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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석후는 밤새 잠에 들지 못하였다.
자정이면 습관처럼 하던 운기조식도 집중이 흐트러져 제대로 해내지 못하였다.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혹독한 수련을 십 년간 버티어 낸 석후지만, 막상 준비를 마치고 보니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결국엔 복수의 대상을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 석후는 복수를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기로에 섰다.
우재와 만나기로 한 시각은 묘시지만, 이각(30분) 전에 이미 서찰에 적혀 있던 낙양 외곽의 장소로 일찌감치 나와 있는 석후였다.
복수에 앞서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석후에게는 금세라도 터질 듯한 기운이 치솟아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였다..
두 시진, 아니, 이틀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는 이각을 기다린 석후에게 열 명이 넘는 인원의 발자국 소리가 오십 장(약 150m) 밖에서 들려왔다.
우재에게 사적으로 의뢰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이기 때문에 평소라면 많은 인원을 의심했을 석후다.
하지만 그는 복수를 시작할 수 있는 순간을 앞두고 지나치게 흥분하여 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낙양 외곽에 위치한 도화원(桃花園)은 오월의 완연한 봄을 맞아 흐드러지게 복사꽃이 피어 있는데, 우재가 들어설 때부터 살랑살랑 부는 새벽바람이 꽃잎을 떨어뜨리며 그를 반기는 석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직은 날이 밝지 않아 옅게 깔린 어둠을 뚫고, 우재를 선두로 하여 십여 명의 인물들이 도화원에 들어오고 있었다.
십여 명의 인물들이 석후의 십 장(약 30m) 앞에 도달할 때, 석후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석후는 십 장 앞에서야 어둠에 가려져 있는 그들의 모습을 식별할 수 있었는데, 우재의 뒤로는 개방의 거지 둘이 따라오고 있고, 그 뒤로는 소림승 열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화원으로 진입한 인물들의 면면을 확인하자, 이상함을 느낀 석후는 이리저리 날뛰던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좌중에 있는 인물들을 냉정히 살폈다.
‘개방 거지 셋 중에는 우재가 뛰어난 기운을 가지고 있고, 소림승 열 명 중 셋은 엄청난 고수로구나.’
석후에게 엄청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소림승 세 명은 삼장로인 해표, 해오, 해주였다.
그들은 소림의 장문인인 해종과 같은 배분인데, 그들중 무공은 해종이 가장 뛰어나지만 삼장로가 협공을 하면 그 또한 무사하지 못할 정도의 무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석후의 앞에서 미소 짓고 있던 우재가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군.”
“불과 이각 전까지는 좋은 아침이었으나, 이젠 아니로군.”
“무엇이 당신의 심기를 거슬렀나?”
우재는 석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가늘게 찢어진 두 눈을 최대한 크게 뜨며 말하였다.
“사적인 의뢰 이야기를 듣는 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소만?”
당장에라도 우재의 머리통을 몸통에서 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가라앉힌 석후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자네 스스로는 자네의 의뢰가 사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무명소졸이 판단하기에 뒤에 계신 분들께서도 그 내용을 듣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어 피치 못하게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되었네.”
“나의 의뢰가 뒤에 있는 소림승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말이로군. 당신이 지금 뱉은 이야기에 책임지지 못한다면 개방은 각오해야 할 거요.”
매우 오만한 석후의 말에 우재의 눈썹이 크게 뒤틀리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자네가 장건이라는 자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맡기고 난 뒤, 이를 위해서는 그와 자네의 연관성을 먼저 알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래서 우선 자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을 이번 의뢰를 해결하기 위한 첫 방향으로 정했지.”
우재가 목이 타는지 침을 삼키어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이어서 이야기하였다.
“처음 자네를 육개에 데리고 간 날, 우족(牛足)에 대한 설명을 하며 회음현의 사냥꾼 이야기를 꺼내던 것이 머릿속을 맴돌더군. 그래서 나는 감숙 남단에 위치한 회음현으로 찾아갔지. 과연 그곳의 마을에서는 자네를 모르는 자가 없더군. 후라는 청년을 아느냐고 묻자마자 흑웅을 단신으로 잡은 사내라는 대답을 바로 들을 수 있었지. 또한 그 비싼 흑웅의 가죽을 헐값에 급히 처분하고 어디로인가 사라져 버린 사내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흑웅을 잡았다는 우재의 이야기에 중인들은 번갈아 가며 석후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회음현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확인을 하였으니, 거처를 찾아야만 했지. 마을 사람들은 자네의 거처는 모르고 있지만, 당신과 항상 붙어 다니던 사냥꾼의 거처는 대부분 알고 있더군. 그래서 그곳을 갔더니, 불과 백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그만 움집을 찾았네.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고 있나?”
