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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습득의 공식 5화

2. 개가 아니라 (4)


“저 진짜 괜찮아요.”

“괜찮은 게 아닌데…. 휴지 새것 줄게요. 그거 이리 줘요. 뭐야, 윤 씨 손이 왜 이래요?”

이 대리가 소스라치며 윤의 손을 살폈다. 무심하게 휴지를 건네려던 손을 냉큼 코트 소매 속으로 숨겼다. 안 그래도 머리가 뜨거운데, 열이 터질 듯이 몰려왔다. 눈알은 당장에 튀어나올 것처럼 팽창감이 들어 시야가 아득했고 멍한 귀 때문에 외부 소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제 상처에 깜짝 놀라 설명을 종용하는 이 대리의 얼굴만 겨우 보였다. 퉁퉁 부은 입술이 무거웠다.

“이거, 이게… 그게, 제가 요새 개를 키우는데, 그 친구가 아직 낯을 많이 가려서요.”

“긁힌 거예요? 너무 심한데. 왜 진작 병원 안 갔어요. 손도 이렇고, 감기도. 얼른 들어가 봐요. 이거 내가 사무실에 두고 퇴근할게요.”

“아니에요. 어차피 회사 근처에 병원 있잖아요. 대리님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 보세요.”

“그래도….”

“저 가는 방향이에요. 진짜예요.”

이 대리가 망설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아파 보이는 사람을 두고 먼저 퇴근하겠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은 제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는데, 이 대리가 보는 그의 모습은 대단히 심각했다. 얼굴이 빨간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 눈치를 살펴 가며 앙다물던 입술은 잔뜩 피가 몰려 퉁퉁 부어 있었고, 흰자에는 실핏줄이 잔뜩 도드라져 충혈되어 있었다.

이런 꼴로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기에 이 대리는 차마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윤을 먼저 보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순간 윤이 황급히 이 대리의 손에 있는 서류를 채 갔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말릴 틈도 없이 윤은 다가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윤 씨, 윤 씨! 이 대리가 택시 창문을 두드리며 윤을 불러도 그는 새빨간 얼굴로 ‘빨리 출발해 주세요’라고만 할 뿐이었다. 이 대리는 제게서 점점 멀어지는 택시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응시했다. 윤은 문서를 가방에 집어넣고 코트 자락을 여몄다.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살을 에었다.

윤이 회사로 들어와 이 대리의 책상 위에 문서를 내려놨다. 이제 진짜로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았다. 마른기침을 연거푸 토한 목구멍은 잔뜩 부어 침을 삼키기가 어려웠으며 목의 겉표면까지 열이 끓었다. 손에 힘이 빠져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잠자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윤은 그냥 빨리 약을 처방받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은 제 편이 아니었다. 윤이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모든 진료가 끝나고 문을 닫은 뒤였다. 아무래도 제가 아까 너무 많은 신에게 기도를 올린 탓에 다들 단단히 빈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너무할 수가 없었다. 윤이 다시 택시에 몸을 실었다. 이대로 집에 갈 요량이었다. 이제는 그저 눕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제가 집 앞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머리를 관통하는 작열감에 시야는 자꾸 뿌옇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서 윤은 연신 눈에 힘을 줬다. 멍한 귀에는 이명이 얕게 깔렸다. 한참이 지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설원이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설원아. 윤이 손을 내밀었다. 설원이 멈춰 섰다. 또 제가 앞발을 내밀라고 하는 줄 아는 듯싶어서 웃음이 났다. 아, 이제 진짜 한계였다. 이명은 기어이 고막을 집어삼켰고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볼에 닿는 현관의 냉기마저 안락하게 느껴졌다. 제 쪽으로 뛰어오는 설원의 발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꽂히고, 이제는 도저히 들어 올릴 기운이 없는 눈꺼풀을 닫았다.



2년 전부터 윤은 아플 때면 항상 꾸는 꿈이 있었다. 스물두 살, 동아리 회식 자리에서 진짜 취해 이제 더는 못 마시겠단 제 잔에 선배들 몰래 물을 채워 주던 사람. 그 사람과 손을 잡고, 처음 입을 맞출 때. 서로 머리를 맞대며 웃을 때. 그러고 나면 윤은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었고 그를 향해 차마 뻗지 못한 손은 제가 깍지를 껴 놓았다. 자신을 두고 돌아서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마지막 뒤태는 망막 위로 층층이 쌓인 눈물 때문에 내내 가마득하기만 했다.

“승주야….”

눈 끝에 고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윤이 잔뜩 젖은 눈꺼풀을 힘껏 들어 올렸으나 몸에는 힘이 남아나질 않아, 마냥 가파르게 떨렸다.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의 감촉이 느껴졌다. 저릿한 볼 옆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올리던 손이 뜨거운 눈을 덮었다. 눈앞이 다시 까맣게 물들었다.

“아직 열 있어. 더 자.”

