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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단순히 허초의 속도가 빨라진 것에 불과하지만, 그로 인해 석후가 맞이하게 된 결과는 결코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석후 자신이 회피할 방위를 결정하고 미리 움직이며 반격을 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허초가 더욱 빨라진 이후로 반격은커녕 복면인들의 검초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며 간신히 회피하는 모습이 전부였다.

석후를 암벽 끝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성공한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었다.

모두가 검신에 경력을 실어 석후의 가슴팍 높이를 향해 겨누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고수 세 명에게 둘러싸여 한구석에 내몰렸음에도 석후는 차디찬 암벽에 등을 기댄 채 그들이 겨눈 검신을 차분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석후의 두 눈에서 어떠한 진의도 파악하지 못해서인지, 복면인들은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였다.

짧은 대치 속에서 석후의 두 눈이 잠시간 깜빡였고, 가운데 복면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검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중단에 위치해 두던 검을 뒤집어 상단으로 올린 복면인은 기력을 더욱 불어 넣어 석후의 인후혈을 찔러 왔다.

경력이 가득 실린 검이 우웅― 하는 벌 떼 소리를 내며 공간을 갈라 오고 있음에도 석후는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자연스레 내려 둔 왼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검날에 베일 것 같은 왼손이 검을 비껴 복면인의 손목에 도달하였을 때, 석후는 손을 펼쳐 내 잡더니, 자신의 몸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어어?”

놀란 복면인이 경호성을 지르자, 그의 양쪽에 서 있던 두 복면인이 다급히 석후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뒤늦게 움직인 그들이 도달하기도 전에 끌어당겨진 복면인의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 버렸다.

석후가 왼손으로 복면인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오른손에 진기를 불어넣어 복부에 일권을 내지른 것이다.

그 후에도 석후의 오른손은 멈추지 않고 오른쪽에 서 있던 복면인에게 향했다.

동료의 몸에 가려져 석후가 내지른 오른손의 움직임을 놓친 그는 접근해 오는 일권을 보고는 대경실색하였다.

“이게 무슨…….”

석후의 오른손은 그가 말을 끝마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돌진하던 몸으로 급히 철판교를 펼쳐 피하려는 복면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왼쪽 복부를 파고들어 갈비뼈를 부수어 버렸다.

“커흑…….”

그는 부러진 갈비뼈가 폐부를 깊이 찔렀는지, 핏물을 한가득 내뿜으며 쓰러졌다. 석후의 뒤로 접근하던 남은 한 명의 복면인이 급히 몸을 멈추어 세웠다.

그는 석후를 몰아세워 자신들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였는데, 부지불식간에 동료 두 명이 목숨을 잃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버리자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급히 세운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커진 두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리는 그의 모습은 시장 바닥에서 흔히 보이는 광대의 모습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네… 네 이놈! 네놈이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알고 있느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네놈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뿐이다.”

말을 마친 석후가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가락들을 어루만지며 다가오자, 복면인에게는 그의 모습이 흉신악살처럼 보였다.

복면인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어 선 석후는 무표정하게 오른손을 뻗었다.

주먹을 쥔 채 중단세에서 지른 오른손은 복면인의 왼쪽 목덜미에서 검지와 중지가 갈고리 모양으로 펴졌다.

복면인은 자신의 왼쪽 목덜미로 무언가 희끗한 것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공력을 제대로 실지도 못한 채 검을 쳐들어 막무가내로 휘둘렀다.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검에는 많은 경력이 실려 있지는 않지만, 석후의 일수가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정확히 휘둘렀기에 갈고리 모양으로 펴진 두 손가락이 잘려 나갈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석후는 나머지 세 손가락도 완전히 펴내었다.

그러고는 곧장 손바닥으로 땅과 수평으로 뉘어져 날아오는 검날을 아래에서 위로 쳐 내어 부수어 버린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복면인의 검신은 두 동강이 나 부수어진 것이 아닌,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아니, 이게 무슨…….”

복면인은 검신이 사라진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석후는 복면인의 목덜미를 향해 이전보다 더 빨라진 속도로 재차 출수를 하였다.

석후의 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중단세로 자리를 찾아 돌아오자, 복면인의 목덜미에서는 엄청난 양의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털썩.

넋이 나간 채로 동맥이 잘려져 나간 복면인은 몸에 힘을 잃고 허물어지듯 땅에 쓰러졌다.

석후는 복면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산속 생활에서는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기도를 느꼈다.