“무엇이오?”
움집 안에는 자신의 출신을 알아차릴 만한 물건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석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여러 옷가지들 속에 자네가 어린 시절 입었을 법한 상의가 한 벌 있었네.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해져 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더군. 옷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만져 보아도 질감이 무척이나 좋더군. 그래서 알아보니 잠사로 만들어진 옷이었단 말이지. 자네는 잠사가 가장 유명한 지역이 어디인지 알고 있겠지?”
우재는 자신의 질문에 석후가 대답을 않자 피식 웃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청해성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강과도 닿아 있는 사구현 일세. 그곳을 떠올리니 십 년도 더 전에 위명을 떨치다 사라진 석가장이 떠오르더군. 불모지인 사구현에서 값비싼 잠사 옷을 입을 수 있는 어린아이는 석가장의 자제일 수밖에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는 사라진 석가장의 생존자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고, 내 말이 맞는가?”.
“석가장의 생존자라고?”
“석가장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었나?”
중인들이 우재의 이야기에 놀라 웅성거렸다.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로군.”
석후의 대답에 가볍게 웃은 우재가 말을 이어갔다.
“뒤의 이야기는 더 흥미로울 것일세. 당시에는 석가장이 큰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지. 하지만 우리가 당시 조사한 바로는 화재가 주된 이유는 아니었네. 석가장 사람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한 곳에 모여 화장(火葬)이라도 한 듯이 새까맣게 타 있었으니까. 완전히 전소하지 않은 시체들에는 제법 실력이 있는 자들의 칼 솜씨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어디의 무공인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나?”
엷은 웃음을 띠며 이야기하는 우재를 노려보던 석후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의 짓이었나?”
“물론 자네가 큰 관심을 가질 것이라 확신했네.”
석후의 표정이 급변하며 되물어 오는 것을 보며 그가 석가장의 생존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는 우재였다.
“시체의 대부분에는 혈교(血敎)의 무공에 당한 흔적이 제법 남아 있었네. 다른 무공에 당한 흔적도 남아 있긴 하지만 타 무공의 흔적은 화마로 인해 시체가 심히 훼손되어 식별이 불가능했네. 중요한 것은 석가장 멸문 당시 혈교에서 무리를 이끌고 나온 주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이네. 그자는 바로 혈수천자(血手天子)일세.”
“혈수천자?”
석후가 급히 되묻자 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의 교주인 혈마(血魔)의 셋째 제자이지. 그리고 그자의 본명이 바로 장건일세.”
석후는 혈교라는 집단도 처음 들었지만, 교주의 제자가 직접 수하를 이끌고 석가장을 쳐들어오기에 적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석후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자 우재가 남은 이야기를 뱉기 시작하였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네. 혈교에 소속되어 있던 혈수천자는 스승으로부터 벗어나 한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암월련이네.”
암월련이 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단체라는 것은 소림승들도 모르고 있는지 크게 놀라는 얼굴이었다.
“이것이 자네가 궁금해하던 혈수천자 장건의 신분일세. 그리고 둘 사이에 얽혀 있는 과거가 우리 중원무림에는 희소식이 될 것일세.”
우재의 말에 석후가 두 눈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희소식이 되는 거요?”
“자네가 간직한 과거가 암월련이 소림을 향해 만들어 둔 함정을 무너뜨릴 열쇠가 되기 때문이지. 개방은 전력을 다해서 자네가 간직한 과거와 행적을 소문낼 것일세. 물론 자네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소림 무공을 흉내 내어 암월련과 정파무림 사이에 분쟁을 조장한 인물이 되는 것이고. 어떤가? 현재 정파무림이 맞이한 어두운 상황을 한 번에 걷어 줄 완벽한 계획이 아닌가?”
석후는 우재의 이야기에 소름이 끼쳤다.
