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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습득의 공식 8화

2. 개가 아니라 (7)


아직도 집 안에 설원이를 위한 흔적이 널려 있었다. 며칠 전에 산 고기도 남았고, 연어 캔도, 설원이가 제법 잘 갖고 놀던 공도 있었다. 다 있는데 설원이만 없다. 이제 우리는 가족이야. 툭 뱉은 무책임한 약속이 민망했다. 이렇게 될 거면 그냥 처음부터 데려오지 말걸. 설원이는 제 손에 아직도 쓰린 흉터만을 남긴 채 죽었을….

“윤아. 내가 설원이야.”

죽었을….

“…네?”

“내가 설원이라고.”

다시 말해 줘? 남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빛나게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눈이 노란색이었다.

남자의 환한 미소가 지나치게 찬란해서, 윤은 제가 눈물을 그친 줄도 몰랐다. 윤이 어물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설원이는 개인데요….

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볼에 남은 눈물을 닦아 냈다. 남자는 여전히 해사하게 웃었다.

“나라니까. 왜 안 믿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 믿… 아뇨. 아뇨, 믿어요.”

볼멘소리를 하려던 윤은 문득 제 처지가 떠올라 황급히 말을 바꿨다. 일단 저 남자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게 옳다. 당장은 살고 봐야 저 남자가 설원이를 어쨌는지 사실을 알아내지 않겠는가. 윤은 스스로 세뇌를 걸듯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믿어요, 저. 진짜 믿어요. 그러면서도 차마 저 자신을 속이는 마음이 편치 않아 고개는 점점 수그러들었다.

반면 설원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고윤. 거짓말 못하는구나. 마음으로는 전혀 믿지 않으면서 입에서는 믿는다고 하니, 시선이 잩게 떨리고 미간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얼굴에 거짓말이 다 드러나는데 저만 모르고 필사적으로 믿는다, 믿는다 말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갈수록 목소리는 작아졌다.

설원의 눈이 원만하게 휘었다. 윤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 그만두고 싶었다. 하등 상관없는 개 흉내도, 억누르는 본능도, 매 한계치를 경신하는 인내심도 모두. 제가 답지 않을 만큼 저 조그만 인간에게 얼마나 관대하게 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게 아주 괘씸하고…. 왜 이렇게까지. 저 인간이 뭐라고. 그러나 잠깐이었다. 윤이 저를 가족이라 칭하며 우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참아 온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믿을 거야?”

“뭘 한다고 해도… 믿어요. 진심으로.”

거짓말. 남자의 웃음에 윤은 입을 닫았다. 제 불신을 이미 들킨 모양이었다. 남자의 심사를 뒤틀리게 해서는 안 되지만 이미 불신을 들켰으니 진작 뒤틀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윤이 그의 눈치를 살폈으나 남자는 도리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윤아. 내가 지금 개로 변하면 믿어 줄 거야?”

“안 변하셔도 믿어요….”

제 말도 믿어 주세요….

윤의 코끝이 찡하게 시큰했다. 살기 위해 뭔들 못하겠냐마는 아무래도 제정신 아닌 사람의 손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워 보였다. 꽉 쥔 두 손이 차가웠다. 두렵고 무서운 감정이 전신을 억누르는 바람에 윤은 눈을 꾹 감았다. 훨씬 민감해진 오감이 남자의 궤적을 더듬었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듯했다. 둔탁한 무언가가 윤의 무릎을 몇 번 두들겼다. 윤이 천천히 실눈을 뜨면 앞에는 노란 눈의 늑대가 있었다.

“설원아.”

윤이 간신히 소리를 쥐어짜 뱉었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짙은 잿빛 사이로 희끗희끗한 늑대 특유의 모색과 탁한 노란 눈, 한결같이 비치는 단단한 힘이며 곧추선 귀의 모양까지 어떻게 봐도 설원이었다. 윤이 설원의 앞에 쪼그려 앉아 목을 끌어안았다. 제 목에 닿는 설원의 털이 따갑도록 간지러웠으나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설원의 털에 맺혔다. 제 몸에 스며드는 온기가 더없이 따스했다.

“어디 있었어…. 죽은 줄 알았잖아.”

물기 가득한 음성이 뭉개졌다. 이 위험한 순간에 익숙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되었으며 설원이 죽지 않다는 것이 다행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저는 어떻게 될지언정 설원이에겐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윤이 훌쩍이며 설원의 털에 얼굴을 비볐다. 축축하게 젖은 털이 뺨에 달라붙었다.

그때 뭔가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 목덜미에 닿던 모질이 매끈하고 부드러운,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뺨에 달라붙은 털은 죄 사라지고 더 탄탄한…. 윤이 미간을 좁히자 설원이 저를 밀어 냈다. 윤이 의아해하며 설원을 쳐다봤다.

“왜 이렇게 울어.”

좀 전까지 제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노란 눈을 살랑이며 접었다. 윤의 손은 남자의 맨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남자가 어깨에 올려진 손을 잡아 내렸다. 맥박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듯, 거세지는 박동이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제 손을 잡은 온기가 낯설었다. 윤의 호흡이 변칙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믿을 수 있어?”

