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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석후의 광오한 말에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해표의 얼굴은 미륵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개방에서 우리 소림을 위해 마련해 준 자리이니만큼 지금부터 저자의 처분은 소림에서 맡고자 하는데, 그리하여도 되겠소?”

해표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우재에게 말했다.

“저희의 무위로는 피차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요. 장로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뛰어난 무공을 지녔음에도 내색하지 않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우재였다.

우재의 대답을 들은 해표가 자신의 뒤편에 위치한 제자 중 한 명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삼장로의 뒤에서 조용히 기립해 있던 건장한 체구의 한 승려가 석후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석후의 오 장(약 15m) 앞에 멈추어 선 그는 조용히 포권하였다.

“소림의 이대 제자 현유라 하오. 본 사의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를 사용하여 당신과 겨루어 보고자 하오.”

명문 정파의 법도를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한 현유의 모습에 석후가 조용히 웃었다.

“비열한 짓거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무에도 법도를 지키려 하는구려. 그렇다고 하여 지금과 같은 비열한 행태가 어디 가려지겠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짓일 뿐이오.”

소림이 맞이한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개방과의 공조로 이루어지는 비열한 행위가 맘에 들지 않는 현유였다.

공명정대한 만큼이나 순진한 마음을 석후가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내뱉은 말에 현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석후가 피식 웃으며 포권하였다.

“석가장의 석후요. 내 스승은 산천에 즐비한 금수들이니, 짐승의 권법인 금권(禽拳)을 보여 주고자 하오.”

현유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석후가 자신을 희롱하는 것인지, 독문 무공을 펼치려는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현유가 예전 초식인 헌원과호(軒轅跨虎)를 펼쳐 보였다.

허공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를 타고 넘어가기라도 하듯 오른 주먹을 매끄럽게 앞으로 내밀다가 다시 주먹을 중단으로 거두어들였다.

석후는 현유의 동작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예전 초식에 어리둥절한 석후였으나, 지금부터는 출수하겠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충 의미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초출(武林初出) 같은 반응이로군. 저렇게 어리숙한 자가 암월련의 인물들을 상대로 혈겁을 벌였단 말인가.’

해표는 해표대로 석후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내기(內氣)와 어리숙한 모습에 무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였다.

선공(先攻)은 현유였다.

석후와 오 장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현유가 대나이신법(大挪移身法)을 펼쳐 순식간에 일 장 앞으로 다가서더니, 회두망월(回頭望月)을 펼쳤다.

현유의 회두망월은 손바닥을 펼친 왼손을 석후의 가슴을 향해 출수하는 걸로 시작되었다. 석후가 회피를 위해 왼쪽으로 한 걸음 이동하자 자세를 낮추고, 몸을 왼쪽으로 둥글게 회전시키며 오른 주먹을 재빠르게 출수하여 석후의 턱을 가격하는 연속 동작이었다.

중후한 내력(內力)이 실려 있어 현유가 몸을 회전시킬 때 석후를 압박해 오는 바람이 일지만, 움직임을 제한할 정도로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석후에게 현유의 수법은 공명정대해 보이는 그의 심성만큼이나 정직한 것처럼 보였다.

석후는 몸을 회전시켜 턱을 찔러 오는 현유의 오른 손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헉…….”

석후가 칠성의 공력이 실린 자신의 일권을 너무도 쉽게 제압하자, 현유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이 나와 버렸다.

“과하게 큰 힘을 동작에 실어 예리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소. 다시 해보시오.”

소림과 개방의 고수에게 둘러싸인 것을 잊기라도 했는지, 석후는 현유의 손목을 놔주고 일 장 뒤로 물러섰다.

석후가 손쉽게 현유를 제압하는 모습에 해표를 비롯한 삼장로의 표정이 구겨졌다.

‘장기공(壯氣功)이 칠성에 달한 현유의 출수를 저리 쉽게 잡아채다니, 금나수법(擒拿手法)이 극에 달한 자로구나.’

인상을 찌푸린 해표가 속내로 감탄하였다.

현유는 소림의 이대 제자 중 제일 월등한 실력을 가진 자로, 심성이 순진하여 생명을 앗을 정도의 위협적인 출수를 꺼린다는 약점을 제외하고는 중원무림 내 또래 중에는 그와 대적할 만한 자가 없었다.

해표 또한 현유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지만, 자신이 석후의 나이였을 때를 생각해 본다면 그의 성취는 누가 보기에도 놀라운 것이었다.

“한 수를 양보해 주신 것… 감사하오.”

비무 전보다도 얼굴이 더욱 빨개져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그에 어울리지 않는 예를 표하는 현유였다.

‘참으로 솔직한 자로군.’

석후의 짧은 식견으로 보기에도 현유의 무재(武才)는 뛰어나지만, 착한 심성이 되레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유는 일 장 간격을 두고 물러서 있는 석후에게 동자배불(童子拜佛)의 초식을 펼치며 접근했다.

동자배불은 절을 하듯 자세를 매우 낮추어 상대와 일 촌 거리까지 접근한 뒤, 짧은 거리에서 빠르기에 중점을 둔 권을 연달아 세 번 출수하는 초식이었다.