자신과 혈수천자 장건 사이에 얽혀 있는 과거를 바탕으로 교묘하게 거짓을 끼워 넣어 정말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또한 실제 있던 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림을 암월련의 용의 선상에서 지울 수 있게 만드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암월련의 소실대탐(小失大貪)이라는 계획은 석후에게 입은 작은 손해(小失)를 소림에게 뒤집어씌워 정사대전의 명분(大貪)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소실대탐(小失大貪)은 매우 치밀한 계획이었지만, 석후의 과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든 우재의 이야기가 그들의 계획을 소실소탐(小失小貪)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우재의 이야기대로라면 암월련은 정사대전의 명분은 잃고,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힌 석후라는 범인만을 찾게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뛰어난 인물은 너무도 많고, 나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구나.’
석후는 자신이 알아차릴 틈도 없이 우재의 간계에 빠진 것에 대해 심히 자책하였다.
“개방에서 무공으로는 타백(打伯) 추일을, 두뇌로는 청효(靑梟) 우재를 제일로 친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삼장로의 수장인 해표는 소림을 암월련의 용의선상에서 지우는 동시에 정사간의 백년지약(百年之約)을 깨뜨려 명성을 실추하게 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우재의 뛰어난 두뇌에 찬사를 보냈다.
뒤이어 해표는 석후를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시주와 혈수천자와의 안타까운 과거가 소림과 중원무림에 홍복(洪福)이 되었으니, 이것 또한 운명이라 생각해 주길 바라는 바요. 중원무림을 위해 순순히 생명을 내준다면, 내세에는 극락왕생하도록 소림의 모든 제자가 빌어 주겠소.”
부드러운 음성이지만, 밖으로 뱉어지는 내용은 무척이나 간악한 것이었다.
“정(正)과 사(邪)를 왜 구분 지어 나누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정파무림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소림에서조차 이토록 간악한 짓에 힘을 보태는데 말이오.”
자신들의 치부를 찌르는 석후의 말에 소림의 모든 제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순순히 목숨을 내놓을 생각이 없으니 당신들은 준비하시오.”
이것이 석가장 최후의 생존자인 석후의 무위가 처음으로 전 무림에 알려지게 된 도화원 혈투(血鬪)의 시작이었다.
석후는 밤새 잠에 들지 못하였다.
자정이면 습관처럼 하던 운기조식도 집중이 흐트러져 제대로 해내지 못하였다.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혹독한 수련을 십 년간 버티어 낸 석후지만, 막상 준비를 마치고 보니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결국엔 복수의 대상을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 석후는 복수를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기로에 섰다.
우재와 만나기로 한 시각은 묘시지만, 이각(30분) 전에 이미 서찰에 적혀 있던 낙양 외곽의 장소로 일찌감치 나와 있는 석후였다.
복수에 앞서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석후에게는 금세라도 터질 듯한 기운이 치솟아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였다..
두 시진, 아니, 이틀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는 이각을 기다린 석후에게 열 명이 넘는 인원의 발자국 소리가 오십 장(약 150m) 밖에서 들려왔다.
우재에게 사적으로 의뢰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이기 때문에 평소라면 많은 인원을 의심했을 석후다.
하지만 그는 복수를 시작할 수 있는 순간을 앞두고 지나치게 흥분하여 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낙양 외곽에 위치한 도화원(桃花園)은 오월의 완연한 봄을 맞아 흐드러지게 복사꽃이 피어 있는데, 우재가 들어설 때부터 살랑살랑 부는 새벽바람이 꽃잎을 떨어뜨리며 그를 반기는 석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직은 날이 밝지 않아 옅게 깔린 어둠을 뚫고, 우재를 선두로 하여 십여 명의 인물들이 도화원에 들어오고 있었다.
십여 명의 인물들이 석후의 십 장(약 30m) 앞에 도달할 때, 석후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석후는 십 장 앞에서야 어둠에 가려져 있는 그들의 모습을 식별할 수 있었는데, 우재의 뒤로는 개방의 거지 둘이 따라오고 있고, 그 뒤로는 소림승 열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화원으로 진입한 인물들의 면면을 확인하자, 이상함을 느낀 석후는 이리저리 날뛰던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좌중에 있는 인물들을 냉정히 살폈다.
‘개방 거지 셋 중에는 우재가 뛰어난 기운을 가지고 있고, 소림승 열 명 중 셋은 엄청난 고수로구나.’
