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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습득의 공식 6화

2. 개가 아니라 (5)


그는 털이 곤두섰다. 그 말을 곱씹으며 매 다르게 의미를 해독하려 해도 같은 결론이었다. 우리 집 네가 지켜 주는 거다? 인간이 그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믿기 어려운 충격의 연속에 그는 낮게 위협만 했다. 본능적으로 앞발에 힘이 들어갔으나, 그는 본능을 내리눌렀다. 맹수의 위협에도 인간은 그의 목덜미를 놓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가족이야. 인간의 말이 심장 깊이 박혔다.

잘 들어. 인간 앞에서 절대 인간으로 변하면 안 돼.

셀레나의 말이 기억났다. 맞는 말이었다. 다 그 경고를 가벼이 여겨서 일어난 일이다. 인간을 믿어선 안 돼. 다만 그는 저 인간이 제게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경계를 늦춰선 안 됐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제비꽃 향이 퍼졌다. 내 몸에서도 제비꽃 향이 날까. 그는 제 털에 코를 댔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을 샅샅이 살폈다. 여기저기 뒤적이기에 짐승의 몸은 그다지 유용하지 못한 편이라 할 수 없이 인간의 몸으로 살펴야만 했다. 하지만 달리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인간의 서랍을 뒤지며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인간의 이름이 고윤이라는 것. 책상 서랍 깊은 곳에 다른 인간들과 찍은 사진이 많다는 것. 그 사진들 속에는 유독 한 인간이 빈번하게 찍혀 있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인간이 그를 데려온 까닭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졌다. 가족. 정말 자신과 그런 걸 만들고 싶은 걸까?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저 저를 안심시키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그는 고개를 꺾어 목을 풀었다. 연골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탄발음을 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허튼짓을 하면 죽여 버릴 것이다.

그날 저녁에는 인간이 다른 냄새의 인간을 끌고 왔다. 그에게 친구라고 소개했으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화약과 쇠 냄새는 나지 않더라도 언제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은 그를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윤, 저게 허스키라고? 늑대 아니야?”

역시 저 인간을 믿어선 안 됐다. 그가 이를 세게 갈며 새로운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당장에 저 인간을 죽여 버리고 여길 나갈 셈이었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 찰나의 아늑함이 몸에 스며들어 저도 모르게 잊고 있었다. 그가 커다란 입을 벌렸다. 숨통에 이빨을 박아 넣고 다시 접합할 수도 없게 찢어 놓을 요량이었다.

“설원아!”

착하지, 이리 와.

저를 부르는 듯한 음성에 그가 차분히 숨을 고르며 흥분이 잠식한 머리를 식혔다. 지금은 아니다. 무장하지 않은 인간 두 명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잠시만 지켜보기로 했다.

새로 왔던 인간은 겁을 한 수레로 집어먹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가 버렸다. 별거 아닌 모양이었으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 인간이 제 옆의 인간을 부르던 말을 떠올렸다. 고윤. 정말 이름이 고윤이었구나. 그가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갈증이 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몇 가지를 알아냈는데, 첫째로 고윤이 자신을 ‘설원’이라 부른다는 것. 그게 그가 지은 이름이라는 것. 두 번째는 윤이 자신을… 개라고 여긴다는 점.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윤이 도시에 사는 인간임을 감안할 때, 늑대를 실제로 봤을 확률은 극히 낮으니 저를 개라고 오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까 처음 본 인간이 ‘늑대’라고 한 것도, 개치고는 제법 큰 제 덩치에 놀라 그저 감탄사로 내뱉은 말일 수도 있다. 모든 상황의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는 윤을 힐끔, 훔쳐봤다. 어딘가 생각에 잠겨 있는 윤의 눈이 동그랗고 부드러웠다. 길게 빠진 눈꼬리도, 앞으로 깊이 팬 눈 앞머리도 자못 고왔다. 윤이 붙인 이름도 썩 마음에 들었다. 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 목적을 알기 전까진 곁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 한다. 수가 틀리면, 설원이 느지막이 입가를 핥아 올렸다. 죽이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원은 윤이 저를 개로 착인했다는 게 부정하려야 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달았다. 늑대를 손수 씻긴다는 발상이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선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원은 제가 가만히 있어야 할지, 당장 뛰쳐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윤이 뜨뜻한 물을 제 몸에 적셨다. 설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털어, 몸에 맺힌 물방울을 떨쳐 냈다. 설원이 떨쳐 낸 물방울은 그대로 윤에게 달라붙었다. 그의 속눈썹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눈썹에 설원의 눈길이 멈췄다. 그러나 이내 윤이 상의를 벗어 내면서 그 눈길은 길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본 하얀 배가 신경 쓰였다.

윤이 설원에게 흰 거품을 칠했다. 설원은 거품을 뒤집어쓴 윤의 손을 응시했다. 순간, 윤이 설원의 꼬리에 손을 댔다. 설원의 눈에 별이 일었다. 재빨리 몸을 돌려 이를 드러냈다. 윤이 무어라 떠들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설원의 잇새로 더 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윤이 다시 설원의 꼬리께로 손을 가져갔고, 설원은 저도 모르게 윤의 손을 쳐 냈다. 윤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끈적한 피 냄새가 사방을 채웠다. 설원은 그제야 제가 저 인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미안해. 많이 놀랐어?”

