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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습득의 공식 9화

2. 개가 아니라 (8)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

“목욕할 때부터…. 중요한 거예요?”

설원은 본능적으로 목울대를 울리며 이를 악물었다. 윤이 알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 없었다. 그러나 배운 적은 없더라도 이럴 때 셀레나가 어떻게 말할지는 안다. ‘죽여.’ 설원은 지겨울 만큼 그리운 그 목소리를 간신히 떨쳤다.

고요한 집에 울려 퍼지는 긴장감에 윤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뭔가 말실수를 했나? 모른다고 해야 했나? 윤은 설원이 왜 저렇게 구는지, 왜 갑자기 저를 경계하는지 몰라 감기로 지끈이는 머리를 애써 굴렸다. 그렇게 찾아낸 몇 가지 이유를 그에게 대입하면 저는 여태 한때는 개로 오인했던, 실은 사람인 늑대에게 강아지용 사료를 먹이고 공을 주워 오라 굴렸으며 손을 내밀게 했단 말인가?

마른땀이 흘렀다. 명백한 인권 유린…. 윤이 입술을 짓물었다. 그러면 설원이 저리 화가 날 만했다. 설원은 공연히 손가락 끄트머리만 매만지는 윤에게 죽 그릇을 내밀었다.

“밥이나 먹어.”

“…감사합니다. 근데 그쪽은 안 드세요?”

“그쪽이 뭐야.”

설원이라며. 그렇게 불렀잖아.

맞긴 한데, 이제 그렇게 부르기가 영….

왜? 개가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말꼬리를 눅진하게 늘리던 윤이 날카로운 설원의 어투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매가 사나웠다. ‘늑대잖아요, 개 아니고’라는 말은 조용히 삼켰다.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마냥 모르는 척하는 게 오래 사는 방법일 터였다.

윤은 제 앞에 놓인 죽을 입에 욱여넣었다. 고소하고 간이 삼삼한 게, 입맛에 제법 잘 맞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이 있다가 방에 들어갈 셈이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너무 피곤했다. 아닌가, 뭔가 많이 했나. 죽은 분명 부드러운데, 자갈을 잔뜩 물고 있는 양 까슬한 입천장을 혀로 몇 차례 쓸었다.

필요 이상으로 죽을 꼭꼭 씹는 동안 설원이 찬장에서 감기약과 해열제를 꺼내 물컵과 함께 내밀었다. 윤이 토끼눈을 했다.

“이거,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뒤져 봤으니까.”

왜 남의 집을 함부로 뒤지는데요…. 윤은 대거리하는 대신 입매에 힘을 줬다. 너 진짜 표정 관리 못한다. 최 과장한테 혼난 적 없냐? 재영의 말이 떠오른 것은 설원이 제 생사를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한테만 안 한 거지, 원래는 잘해. …아마도. 다만 저는 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이 좀 뒤질 수도 있지.”

설원의 갑작스러운 말에 부드러운 죽이 돌연 흉기로 둔갑해 기도를 치고 내뺐다. 콜록콜록! 난데없이 들린 사레에 윤이 발작적으로 기침을 내뱉었다. 설원이 휴지 몇 장을 내밀면 간신히 입가를 가렸다.

설원이는 제 가족이라며 세상 무너진 듯 울던 조금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걸 보고 있었을 설원의 심정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귀 끝에 열이 몰려 번쩍이듯 화끈거렸다. …켈록. 잔기침도 멈추지 않았다. 설원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제 두개골 속을 꿰뚫어 읽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귀를 타고 올라온 미열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약을 먹기 전까진 제 옆을 비우지 않을 심산인 듯한 설원은 윤이 약을 먹고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윤은 설원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병가를 냈다. 그마저도 설원이 지켜보고 있어, 몇 번 말을 더듬는 바람에 ‘윤이 진짜 많이 아픈가 보네’ 같은 소리나 들어 겸연쩍게 웃었다. 하루 가까이 저를 괴롭히던 이 고통의 이름이 몸살감기가 맞긴 했던 모양인지 푹 자고 약 좀 먹었다고 열이며 통증이 꽤 가라앉았다. 내일은 출근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진짜 해야 하지만.



윤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몰랐다. 설원은 종일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저를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옆에 오지 않을 때는 얼마나 노려보고 있는지 시선이 닿는 살갗이 쓰리기까지 했다. ‘저 아파서 좀 자야 할 것 같아요’라는 핑계로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심장도 빨리 뛰고 허리는 뻐근하며 잠은 더 오지 않았다.

윤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6분…. 애매한 시간이었다. 윤은 오늘 내내 관찰하던 전등의 가장자리를 몇 번 더 훑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계속 보고만 있다간 눈을 감고도 따라 그리게 될 테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미루적대며 거실로 나갔다. 불이 꺼진 거실에는 설원이 잠자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저기, 이거 재밌어요?”

“뭐가?”

“네? 어? 어…?”

“왜.”

윤은 말을 잇지도 못하고 멍하니 입만 벌렸다. 분명 노랗던 설원의 눈이 검게 변해 있었다. 답답하게 빤히 저만 보는 윤 때문에 설원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자 그제야 사고 회로가 다시 작동했다. 윤이 혀 밑에 고인 침을 삼켰다.

“눈이 검은색이에요.”

“원래 이래. 늑대에서 인간으로 변하면 노란색이었다가, 시간 지나면 다시 검어져.”

“그럼 원래는 무슨 색인 거예요?”

“무슨 색이 더 좋은데?”

