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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습득의 공식 4화

2. 개가 아니라 (3)


커튼을 통과해 들어오는 환한 빛에 윤이 눈을 떴다. 눈이 부셔서 이불을 끌어 제 머리끝까지 덮으려 했으나 그 시도는 이불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설원이 때문에 불발됐다. 윤이 힐끗, 옆을 살폈다. 설원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윤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면 제 행동에 기가 막혔다. 내가 왜 피하지? 윤이 다시 설원이를 쳐다봤다. 설원이의 노란 눈과 마주하자 윤이 숨을 죽였다. 나 보고 있었구나. 그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잘 잤어?”

설원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반응이었다. 아직 몸에 붙은 잠을 다 털어 내지 못한 윤이 무거운 몸을 일으키면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낯선 소리에 양 귀가 밭아진 설원이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 현관으로 뛰어갔다. 아우우우우. 고막을 틀어막듯 무겁게 울리는 설원이의 거센 하울링에 기겁한 윤이 허겁지겁 뛰어나가 인터폰 수화기를 들었다.

“문 앞에 두고 가 주세요!”

아우우우우우! 난데없는 개 소리에 택배 기사가 엉거주춤 상자를 바닥에 내려놨다. 질겁한 표정이 인터폰 너머로도 또렷하게 보여, 윤이 마른세수를 했다.

“설원아… 기사님 놀라….”

이미 택배 기사는 아연실색하여 내려간 지 오래였다. 윤은 연신 울어 재끼는 설원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설원아, 택배 온 거야. 네 밥이랑 이것저것 산 거 왔어. 택배 보러 가자. 응?”

그제야 진정된 설원이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윤은 가슴을 쓸어내리곤 무거운 택배 상자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상자를 뜯어 하나씩 설원에게 구경시켜 주기 시작했다.

“이거 봐. 적은 양으로도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대. 물론 너는 많이 먹어야지. 그리고 이것도 봐. 이게 뭐게?”

윤이 장난감 공을 하나 꺼내 누르면 설원의 귀가 쫑긋, 공을 향했다. 윤은 소파 앞에 누운 설원의 앞으로 공을 굴렸다. 코앞으로 굴러온 공을 무심히 응시하던 설원이 코로 툭, 공을 굴려 윤의 발치에 밀어 놨다. 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떡해, 진짜 귀여워. 완전 개 같잖아. 윤이 다시 설원의 앞에 공을 굴렸다. 푸흥. 한숨을 푹 쉰 설원이 앞발로 공을 툭 쳤다. 그의 발목에 공이 굴러와 부딪혔다.

설원아…. 윤이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 수상한 몸짓에 설원이 경계심을 동공 안에 가득 집어 넣은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윤이 설원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폭신한 털 너머 단단한 몸체가 느껴졌다. 윤이 설원의 털에 얼굴을 기댔다. 기다란 털이 그의 볼을 간질였다.

“너 진짜 똑똑하다….”

설원은 가만히 있는가 싶었으나 몸을 털어 윤을 떨쳐 냈다. 윤이 설원의 눈치를 살폈다. 싫어? 미안해. 그의 마음 쓰이는 목소리에 설원이 다시 제자리에 엎드렸다. 윤은 커다란 설원의 등을 바라봤다. 역시 야생동물과 친해지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그러다 문득 제 상처가 떠올라 손등을 살폈다. 손등에는 아직 미처 흡수되지 않은 연고가 잔뜩 펴 발려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에 그는 그저 고개만 기울였다.



평소답지 않게 아침부터 많은 일을 해서인지, 별일 없었는데도 벌써 지쳤다. 윤이 다시 침대에 쓰러져 주먹을 꽉 쥐었다가, 쓰려 오는 상처에 몸의 왼편까지 저릿해져선 얼른 손을 폈다.

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설원은 태평하게 그의 옆자리에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윤은 눈을 감고 있는 설원을 쳐다봤다. 속눈썹도 있네. 윤은 그 얼굴을 훑다가 옆태가 두툼한 귀가 귀여워서, 슬쩍 설원의 귀로 손을 가져갔다. 제 몸체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설원이 번쩍 눈을 뜨곤 앞발을 들어 올렸으나 윤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는 망설이다 설원의 귀 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설원이 얕게 귀를 털었다. 하하. 그 모습은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윤의 웃음소리에 설원이 귀가 바짝 밭아졌다.

윤은 충만하게 제 가슴을 덥혀 오는 온기를 만끽했다. 이래서 다들 개 키우는구나. 윤과 설원이 동시에 눈을 감았다. 게으른 주말 아침, 윤은 밀려오는 수면의 파도에 가만 몸을 맡겼다. 저 혼자 쓸 때보다 비좁아진 침대가 꽤 마음에 들었다.



***



윤은 오늘도 공허하게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다. 집에 있을 설원이 생각에 저도 몰래 자꾸 일을 제쳐 놓고 상념에 빠지기 일쑤였다.

어제는 같이 텔레비전을 봤다. 설원이는 소파 위에 올라앉고 윤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윤은 강아지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주인이 ‘손!’이라고 외치자 강아지가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저쪽 손’이라고 하니,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윤이 제 손톱을 매만졌다. 저도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설원이 개가 아닌 것은 이미 알고 있다지만… 늑대잖아. 늑대가 더 똑똑하지 않을까?