조장 격이라 할 수 있는 ‘관’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기운을 풍겨 냈기에 그들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들인지 확신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협공을 피하며 석후가 느낀 점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석후는 그들의 공세를 피하고 형식적인 반격만을 가하며 지켜보았다.

그들이 펼치는 검진이 석후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실력을 갖춘 무리에게 협공을 당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로 석후에게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검진에 대응하며 몇 수를 섞자마자, 변화가 너무도 예상하기 쉬운 체계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허초만을 펼쳐 내던 두 복면인이 실초도 섞어 변화를 주었지만, 결국 그들의 검진에는 체계가 있었다.

검진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기운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에 실초를 펼친 뒤에는 반드시 허초가 나가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둘 중 한 명에게서만 실초가 출수되었기에 석후는 그들의 공격을 충분히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던 것이다.

석후는 일전에 산속에서 늑대 네 마리에게 둘러싸일 때가 오히려 더 상대하기 벅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 무리는 움직임을 약속해 두지 않았다.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변화하는 상황과 생존해 있는 동료의 인원에 맞추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그것은 석후의 예측을 불허하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복면인들이 검진 속에서 일으킨 변화는 사전에 합을 맞춰 온 약속이며, 계속 되는 변화 속에서도 일정한 체계가 있었다.

그런 움직임은 언제나 간파당하기 마련이었다.

석후는 그들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그 결과 인원이 줄어 변화하는 상황에 복면인들은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모두 동굴에서 나오거라!”

반 각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무자비한 살육을 마친 석후는 시선을 동굴로 옮긴 뒤 크게 외쳤다.

동굴의 입구는 어린아이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작고, 아이들은 밖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동굴의 독연이 몸을 상하게 할 터이니 서둘러 나오거라!”

석후의 외침이 한 번 더 이루어지고 나서야 아이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모두 동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표정을 찡그렸다.

동굴 속 어둠에 익숙해진 아이들의 눈이 내리쬐는 햇빛에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잠깐이나마 어두운 곳에 있던 아이들은 내려쬐는 햇빛에 두 눈을 가려 버렸다.

다른 몇몇은 시신과 혈흔이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다 동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구토를 하고, 또 남은 아이들은 무서운 광경에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주변은 혈흔으로 가득 메워져 혈지(血地)라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발을 적셔 오는 혈액과 시신의 너머에 피 칠갑을 하고 홀로 서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분명 저 사내가 시체가 되어 나뒹구는 납치범들을 죽이고 자신들을 구했으리라.

하지만 아이들에게 사내는 구원자처럼 전혀 느껴지지 않고, 무서운 악귀를 보는 듯한 공포심을 주었다.

무리 속 서너 명의 아이들이 손을 잡고 널브러진 시체를 밟으며 뛰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모든 아이들은 석후가 서 있는 곳을 피해 여러 방향으로 미친 듯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달아나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고마움이나 기쁨이 아닌, 두려움만이 가득하였다.

“…….”

석후는 자신이 가족들을 구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복수를 하기로 결정하고 모질게 스스로를 단련한 것은 어쩌면 마음속 가득한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석후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영이와 묵이를 구하고자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불어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고 싶은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굴에서 빠져나온 아이들의 표정은 도움을 받은 자들이 보이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의 눈에 석후는 살인귀였고, 자신들을 납치한 인물들보다 두렵고 강한 존재였다.

자신의 부모를 때려죽인 자들을 벌하여 준 것에 감사한 마음보다 석후를 바라보았을 때 느껴지는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석후를 바라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심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석후는 무엇인지 모를 괴로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악인들의 목숨을 빼앗고 아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죽여야만 하던 많은 악인들의 목숨이 비춰진 것이었다.

석후 자신 또한 피해자였다.

자신 역시 악인들에 의해 조실부모하였다.

자신과 같은 입장에 놓인 아이들이 구원을 얻은 뒤, 두려운 눈으로 석후를 보며 달아났다.

그것이 석후의 감정을 흔들리게 만든 원인이었다.

‘결국 악인이라는 범주 안에 나도 들어설 수밖에 없는 것이로구나.’

석후의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혈흔들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그의 심정을 더욱 어지럽혔다.

그때, 나지막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 형……?”

깊은 상념으로부터 일순간 벗어난 석후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영이였다.

영이와 묵이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피 칠갑을 한 석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사했구나. 영아, 묵아…….”

두 형제를 향해 미소 지으며 석후가 말을 마치자, 영이와 묵이는 앞다투어 그에게 달려왔다.

그러고는 이내 석후의 품에 뛰어들어 안겼다.

‘이것이면 되었다. 이 정도면 되었어.’

계속해서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석후는 세차게 흔들리던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