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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초봄이지만 산속 깊은 곳은 아직도 눈이 얼어 있고, 차가운 바람은 살갗이 아리도록 불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웅을 찾기 위한 석후의 추적은 한 시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흔적을 따라 숲에 들어서자, 아직 채 녹지 않은 눈 위로 남아 있는 흑웅의 발자국이 석후에게 따라오라는 듯 안내하고 있었다.

거대한 면적의 숲을 빠져나와서도 오랜 시간 흑웅을 추적하던 석후는 일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동굴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석후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 동굴 안에서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크워워!

영역을 침범한 짐승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흑웅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포효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지는군.’

포효를 마친 흑웅은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사족(四足)으로 걷던 흑웅이 동굴을 벗어나며 이족(二足)으로 일어섰는데, 그 몸집은 무려 팔 척에 달할 정도였다.

자신을 마주하고도 움츠러들지 않는 석후를 향해 흑웅은 거센 포효를 재차 내뱉었다.

쿠아앙!

석후는 일 장 앞에서 들려오는 흑웅의 울부짖는 소리에 고막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긴장하기는커녕, 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가족을 살해한 흉수를 생각하며 십 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거듭해 온 석후였다.

흑웅 사냥은 석후 스스로가 복수를 위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나의 기량에 진전이 어느 정도 있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흑웅을 앞에 두고도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석후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

석후가 경공을 펼쳐 흑웅에게 접근한 것이다.

흑웅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는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복부를 가격당하고 뒤로 날아갔다.

일격을 성공한 석후지만, 기뻐할 수는 없었다. 타격이 잘 먹히지 않았음을 느낀 것이다.

석후가 가벼이 내지른 일권에 삼 장을 날아간 흑웅은 석후의 예상대로 바닥에 고꾸라지자마자 날쌔게 신형을 일으켰다.

그런 후, 자세를 낮춰 포효를 내지르며 석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석후는 잔뜩 분노한 흑웅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흑웅이 일 장 내로 접근하자, 다시 석후의 신형이 사라졌다.

표홀한 신법으로 쏘아지듯 치솟은 석후는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일수를 뻗었다.

석후의 신형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던 흑웅은 머리 위에서 살기를 느꼈는지, 본능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바람에 흑웅의 왼쪽 목덜미를 노리며 하강하던 석후는 얕은 상처만을 남긴 채 땅을 향해 무방비로 착지하려 했다.

바로 그때, 흑웅의 큰 발바닥이 석후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고개를 돌리느라 떨어지는 석후의 신형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였을 터인데, 본능에 의지하여 반격을 해 온 것이다.

여유를 잃지 않던 석후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지더니, 왼팔에 급히 공력을 끌어올려 다가오는 흑웅의 발바닥을 간신히 막아 내었다.

흑웅의 완력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반발력에 의해 석후는 뒤로 오 장이나 날아가 버렸다.

그 와중에 신형을 바로잡은 석후는 왼팔에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방금 전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내가 너무 방심했나? 공력을 일으키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뼈가 가루가 되었겠군.’

왼팔을 휙휙 움직여 본 석후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흑웅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석후는 더욱 빨라진 속도로 흑웅에게 접근했다.

석후의 움직임은 단순했다. 단지 흑웅의 품에 안기려는 듯 매우 쾌속한 속도로 뛰어드는 것이 전부였는데, 흑웅은 도저히 석후의 위치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흑웅이 알아채기도 전에 오른쪽 목덜미를 잡아 뜯은 석후는 사뿐히 땅에 착지했다.

흑웅은 처음의 위압적인 모습과 달리 힘없이 선 채 목덜미에서 시뻘건 피를 분수처럼 쏟아 냈다.

흑웅의 신형이 움츠러들더니, 이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고꾸라졌다.

쿠웅―

흑웅이 바닥에 고꾸라지며 큰 소리가 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후도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흑웅은 영물 중에서도 상위의 영물에 해당했다.

석후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흑웅이 방심하고 있을 때 공격해서 내장에 타격을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영물의 뼈는 일반 짐승과는 궤를 달리할 만큼 단단했고, 공력을 실은 타격에도 내장에는 충격을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석후는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하는 흑웅을 경시하였고, 그로 인해 오만에 빠져 큰 부상을 입을 뻔도 했다.

그러나 석후는 냉정을 잃지 않은 채 공력을 끌어 올려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후 뼈와 근육으로 보호할 수 없는 목덜미의 혈맥을 끊어 내 흑웅을 쓰러뜨린 것이다.

자신의 기량을 시험해 보고자 한 석후에게 결과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본래 석후는 영물 중 왕이라는 백호와 맞서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영물의 존재를 찾기 위해 산속을 몇 년 동안 헤매어도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이 회음현에 들어와 사냥꾼과 지낸 지 십 년이 넘어섰을 무렵에서야 천운으로 흑웅의 흔적을 목격할 수 있던 것이다.

석후는 홀로 흑웅을 잡아낸 오늘에야 비로소 복수를 위한 여정의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왼팔에는 전투 중에 알아차리지 못한 피육의 상처가 남아 있고, 긴장이 풀리자 저릿한 통증이 이전보다 심하게 느껴졌다.

“으음…….”