석후의 움직임이 매우 재빠르고 금나수법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생각하였을 때, 그의 조언대로 큰 동작이 해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하지만 석후의 반응은 현유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보통 빠르게 접근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상대방이 어떠한 방식으로 출수할지 예상할 수 없기에 좌 또는 우로 공격을 흘리며 반응을 살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석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현유를 향해 더 빠른 움직임으로 접근하고 있던 것이었다.

현유가 일 촌의 거리를 재 동자배불의 삼 연격을 출수하기도 전에, 석후의 어깨가 낮은 자세로 있는 그의 면전을 향해 부딪쳐 왔다.

“헙!”

예상하지 못한 대응과 빠르기로 다가오는 석후의 견격(肩擊)에 현유가 다급한 경호성을 뱉어 냈다.

현유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손에 공력을 불어넣어 다가오는 석후의 어깨를 막아서는 것이 전부였다.

쿵!

“큭…….”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석후의 견격이 현유의 양손을 밀치며 그대로 안면에 격중되었다.

둔탁한 소리가 나며 코뼈가 부서져 버린 것인지, 코에서는 붉은 선혈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형장의 배려에 감사하오. 본인의 부족함을 알고 이만 물러서고자 하오.”

현유는 석후의 견격이 자신의 양손에 부딪히자마자, 끌어올린 공력이 단숨에 와해되는 것을 느꼈다.

양손을 뚫고 자신의 안면을 향해 석후의 강력한 견격이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그대로 머리가 박살이 나서 죽게 될 것을 예견하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견격의 기운이 줄어들어 코뼈가 부서지는 것에 그친 것이었다.

현유는 석후가 막바지에 자신의 기운을 수습하였기에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시…….”

“누구 마음대로 물러선단 말이냐! 본 사의 흥망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고작 이대 제자인 네놈이 물러서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석후가 현유의 패배 시인을 받아들이려 할 때, 삼장로 중 성격이 가장 불같기로 유명한 해오가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현유, 네가 저 녀석에게 어떠한 상처도 입히지 못한다면, 네놈뿐만 아니라 네놈의 동생까지 본 사에서 파문할 것이다. 목숨을 내려놓고 비무에 임하라!”

“당신의 언사는 마치 명문 사파의 장로 같구려.”

제자를 사지(死地)로 모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언사에 석후가 해오를 비꼬며 말했다.

“석가장의 자제라 기본적인 예의는 있을 줄 알았더니, 조실부모하여 예(禮)에 대해 배우지 못한 것이더냐?”

막말에 시선을 해오로 옮긴 석후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 삼장로의 뒤에 서 있던 여섯 명의 승려가 동시에 신법을 펼치며 땅으로 내려서더니 석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상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부류와 신념을 버리고 개처럼 복종하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더군. 당신들은 어느 쪽이오?”

현재 소림이 석후에게 하고 있는 행태를 빗대어 하는 말임을 알아차린 육 인의 소림승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개개인의 잡념은 집단의 결속을 깨뜨릴 뿐이다. 우리에겐 본 사와 선사들의 명예가 우선일 뿐이다.”

나지막이 석후의 말에 대답한 이는 육인나한진(六人羅漢陣)을 이끄는 현벽이었다.

현벽은 스승인 해오에게 십팔나한진의 변형인 육인나한진을 전수 받아 진의 수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스승인 해오는 진의 구성원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소림에 대한 충정이 강한 제자들을 우선하여 선발하였으며, 그중에서도 그가 구상한 육인나한진의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제자가 바로 현벽이었다.

개인의 목숨보다도 충정을 중히 여기는 제자들이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어 소림을 위해 쓰일 절진을 익힌 것, 그것이 육인나한진이었다.

“보아하니 소림은 제자가 아니라 개들을 기르고 있었나 보군.”

말이 끝나자 그들은 석후를 반원으로 둘러싸는 진형을 만들었다.

그들은 소림의 여타 제자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곤을 들고 있었다.

본래 십팔나한진은 검수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의 변형인 육인나한진 또한 검수를 바탕으로 창안한 진이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이 부족한 이들이 상당한 고수를 상대로 진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곤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해오가 진을 재설계한 것이었다.

최소한 육 척은 되어 보이는 곤을 자신에게로 향하여 들고 반원으로 둘러 싼 여섯 승려의 모습에서 석후는 갑갑함을 느꼈다.

길게 만들어진 곤으로 상대방에게 접근할 거리를 주지 않으며 압박하는 것, 그리고 곤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기운들이 한데 어우러져 석후의 몸을 무겁게 했다.

석후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익힌 내공심법은 대다수의 소림 제자들이 주력으로 익히는 장기공(壯氣功)이나 십팔나한공(十八羅漢功)이 아닌 마보참춘공(馬步站椿功)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타 내공심법에 비해 위력적인 강맹함은 떨어지나, 절정에 도달할수록 기의 흐름을 더욱 세밀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보참춘공을 절정 가까이 익힌 여섯 승려가 펼치는 육인나한진은 세밀한 기의 제어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자신들의 공세를 펼치는 절진이 되는 것이었다.

육인나한진에 결박당한 고수는 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내력을 소진하게 되고 결국에는 사로잡히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현벽이 고함을 외쳤다.

“합(合)!”

그것이 석후와 육인나한진 간의 개전(開戰)을 알리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