윤이 고개를 갸울였다. 무슨 색이 더 좋은지까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금에서라도 고민해 본다면 노란 눈은 제가 아는 설원의 눈 색과 같아서 좋고 검은 눈은 저와 비슷해서, 늑대가 아니라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라 좋았다.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태에 설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검은색?”

“검은색이 원래 색이야.”

“…아닌 것 같은데.”

“너 언제까지 날 저기, 그쪽으로 부를 거야.”

말 돌리나? 윤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소파 위에 쪼그려선 껴안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설원이라며.”

“그렇게 불러도 돼요?”

“부르려고 지은 거잖아.”

“그렇긴 한데… 입이 안 떨어져요.”

윤이 겨우 고개만 돌려 설원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의 검은 눈 속에 비친 텔레비전 화면이 네모낳다. 새파랗게 하얀, 높은 조도 탓에 맺힌 상이 유독 돋보였다.

“늑대 모습이면 부를 수 있어?”

“음, 그럴지도.”

“그럼 그렇게 해 줄 테니까 이제 자러 가.”

“저 안 졸려요.”

“자러 가.”

윤은 대답 대신 다시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 꼴을 택했다. 옆에서 뱉는 한숨은 애써 무시했다. 내쉬는 더운 숨이 얼굴을 덥혔다. 어둠은 이유 모르게 편안하고 포근해서, 어째 이러고 가만히 있으니 슬슬 잠이 오려 했다. 아까는 정말 안 졸렸는데, 아무래도 전자파 탓인 모양이다.

종아리에 복실복실한 털이 감겼다. 윤이 고개를 돌리면 며칠을 함께 지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노란 눈의 늑대가 있었다. 이 늑대가 방금까지 저와 얘기했던 남자라는, 믿기 어려운 진실이 떠올라 머뭇대며 입을 뗐다.

“설원아.”

대답 못하시죠…. 그래도 제 말 다 이해해요?

설원이 고개를 끄덕여서 윤이 베시시 웃었다. 어릴 때는 여느 아이들처럼 동식물과 대화하는 꿈을 소원하곤 했는데, 다 클 만큼 큰 지금이 되어서야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이게 다 설원의 덕분이기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설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설원이 코를 찡그리며 이를 드러내자 잽싸게 손을 뗐다.

“미안. 아니, 죄송해요.”

윤이 근근이 몸을 일으켰다. 저 자러 갈게요. 아, 같이 주무신댔나…. 설원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대체 집에서 혼잣말을 이리 많이 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을 더듬으며 발을 끌었다. 제가 누운 뒤 침대 위를 무겁게 누르는 설원의 몸체를 응시했다. 허리께에 묵직하게 와닿는 감각과 퍼지는 온기가 퍽 익숙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 늑대가 맞는데. 윤이 발을 까딱거렸다. 사람이면 어떻고 동물이면 어떤가. 제가 허락 없이 덥석 데려와 버렸으니 응당 책임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발적으로 떠난다고 말하기 전까진 아무래도 이렇게 쭉 같이 지내야 할 성싶었다. 윤은 이제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설원은 늑대이기도,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까딱이던 발이 이불 밖을 빠져나가, 다시 슬쩍 집어넣었다.

전등의 형태가 점점 희미해지고, 의식이 조금씩 멀어졌다. 윤은 저도 모르게 제 옆에 엎드린 설원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 미안. 잠시 후에는 그가 뭐라 웅얼거리며 다시 설원의 등허리를 만지작거렸다. 설원이 성대를 크게 긁었다. 미안, 진짜 미안…. 한참 지나 잠들고 나서, 그가 몸을 모로 돌려 누울 때는 설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제는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잠기 어린 음성에 ‘설원아’라는 말이 섞여 있었다.

이러려고 잘 때는 늑대로 있으라고 했나? 설원은 윤이 건들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잇새 소리를 냈으나, 나중에는 저도 포기하고 가만 누워 있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았다. 내일 윤이 일어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푹, 깊게 콧김을 내뱉었다.



3. 개와 늑대의 시간 (1)


윤은 치즈와 잼, 각종 야채와 구운 고기가 들은 샌드위치를 씹었다. 그 앞에 앉은 설원도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양상추 바스러지는 소리 외에는 크게 들리지 않는, 과묵한 식사 시간이었다. 그는 제가 언제 이런 재료들을 샀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가끔 집밥이 먹고 싶을 때 샀던 것 같긴 한데, 아직 남아 있었나?

뭐가 됐든 그는 별일이 없는 한,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왔다. 며칠 사이 퇴근 시간이 되면 늘 집으로 향하는 윤 때문에 재영은 설마 아직도 그 늑대를 데리고 있냐 물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애매하지만 정확한 대답에 재영은 사정을 알 수 없어 마냥 머리를 쥐어뜯었다.

설원은 윤이 오는 7시, 8시 사이에 맞춰 매번 저녁을 차렸다.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 누군가 해 주는 음식을 먹는 게 오랜만이라 낯설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다만 설원에게만 부엌을 맡기기엔 영 미안해서, 앞으로는 저도 저녁 밥상 차리기에 동참하겠다 마음먹었다. 윤은 그가 뭘 잘 먹는지 몰라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식자재를 더듬어 떠올렸다.

“이제 냉장고에 음식 거의 없죠?”

“응. 집에서 밥 안 먹어?”

“네. 저 혼자는 잘 안 차려 먹어서.”

“윤아.”

“네?”

설원이 그의 입술 옆을 툭툭 두드렸다. 윤이 제 입가를 닦아 올리면 포슬진 빵가루가 묻어 나왔다. 어색한 정적이 다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