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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습득의 공식 3화

2. 개가 아니라 (2)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설원이는. 우리나라에서 늑대는 멸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기사까지 보고 나니 심란한 마음은 들불이라도 난 것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늑대라고 확신한 이상, 그리고 정말 늑대라면 오래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 설원이가 건강해지고 나면, 야생동물보호협회에 전화해 볼 생각이었다. 잠깐이나마 함께하자고 지어 준 이름이 머쓱해졌다.

“설원아.”

설원이가 입가를 두어 번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잘랑잘랑 넘칠 듯이 가득 채워 준 물은 어느새 바닥까지 전부 핥아 먹어 빈 그릇을 내준 것처럼 보였다. 사나운 눈빛이 어째 무섭지 않았다. 부족해? 윤이 생수 통을 들고 와 다시 그릇에 부었다.

“너 이거 다 마시면 목욕하자.”

물을 마시던 설원이의 왼쪽 귀가 움찔거렸다. 내 얘기 들었지? 목욕하는 거야. 어쩐지 물을 마시는 속도가 다분히 느려진 것처럼 보여 윤은 고개를 갸울였다.

그렇게 많이 마셔 놓고도 아직도 목이 마른지 설원이는 텅 빈 그릇을 연신 핥았다. 윤이 웅얼거렸다. 물 더 줘…? 설원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깜짝이야. 윤은 벌렁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누가 봐도 물 더 달라는 눈빛이었다.

고민하던 윤이 일어나 설원이를 불렀다. ‘이리 와.’ 꼼짝도 않는 것을 두어 번 더 부르자 그제야 느린적느린적 걸어왔다. 설원이가 두 발짝 오면 윤이 두 발짝 더 멀어지고, 다시 두 발짝 오면 윤이 또 두 발짝 멀어졌다. 잠자코 저를 부르는 대로 따르던 설원이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뭔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윤의 한 발짝 뒤에는 문이 활짝 열린 욕실이 있었다.

“빨리 와. 목욕하기로 했잖아.”

설원이의 왼쪽 뒷발이 한 걸음 뒤로 갔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윤은 다급히 설원이의 앞다리 두 쪽을 잡아끌었다.

“물 다 마시고 목욕하기로 했잖아! 얼른 와!”

설원이 몸에 힘을 주고 버티며 물그릇 쪽으로 자꾸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도 윤이 놔주지 않자 물그릇께로 뒷걸음질 쳤다. 윤이 필사적으로 그 앞발을 잡아끌었지만 설원이의 덩치에, 힘에 밀려 욕실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윤은 약 6년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체육대회 줄다리기가 떠올랐다. 대회에서처럼 죽기 살기로 당기기엔 설원이의 다리뼈가 마냥 걱정이었다.

“물은 목욕하면서 마시면 돼! 우리나라 물 깨끗해서 마셔도 된다고! 너 진짜 빨리 안 와?”

별수 없었다. 윤은 설원이의 겨드랑이께를 잡고 끌었다. 여기라면 뼈가 부러지지 않겠지. 비로소 윤은 있는 힘껏 설원이를 끌어올 수 있었고, 결국 설원이 욕실로 들어섰다. 윤은 혹여 설원이 탈출할까 봐 재빨리 욕실 문을 닫았다. 설원이의 눈빛은 원망으로 가득했으며 항상 바짝 세워 놓던 두 귀는 뒤로 누워 있었다.

이러지 마, 나도 힘들어…. 윤이 한숨을 내쉬며 설원을 욕조 안에 집어넣었다. 물론 그마저도 한참이 걸렸지만 이미 반쯤은 체념한 듯한 설원이 몸에 힘을 뺀 덕에 아까보단 훨씬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그럼에도 그는 진땀이 흘렀다.

윤이 따뜻한 물을 틀어 설원의 몸을 적셨다. 몸이 푹 젖자, 설원이 물을 털었다. 흐아! 윤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윤도 물폭탄을 맞았다. 젖은 앞머리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윤은 축 젖어 달라붙은 흰 티셔츠를 벗었다. 설원이의 고개가 윤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윤은 손바닥 가득 샴푸를 짜며 고민했다. 이거 개한테 써도 되나? 아니, 늑대한테…. 윤은 설원이의 몸에 샴푸칠을 했다. 이번만 쓰기로 했다. 손길을 받는 설원이 생각보다 얌전했다.

“오늘만 샴푸 이거 쓰자. 내가 다음에 애견용 샴푸 사 올게. 알겠지?”

늑대용은 없으니까. 그는 애써 뒷말을 삼켰다. 하얗고 향기로운 거품이 설원이를 덮어 가고 있었다. 윤의 손길이 설원이의 등허리를 타고 꼬리로 내려오자 설원이가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콧잔등에 주름이 생긴 걸 보니 뭔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윤이 삐딱하게 구는 설원을 노려봤다.

“거기도 씻어야지. 네가 씻을 거야? 아니잖아. 이리 와.”