작은 머리통에서 싹틔운 생각의 씨앗은 점점 그 몸집을 키웠다. 설원은 난데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윤을 묵묵히 바라봤다. 윤이 설원과 눈을 맞췄다. 그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윤이 냅다 손을 내밀었다.

“설원아, 손.”

설원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손.”

설원은 제 쪽으로 내민 손을 무시한 채 소파 위에 엎드렸다. 윤은 앞에 내민 오른손을 팔랑였다. 손…. 어째 잔뜩 기운이 빠져 작아진 목소리에 설원이 콧김을 푹, 내뿜었다. 윤이 입을 앙다물었다. 호기롭게 내민 손이 열없었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머쓱해진 윤이 눈을 내리깐 채 손을 거두려는 찰나 설원이 그 손바닥 위에 앞발을 올려놓았다. 어! 제 손에 얹어진 설원의 얄팍하고 커다란 앞발에 외마디 탄성이 나왔다.

예상외의 행동에 윤이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그러는 동안에도 설원이는 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조용히 앞만 보고 있었다. 윤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길게 뻗은 눈매가 눈썹달처럼 보드랍게 휘었다. 설원이 그 모습을 곁눈질로 힐긋, 보다 시선이 마주치면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그 이후로 윤은 잠들기 전까지 세 번 정도 더 ‘손’을 외쳤다. 설원은 빼는가 싶다가도 마지못해 앞발을 내밀었다. 그러면 윤은 세상을 다 가진 양 웃었다. 그 며칠 함께 지냈다고 약간이나마 풀린 경계심을 직접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윤은 출근하기 전에 설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설원이는 이제 ‘손’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눈치였다. 설원의 앞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한참을 못 본 척하다가도 빳빳하게 편 손바닥 위에 힘없이 앞발을 올렸다. 그러면 윤은 실실 웃으면서 ‘다녀올게’라고 말했다. 그저 모든 게 다 좋았다. 이제는 설원이가 진짜 개든, 늑대든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오래 같이 있고 싶어졌다.

“윤 씨. 잠깐만.”

“아, 네.”

이 대리가 윤을 불렀다. 한참을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윤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가 이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대리는 윤의 사수를 자청했다. 안 그래도 바쁜 시기에 신입 교육은 쓸데없이 손이 많이 간다고 꺼리기만 하던 사람들 틈에서 처음부터 호의를 베풀어 주던 사람이었다. 이 대리는 윤이 의자에 걸어 놓은 코트를 집었다.

“거래처 두 곳만 들르기로 했습니다. 윤 씨도 같이 가요, 지금.”

“지금요?”

“네. 점심 안 먹었어요?”

“아뇨. 먹었어요.”

“다행이네요. 여기랑 거리가 좀 있어서, 지금 출발해야 그쪽 퇴근 시간 전에 맞춰 갈 수 있어요. 미리 연락 다 해 놨습니다. 사원 한 명도 같이 간다고 했고.”

네에. 의자 위에 걸쳐 둔 코트에 허겁지겁 팔을 꿰어 넣는 순간 윤이 기침과 재채기를 연달아서 했다. 이 대리가 윤을 돌아봤다. 윤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냈다. 아침 출근길에서부터 자꾸 머리가 지끈거리고 마른기침이 나오더니,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왜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감기 걸렸어요?”

“아, 아니요. 저 괜찮아요.”

“어디 아프면 말해요. 혼자 가도 되니까.”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같이 가요, 대리님.”

이 대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다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 주머니에 휴지를 쑤셔 넣었다. 설원이 때문에 집 안 난방을 안 켜서 그런가? 아니면 창문을 자주 열어 놔서. 이 대리를 따라가면서 제 감기의 원인을 기억 속에서 헤집었다. 이상하게 찬 공기를 좋아하는 듯한 설원이 때문에 그는 주말 내내 환기를 핑계 삼아 창문을 열어 뒀었다. 밑으로 처박힌 머리가 올라오지 못했다.

제발 이게 감기가 아니길 바랐다. 제 사수의 외근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윤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평소엔 믿지도 않는, 제가 살면서 몇 번 들어 봄 직했던 온갖 신들을 나열해 기도했다. 제발 감기 걸린 게 아니라고 해 주세요….



에취! 훌쩍…. 으, 으에취! …훌쩍.

외근이 끝날 때쯤 윤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두루룩, 눈을 굴리며 이 대리의 눈치를 살폈다. 완전 망했다. 윤이 눈을 꾹 감았다. 가면 갈수록 몸 상태는 더 안 좋아졌다. 자꾸 재채기와 기침이 잇따라 터졌고 거래처 직원들은 지대한 관심과 배려심을 보였다. 윤은 그것을 조금도 원치 않았다.

감기 걸리셨나 봐요. 이거 따뜻한 건데, 좀 드세요.

아, 아니에요.

가습기라도 틀어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가습기를 틀러 가려는지, 이미 반쯤 몸을 일으킨 거래처 직원에게 손사래를 치며 억지로 다시 앉혔다. 자신에게 닿는 이 대리의 시선에 얼굴이 잔뜩 따끔했다.

시간이 갈수록 열이 올랐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눈두덩이 아려 왔다. 어째 귀가 멍하고, 계속 휴지로 문대던 코는 쓰라림을 넘어 드디어 감각이 거의 사라졌다. 윤은 무의미하게 코를 삼켰다. 손에 쥔 휴지가 배어 나오는 열기에 뜨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이제 끝났으니까 얼른 들어가 보세요. 가기 전에 병원이라도 들러야 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