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태를 확인한 석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흑웅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목덜미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면서도 끈질기게 숨을 유지하던 흑웅의 시체는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석후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 흑웅의 배를 가르자, 얼굴을 향해 뜨거운 핏물이 튀어 올랐다.

쑤악―

얼굴을 가득 뒤덮는 피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석후는 천천히 흑웅의 내장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곧 엄청난 크기의 간(肝)을 발견한 석후는 단도를 잠시 내려 두고 간을 집어 들었다.

간에서 전해져 오는 뜨거운 열기가 오른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힐 것만 같았다.

가만히 온기를 느끼던 석후는 이내 흑웅의 생간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순간, 입 안 가득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초봄의 추위와 출혈로 인한 떨림인지, 혈투 뒤의 풀어진 긴장감으로 인한 떨림인지, 알 수 없이 지속되던 몸의 떨림은 뜨거운 생간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뒤에야 점차 멎어 들었다.

생간을 몇 입 더 먹은 석후가 흑웅의 모든 내장을 다 끄집어내자, 몸속 깊이 자리한 내단이 드러났다.

옷에 문질러 피를 닦아낸 석후는 내단을 가죽 주머니에 넣은 뒤, 단단히 챙겼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작은 단도로 능숙하게 흑웅의 가죽을 벗겨낸 석후는 걸음을 서둘렀다.

‘고기까지 챙겨 가기엔 손이 부족하다. 우선은 내단과 가죽을 가져다 두고, 고기는 나중에 다시 챙기러 와야겠다.’

하산할 채비를 마친 석후는 왼팔에서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통증과 거대한 가죽 무게 때문에 육체적으로 무척이나 고되었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석후는 사냥꾼의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흑웅과의 일전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부상을 입은 것은 나의 안일함 때문이다.’

흑웅을 홀로 잡아낸 것에 만족하는 석후지만,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더욱 실수를 줄여 나가야만 했다.

아직도 실전에 있어서 미흡한 부분이 많고, 때문에 흑웅과의 일전에서 부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처음 왼쪽 목덜미를 공격하였을 때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실패한 즉시 다른 급소를 노리거나, 거리를 더 벌려 착지해야만 했어.’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반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석후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돌려 세웠다.

사냥꾼이었다.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석후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속이 더부룩하여 가벼운 사냥감이라도 잡아 볼까 하고 집을 나섰네.”

말을 마친 사냥꾼은 석후가 둘러메고 있는 흑웅의 거대한 가죽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이어 입을 열었다.

“아니, 이게 다 무엇인가. 설마… 자네, 혼자 흑웅을 사냥한 게야?”

석후는 말없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자고 이런 미련한 짓을 했어. 혼자서 흑웅같이 위험한 영물을 사냥할 생각을 하다니… 자네, 미쳤나?”

함께 기뻐해 줄 거란 예상과 달리 불같이 화를 내는 사냥꾼의 모습에 석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냥에 실패하여 목숨이 위험해졌으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인가!”

그건 마치 자식을 훈계하는 아비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사냥꾼의 호통에도 빙그레 웃으며 담담한 어투로 석후가 답하였다.

석후의 반응에 사냥꾼은 어이없어 했지만, 팔의 상처를 보고는 놀라 물었다.

“그 팔은 어찌 된 겐가?”

“피육의 상처에 불과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자신의 계속되는 성화에도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석후를 보며 사냥꾼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화가 누그러 들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절대로 혼자서 맹수를 사냥하지 말게! 나는 이런 맹수 중의 맹수를 혼자 사냥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어!”

“네. 명심하도록 할게요.”

“그건 그렇고, 흑웅을 어쩌다가 사냥하게 된 건가?”

“오늘따라 평소 가 보지 않은 사냥터로 가고 싶더군요. 숲으로 통하는 험로에서 우연히 흔적을 발견하여 쫓게 되었어요.”

“그랬으면, 나에게 와서 귀띔이라도 하지 그랬나.”

“말씀드렸으면 분명 흑웅 사냥을 반대하시지 않았을까요?”

석후의 말에 사냥꾼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내 생각에도 그리하였을 것 같네. 그런데 팔은 정말 괜찮은 거지?”

“네.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석후가 왼팔을 휙휙 돌리며 이야기하였다.

“알겠으니 그만하게. 일전에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묵씨세가의 일대 제자 다섯이 흑웅과 마주쳐 큰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네. 무공을 익힌 무인들도 상대하기 버거운 흑웅을 홀로 쓰러뜨리다니, 내 자네가 그토록 뛰어난 무예를 익히고 있었는지 지금껏 몰랐구먼.”

“과찬이세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걸요.”

‘검으로 천하를 오시한다는 묵씨세가의 일대 제자들이 흑웅을 상대로 부상을 입었다니… 무림의 고수들과 겨루어도 내가 쉽게 패배하지는 않겠구나. 드디어 내게 복수를 위한 시간이 찾아 온 것이다!’

사냥꾼과의 대화로 석후는 자신의 기량에 대한 대략적인 짐작을 할 수 있었고, 양 주먹을 꽉 쥐며 복수를 위한 각오를 재차 다졌다.



두 사람은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이면 여느 때처럼 아궁이에 불을 떼고 있어야 할 사냥꾼의 아내가 보이지 않고, 귀청을 두드리는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그 모습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석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