이제는 본성을 드러낼 차례라는 설원의 생각과 달리, 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살폈다. 어쩌면 이게 저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다. 설원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 희뿌연 거품 속에, 이 따뜻한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조심스럽던 윤의 손길이 더욱 신중해졌다. 윤이 웃었다. 동그란 눈이 눈썹달처럼 녹녹하게 휘었다. 흰자와 검은자의 모호해진 경계에, 설원이 그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곧 시선을 거뒀다. 설원의 머리는 아직도 산란했다.



윤이 잠들어, 내뱉는 숨소리의 간격이 일정해지자 설원이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윤의 왼손을 살폈다. 하얀 손이 길게 찢어져 그 위에 검붉게 진 피딱지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으며 대충 얹어진 연고는 얕게 발린 자리만 흡수되어 있었다. 설원이 자신의 발톱을 쳐다봤다. 인간은 너무 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이렇게 탈이 난다. 인간은 여러모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아둔한 인간. 그러게 왜 제게 손을 대. 설원이 거실로 나갔다. 집 안을 뒤질 때, 텔레비전 밑 왼쪽 두 번째 서랍에서 연고를 봤었다. 방 문턱을 넘는 발은 어느새 인간의 발이었다. 설원의 긴 손가락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서랍을 열었다.

설원이 윤의 옆에 앉아 그의 손에 연고를 펴 발랐다. 상처를 스칠 때마다 윤이 미간을 살짝씩 찌푸렸다. 꿈결에서도 설원이 갈라낸 살갗이 아플 터였다. 설원은 어둠이 내린 윤의 얼굴을 묵묵히 훑었다. 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나를 데려왔어? 나는 이제 그냥 죽고 싶었는데. 연고를 쥐고 있는 설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누군지, 나를 어떻게 할 건지. 묻고 싶으나 물을 수 없었다. 인간 앞에서 인간으로 변하면 안 돼. 들키면 안 돼. 설원이 윤의 눈가를 찌를 듯, 닿아 있는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 냈다. 몸을 움직이자 흐트러진 제 머리칼 사이로 제비꽃 향이 퍼졌다. 이 냄새였구나. 설원은 제 몸에서 나는 꽃 향을 들이켰다. 제게서 윤과 같은 향이 났다.

이 작은 인간이 저를 해칠까?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진 윤의 곁에 있어야겠다. 설원은 윤의 가느다란 목께에서 손을 펼쳐, 목을 쥐는 시늉을 했다. 길고 얇게 뻗은 목은 제가 힘을 다 쓰지 않아도 부러질 것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윤이 미심쩍은 자라면 단번에 죽여 버리면 된다.

설원은 가만히 앉아 윤의 얼굴 옆태를 눈으로 따라 그리다, 살갗에 연고가 스며들면 몇 번이고 다시 펴 발랐다. 고윤. 윤. 윤. 설원이 혀끝에 윤의 이름을 올렸다.



어느새 해가 떴다. 설원은 마지막으로 윤의 손에 연고를 바르고는 다시 늑대의 몸으로 돌아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 지금은 그저 지켜보려는 것이다. 설원이 눈을 감았다.



***



윤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대로 맥없이 다시 쓰러질까, 흰 이불이 구겨지도록 세게 쥐었다. 몸이 이러니 아무래도 회사에는 병가를 내야만 하겠다. 윤이 사이사이 조각난 기억을 쓸어 모았다. 어제 집에 들어와서… 내가 어떻게 침대까지 왔더라?

그가 풀 먹인 종이처럼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끌고 방 밖을 나왔다. 배 속이 천지 진동하여 토악질이 치밀어 오르려는 한편 간밤 열에 시달린 흔적이 갈증을 불러 왔다. 졸음에 완전히 다 떠지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냉장고로 발을 질질 끌던 윤은 미처 코너를 다 꺾기 전에 걸음을 멈췄다. 부엌에 서 있는 낯선 이가, 마치 제집인 양 자연스러운 모습에 여기가 정말 제집이 맞는지 되짚게 했다. 그의 좁고 얕은 인간관계 안에 저렇게 덩치가 크고, 짙은 잿빛 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남자는 없었다. 심지어 제집에 허락 없이 자연스레 드나들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윤의 발목을 질척하게 붙들고 있던 잠이 잽싸게 달아났다.

미처 상황 파악을 다 하기도 전에 집 안 상부를 타고 흐르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윤의 후각을 일깨우자마자 어제의 조각난 기억이 점차 기워졌다. 해의 이름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여전히 꾸고 있는 승주의 꿈과 매번 울면서 깨는 자신, 제 눈을 덮어 주던 커다란 손, 시야가 차단되기 전 봤던 노란 눈의 남자.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의 냉기가 척추를 타고 뒷골을 울렸다. 윤이 뒷걸음질 쳐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왔지? 문에 기대 숨을 토해 내다가 황급히 휴대폰을 찾았다. 신고, 일단 신고부터 해야 한다. 그러나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고, 제가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놨다는 사실이 아찔하게 번뜩였다. 코트는 어디 있지? 그의 눈이 빠르게 굴러다녔다. 그 전에, 설원이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