윤이 눈을 깜빡였다. 듣기 좋은 중저음이 낯설었다. 커다란 손이 제 눈을 덮기 전 스쳐 본 것을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던 노란 눈을 되새기며 결국 눈을 감았다. 무언가 기억이 날듯, 나지 않았다.



***



그냥 죽고 싶었다. 추위는 견딜 수 있어도 이 고통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가 이를 갈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내가 뭘 두고 왔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여기서 쓰러지면 죽는다. 알면서도 그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산맥이 끊겨서 잠깐만 도시로 들어온다는 게 아마 한가운데로 들어와 버린 모양이다. 명백한 실수였다. 정신이 없어도 아주 없었다.

그가 잇새로 숨을 몰아냈다. 얼굴의 왼편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냉기가 시리다. 동쪽에서 달이 뜨는 것을 지켜보고, 달의 위상이 점점 둥글게 차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시일이 열흘은 적잖이 지났을 터였다. 열흘이라면 다들 괜찮을 것이다. 곧 그의 모든 기력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제가 맥없이 쓰러진 이 자리가 길섶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다면 모든 게 편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이 골목가가 인간들이 많이 기거하는 주택가임을 알고 있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이며, 사방팔방에서 코를 찌르는 인간들의 체취가 풍겨 왔으니 이 정도는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야 모르기 어려웠다. 쓰러지기 전 보았던 달의 고도로 미루어 짐작할 때 적당히 늦은 시각이라 당장은 저를 발견할 인간이 없다 쳐도 여기서 무사할 리는 없었다. 아마 제가 눈을 떴을 땐 지옥이 더 아늑한 곳, 그런 곳에 있을 터였다. 문득 셀레나가 떠올랐다.

명심해. 내가 없으면 네가 알파야. 반드시 기억해라.

그래서 이렇게 기억하라고 귀에 진물이 흐르도록 말했었던 건가요? 이제 만족하시나요? 달에게 선택…. 다 개소리다. 우리를 선택했으면 이렇게 죽게 하진 말았어야지. 그가 뒷발 끝을 얕게 떨었다. 일어나려는 의지는 있어도 일어날 수가 없으니, 그저 죽음만 앞두고 있었다. 쉼 없이 걸어온 그에게 피로가 해일로 변장한 채 덮쳐 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래, 차라리 죽게 해 줘.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의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간이다. 당장 일어나서 목을 물어뜯어야 하는데 도통 일어날 수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인기척의 주인이 제게 손을 댔다. 꺼져. 건들지 마, 손대지 마.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연한 제비꽃 향이 찬 바람을 타고 지표면을 스쳤다.

지금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던 뾰족한 이빨을 드러낼 수도, 날카로운 발톱으로 인간의 동맥을 그어 낼 수도 없었다. 온몸의 힘줄이 절단된 양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떠지지 않는 눈을 감은 채로 되뇄다. 제발. 제발 죽게 놔둬. 제발. 인기척이 점점 멀어졌다. 안심할 새도 없이 다시 수마의 늪에 이끌려 갔다. 이번에는 정말로 제가 죽을 차례였다.



그가 눈을 떴을 땐 포근한 감각이 제 몸을 덮고 있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당장 직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 사이에서 제비꽃 향이 퍼졌다. 아까 제 옆에서 얼쩡댄 인간이 풍기던 향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렇게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확실히 아까보다 몸이 좋아졌다. 그는 제 앞에 누워 있는 인간을 보며 발을 들어 올렸다. 인간의 동맥을 끊는 일은, 지루하리만치 쉬운 일이었다.

…아니, 아니다. 그의 머리통이 지끈거렸다. 어깨의 통증도 있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타지의 추위에 며칠을 비벼 댔으니 몸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그는 가만히 인간을 살폈다.

제가 어떻게 될 줄도 모르고 자는 꼴이라니, 아둔한 인간. 짐승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의 형태를 생생하게 짚어 낼 수 있었으나 침대 옆, 키가 큰 스탠드의 조명까지 있으니 그는 인간을 조각내 뜯어보듯 관찰할 수 있었다. 조명에 그림자가 진 얼굴을 한참 응시하고 있자 인간이 눈을 떠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 눈에 비친 조명이, 꼭 달이 뜬 것처럼 보였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머뭇거리며 손등을 내밀었다. 그는 망설이다 인간의 손등에 코를 가까이 했다. 제비꽃 향이 코 안을 가득 채웠다. 인간이 샐쭉 웃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망설였다. 지금, 저 인간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다. 그는 머뭇거리다 이내 엎드렸다. 저 정도의 인간은 언제든 죽일 수 있었다. 우선은 저를 무슨 이유로 데려왔는지, 그걸 먼저 알아내야 했다. 그도 눈을 감았다. 오래간만에 편히 잠들었다.



인간이 나가고 나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뜬 인간은 제게 음식을 내밀었다. 개 간식 냄새…. 제게 왜 이런 것을 내미는지 알 방도가 없었으므로 입에 대긴 했으나, 좋진 않았다. 다만 오랜 시간 굶주린 그에게 더 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너 나랑 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