석후에게 엄청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소림승 세 명은 삼장로인 해표, 해오, 해주였다.
그들은 소림의 장문인인 해종과 같은 배분인데, 그들중 무공은 해종이 가장 뛰어나지만 삼장로가 협공을 하면 그 또한 무사하지 못할 정도의 무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석후의 앞에서 미소 짓고 있던 우재가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군.”
“불과 이각 전까지는 좋은 아침이었으나, 이젠 아니로군.”
“무엇이 당신의 심기를 거슬렀나?”
우재는 석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가늘게 찢어진 두 눈을 최대한 크게 뜨며 말하였다.
“사적인 의뢰 이야기를 듣는 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소만?”
당장에라도 우재의 머리통을 몸통에서 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가라앉힌 석후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자네 스스로는 자네의 의뢰가 사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무명소졸이 판단하기에 뒤에 계신 분들께서도 그 내용을 듣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어 피치 못하게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되었네.”
“나의 의뢰가 뒤에 있는 소림승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말이로군. 당신이 지금 뱉은 이야기에 책임지지 못한다면 개방은 각오해야 할 거요.”
매우 오만한 석후의 말에 우재의 눈썹이 크게 뒤틀리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자네가 장건이라는 자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맡기고 난 뒤, 이를 위해서는 그와 자네의 연관성을 먼저 알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래서 우선 자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을 이번 의뢰를 해결하기 위한 첫 방향으로 정했지.”
우재가 목이 타는지 침을 삼키어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이어서 이야기하였다.
“처음 자네를 육개에 데리고 간 날, 우족(牛足)에 대한 설명을 하며 회음현의 사냥꾼 이야기를 꺼내던 것이 머릿속을 맴돌더군. 그래서 나는 감숙 남단에 위치한 회음현으로 찾아갔지. 과연 그곳의 마을에서는 자네를 모르는 자가 없더군. 후라는 청년을 아느냐고 묻자마자 흑웅을 단신으로 잡은 사내라는 대답을 바로 들을 수 있었지. 또한 그 비싼 흑웅의 가죽을 헐값에 급히 처분하고 어디로인가 사라져 버린 사내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흑웅을 잡았다는 우재의 이야기에 중인들은 번갈아 가며 석후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회음현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확인을 하였으니, 거처를 찾아야만 했지. 마을 사람들은 자네의 거처는 모르고 있지만, 당신과 항상 붙어 다니던 사냥꾼의 거처는 대부분 알고 있더군. 그래서 그곳을 갔더니, 불과 백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그만 움집을 찾았네.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고 있나?”
“무엇이오?”
움집 안에는 자신의 출신을 알아차릴 만한 물건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석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여러 옷가지들 속에 자네가 어린 시절 입었을 법한 상의가 한 벌 있었네.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해져 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더군. 옷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만져 보아도 질감이 무척이나 좋더군. 그래서 알아보니 잠사로 만들어진 옷이었단 말이지. 자네는 잠사가 가장 유명한 지역이 어디인지 알고 있겠지?”
우재는 자신의 질문에 석후가 대답을 않자 피식 웃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청해성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강과도 닿아 있는 사구현 일세. 그곳을 떠올리니 십 년도 더 전에 위명을 떨치다 사라진 석가장이 떠오르더군. 불모지인 사구현에서 값비싼 잠사 옷을 입을 수 있는 어린아이는 석가장의 자제일 수밖에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는 사라진 석가장의 생존자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고, 내 말이 맞는가?”.
“석가장의 생존자라고?”
“석가장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었나?”
중인들이 우재의 이야기에 놀라 웅성거렸다.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로군.”
석후의 대답에 가볍게 웃은 우재가 말을 이어갔다.
“뒤의 이야기는 더 흥미로울 것일세. 당시에는 석가장이 큰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지. 하지만 우리가 당시 조사한 바로는 화재가 주된 이유는 아니었네. 석가장 사람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한 곳에 모여 화장(火葬)이라도 한 듯이 새까맣게 타 있었으니까. 완전히 전소하지 않은 시체들에는 제법 실력이 있는 자들의 칼 솜씨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어디의 무공인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나?”
엷은 웃음을 띠며 이야기하는 우재를 노려보던 석후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의 짓이었나?”