윤은 그동안 제가 쌓아 놓은 보편적인 상식의, 고등 교육의 무색함을 절감했다. 누군가 제 목구멍에 꿀이라도 발라 놓았는지, 소리가 나올 듯 쳐 올라와도 편도를 지나지 못하고 막혔다. 이게… 사람이…. 윤은 이번엔 정말 기절할 줄 알았으나 건장한 신체는 이 억센 충격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해도 지금 이 상황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윤이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바라봤다. 의자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으며 그 밑에 셔츠와 바지만 떨어져 있었다. 가만 살피니 저 옷은 모두 제 것이었다. 따지자면 승주에게 줄 선물로 샀다가 건네지 못해 그냥 내가 입겠다며 옷장에 걸어 놓고 제 몸에는 너무 커 입지 못한 옷들이었다.

윤은 이제야 제 말을 믿는 모양이었다. 설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인간에게 들키면 안 돼. 알고 있지만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왜 다른 늑대들이 셀레나의 금칙을 어기는지 이제야 그 어리석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믿어요, 진심으로’? 진심이 너무 얄팍하네, 너.”

역시 제 불신을 눈치채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윤이 눈을 내리깔다가, 설원의 나신에 놀라 시선을 돌렸다. 탄탄한 근육의 잔상이 시야를 따라다녔다. 윤이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목소리는 어째 갈수록 기어 들어갔다.

“죄송해요. 근데, 옷 좀 입어 주시면 안 될까요.”

옷을 갖춰 입은 설원과 윤이 다시 식탁에서 조우했다. 윤은 남자를 힐끔거리다 눈길이 부딪힌 이후론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직도 믿지는 못하겠으나 제 앞에서 늑대가 사람으로 변했으니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며 설원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다는 결론까지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면 남자의 어둑한 잿빛 머리며 탁한 노란색의 눈도 설원이와 똑같았다. 이제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도 자꾸 그에게 시선이 가는 몇 가지 이유를 따지자면 오로지 과학으로 유지된다 믿었던 세상에서 종편 방송에나 특집으로 나올 법한 미스터리 현상을 제 눈으로 보고 만 것과, 도의 없이 잘난 설원 때문이었다. 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늑대일 때도 잘생겼더니…. 보드라운 털 대신 자리한 미끈한 낯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윤아.”

맞닿는 노란 눈은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네가 내 비밀을 아니까 나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공평하지 않아?”

“…네.”

“이를테면 널 살려 둘지, 죽일지.”

그러니까 그냥 지금처럼 적당히 개인 셈 치고 지내.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죽일지.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아침 인사처럼 제 생사를 언급하는 설원 때문에 윤이 잠자코 머리를 주억였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는 윤에 비해 설원의 심기는 갈수록 내리막길을 속행하고 있었다. 원체 말수가 적은 윤이었지만 오늘은 줄곧 맹수 앞의 토끼만 같았다.

설원의 기분이 윤의 행동에 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시로 모양을 바꿔 대면 그는 제 기분의 통제권을 상실한 것만 같아 불편했다. 그가 셀레나에게 배웠던 것들을 떠올렸다. 알파는 감정을 최소한으로만 드러내야만 하며 이성적 사고와 판단을 흐려선 안 된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더 복잡해진 제 생각이 다 저 인간 때문이라면 살려 둬선 안 된다. 적어도 셀레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그럼… 잘 때도 전처럼 같이 자요?”

“싫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설원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윤은 식탁 위에 올려 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마치 윤의 목과 닮아서 설원은 그의 목선을 훑었다. 자고 일어나 구겨진 셔츠 깃이 삐뚤었다. 설원이 턱을 괴었다.

“잘 땐 늑대 모습으로 있어 주시면 안 되나 해서요.”

“왜?”

“그냥… 그게 좋아서….”

불편하시면 제가 적응해 볼게요.

설원의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지며 웃음소리가 샜다. 윤은 마냥 눈만 굴렸다. 고작 그게 좋아서라니. 한참을 머뭇대기에 제 존재 자체가 불안하고 불만스러워서, 아직도 질려 있는 낯에 잔뜩 드러난 공포 때문에 그러는가 했더니 잘 때는 늑대로 있어 달라는 안찬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의심보단 웃음이 먼저 나왔다. 저 작은 머리통엔 무슨 생각이 그리 가득한지 알고 싶었다. 그러면 더 재밌을 텐데. 역시 아직은 죽일 수 없었다. 어차피 윤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 정확한 켯속을 알기 위해선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더 지켜보고, 수상하면. 그때 가서도 늦지 않았다.

다만 설원은 윤이 말을 꺼낸 순간부터 마음에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과 불길한 낌새를 감지했다. 뭔가 이상한데, 대체 그게 뭔지 찾아내려 윤과의 대화를 되짚었다. 별안간 아찔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너 내가 늑대인 거 알고 있었어?”

“…그럼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윤이 멋쩍게 웃었다. 조각난 미소가 빛을 타고 들어와 가까스로 상이 맺혔다. 대체 언제부터? 설원은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