물었지만 질색하며 부정하길래 더 묻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응? 내 표정이 왜?”

“시정잡배 보는 것 같은 표정이라서.”

눈치는 있네.

“뭐?”

“아니야. 로이드, 여기 앉아 봐.”

싱긋 웃으며 옆자리를 두드리자 털썩 주저앉는 로이드 때문에 르네의 몸이 들썩였다.

“흐음, 로이드.”

“이런, 미안.”

“……괜찮아, 그것보다 어제 가방 안의 서류를 봤는데.”

“세르반이 챙겨 준 가방?”

르네는 챙겨 놨던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 서류들은 전부 뭐야? 너도 알고 있었어?”

세르반이 건네준 가방 안에는 르네의 신분증명서와 함께 처음 보는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어딘지 모를 땅과 건물들의 권리 증서, 아레스 상단과 칼리나 정보 길드의 사업 관련 문서…… 그것들은 모두 르네의 소유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세르반이 지골로 구역의 로드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하필 소유자의 이름이 전부 르네로 된 것도 의문이었다.

“글쎄, 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귀족 신분증명서도 과하지만 땅과 건물의 권리 증서까지 전부 내 소유로 되어 있어.”

“음, 주고 싶어서 줬겠지?”

르네는 진지했지만 히죽거리며 말하는 로이드를 상대하기엔 정신력 소모가 컸다. 혹시 알 수 없는 세력 다툼에 휘말린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이유 없는 친절을 의심했어야 했는데.

로이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르네를 흘깃 쳐다봤다.

“괜한 상상은 할 필요 없어. 아마 세르반은 정말 주고 싶어서 줬을 테니까.”

“세르반이…… 내 남편이 맞아? 아이 아버지도 아닌데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같아.”

“정말 기억이 전혀 안 나는구나.”

“응?”

놀란 르네의 표정을 보고 로이드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세르반에게 잃어버린 동생이 있었고, 한동안 그 아이를 찾으러 각지를 돌아다녔어.”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