“물론 자네가 큰 관심을 가질 것이라 확신했네.”
석후의 표정이 급변하며 되물어 오는 것을 보며 그가 석가장의 생존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는 우재였다.
“시체의 대부분에는 혈교(血敎)의 무공에 당한 흔적이 제법 남아 있었네. 다른 무공에 당한 흔적도 남아 있긴 하지만 타 무공의 흔적은 화마로 인해 시체가 심히 훼손되어 식별이 불가능했네. 중요한 것은 석가장 멸문 당시 혈교에서 무리를 이끌고 나온 주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이네. 그자는 바로 혈수천자(血手天子)일세.”
“혈수천자?”
석후가 급히 되묻자 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의 교주인 혈마(血魔)의 셋째 제자이지. 그리고 그자의 본명이 바로 장건일세.”
석후는 혈교라는 집단도 처음 들었지만, 교주의 제자가 직접 수하를 이끌고 석가장을 쳐들어오기에 적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석후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자 우재가 남은 이야기를 뱉기 시작하였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네. 혈교에 소속되어 있던 혈수천자는 스승으로부터 벗어나 한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암월련이네.”
암월련이 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단체라는 것은 소림승들도 모르고 있는지 크게 놀라는 얼굴이었다.
“이것이 자네가 궁금해하던 혈수천자 장건의 신분일세. 그리고 둘 사이에 얽혀 있는 과거가 우리 중원무림에는 희소식이 될 것일세.”
우재의 말에 석후가 두 눈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희소식이 되는 거요?”
“자네가 간직한 과거가 암월련이 소림을 향해 만들어 둔 함정을 무너뜨릴 열쇠가 되기 때문이지. 개방은 전력을 다해서 자네가 간직한 과거와 행적을 소문낼 것일세. 물론 자네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소림 무공을 흉내 내어 암월련과 정파무림 사이에 분쟁을 조장한 인물이 되는 것이고. 어떤가? 현재 정파무림이 맞이한 어두운 상황을 한 번에 걷어 줄 완벽한 계획이 아닌가?”
석후는 우재의 이야기에 소름이 끼쳤다.
자신과 혈수천자 장건 사이에 얽혀 있는 과거를 바탕으로 교묘하게 거짓을 끼워 넣어 정말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또한 실제 있던 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림을 암월련의 용의 선상에서 지울 수 있게 만드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암월련의 소실대탐(小失大貪)이라는 계획은 석후에게 입은 작은 손해(小失)를 소림에게 뒤집어씌워 정사대전의 명분(大貪)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소실대탐(小失大貪)은 매우 치밀한 계획이었지만, 석후의 과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든 우재의 이야기가 그들의 계획을 소실소탐(小失小貪)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우재의 이야기대로라면 암월련은 정사대전의 명분은 잃고,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힌 석후라는 범인만을 찾게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뛰어난 인물은 너무도 많고, 나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구나.’
석후는 자신이 알아차릴 틈도 없이 우재의 간계에 빠진 것에 대해 심히 자책하였다.
“개방에서 무공으로는 타백(打伯) 추일을, 두뇌로는 청효(靑梟) 우재를 제일로 친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삼장로의 수장인 해표는 소림을 암월련의 용의선상에서 지우는 동시에 정사간의 백년지약(百年之約)을 깨뜨려 명성을 실추하게 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우재의 뛰어난 두뇌에 찬사를 보냈다.
뒤이어 해표는 석후를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시주와 혈수천자와의 안타까운 과거가 소림과 중원무림에 홍복(洪福)이 되었으니, 이것 또한 운명이라 생각해 주길 바라는 바요. 중원무림을 위해 순순히 생명을 내준다면, 내세에는 극락왕생하도록 소림의 모든 제자가 빌어 주겠소.”
부드러운 음성이지만, 밖으로 뱉어지는 내용은 무척이나 간악한 것이었다.
“정(正)과 사(邪)를 왜 구분 지어 나누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정파무림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소림에서조차 이토록 간악한 짓에 힘을 보태는데 말이오.”
자신들의 치부를 찌르는 석후의 말에 소림의 모든 제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순순히 목숨을 내놓을 생각이 없으니 당신들은 준비하시오.”
이것이 석가장 최후의 생존자인 석후의 무위가 처음으로 전 무림에 알려지게 된 도화원 혈투(血鬪)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