윤이 다시 설원의 꼬리 근처를 만지자 설원이 크르르릉, 하고 목을 울렸다. 하지만 윤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빨리 씻고 끝내면 저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을. 잠깐의 눈싸움 끝에 윤이 재빠르게 설원의 엉덩이로 손을 댔다. 설원이 크게 짖으며 그 손을 뿌리쳤다.

아!

윤이 손을 떼고 제 팔을 붙잡았다. 손목부터 손등까지 설원의 발톱에 살이 길게 찢어졌다. 새빨간 핏방울이 찢어진 살갗 위로 한 방울씩 맺혀 올라오더니 손등, 손목을 타고 핏줄기가 길게 이어져 흘렀다. 베이지색 타일 위로 피가 떨어졌다. 송골송골 올라오던 피는 이미 고인 자리에 그대로 다시 떨어지며 면적 크기를 키워,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윤이 눈을 깜빡였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세 줄 중에서 가운데의 상처가, 찢어진 살갗이며 피가 흐르는 정도가 유독 심했다. 나머지는 그보다야 얕게 찢어졌다지만 그렇다고 괜찮다고 보긴 어려웠다. 상처 난 부위가 홧홧해 손등에 불이라도 붙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바닥에 흐른 피가 타일 홈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떨어지는 피를 지켜보던 윤이 설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원이의 귀는 여전히 바짝 뒤로 젖혀져 있었지만 사나운 눈빛은 제법 사라졌고 잔뜩 짧아진 코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윤은 상처 난 제 왼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설원의 머리통으로 오른손을 얹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손에 크게 움찔하던 설원이 이내 잠잠해졌다. 윤이 눈을 곱게 접으며 설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많이 놀랐어? 윤이 말을 건넸다. 으레 그랬듯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어도 머리통의 짧은 털이 스치는 감각이 좋았다. 비록 손에 묻은 거품 탓에 설원의 머리통에 점점 비누칠하는 꼴이 됐지만 오히려 얌전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개들이 꼬리 만지는 걸 싫어한다는 글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 잘못이다. 윤이 설원이 쪽으로 몸을 옮겼다. 움직일 때마다 피가 흘러서, 조금 움직인 거리도 핏방울로 점이 찍혔다. 왼쪽 팔의 움직임을 최대한 줄이던 윤이 타일 위에 찍힌 빨간 점들을 발견했다. 핏방울이 흐르는 물에 섞여 희석됐다. 윤은 설원의 머리통을 얕게 쓰다듬었다. 상처 부위가 저렸다.

“여기 씻는다…?”

윤은 다시 설원의 꼬리 쪽에 손을 댔다. 이번에도 싫어할까 봐 걱정돼, 손길이 훨씬 조심스러웠다. 아무 반응이 없자 윤은 내처 가만히 있었다. 지금… 움직여도 되나? 망설이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설원이 꼬리를 살랑이며 제 엉덩이에 올라간 윤의 손을 쓸었다. 보드랍고 북실북실한 털 뭉치의 감각이 느껴져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완전… 완전 부드러워.

윤의 입에서 미소가 터졌다. 꼬리 잠깐 스친 게 뭐라고 이다지 기분이 좋은지. 다친 왼손은 피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잔뜩 쓰라렸지만 윤의 미소는 갈수록 깊어졌다. 제게 조금 마음을 연 것만 같았다. 설원이 그를 힐끗,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그마저도 좋아서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나 꼬리 잡을게.”

윤이 살며시 꼬리를 잡았다. 설원이 축 내린 꼬리를 재빨리 위로 말아 올렸다. 그는 얼른 손을 뗐다. 설원이 그렇게 싫어한다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린 꼬리를 조용히 보고 있으니, 이내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윤은 아까보다 더 신중히 꼬리를 잡았고, 이번엔 설원이도 얌전했다. 꼬리를 조물거리는 윤이 방실거리며 웃었다. 털 뭉치…. 너무 귀여워. 진짜 복실복실해. 보드라운 털 가운데로 단단한 꼬리가 만져졌다.

설원이 몽글하게 피어오른 흰 거품을 완전히 뒤집어썼다. 이 정도면 깨끗한 것 같아 윤은 물을 얕게 틀어 설원을 덮은 거품을 벗겼다. 찢어진 왼손은 차마 쓸래야 쓸 수가 없어서 설원의 무릎까지 물이 잠기고서야 열어 놓은 밸브를 잠그고 오른손으로 거품을 씻어 내렸다. 설원은 의외로 얌전했다. 거품이 설원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윤은 새 수건을 가져와 털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물기를 털어 내기는 확실히 힘들어서, 수건을 잡은 손이 자꾸 엇나가곤 했다.

“더 예뻐졌네. 진작 씻을걸. 그치?”

윤이 물기가 남은 설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축한 물기가 손바닥을 적시며 간질였다. 설원은 늘상 그렇듯 윤을 쳐다도 보지 않다가 욕실 문을 열기 무섭게 설원이 뛰어나갔다. 길을 비켜 준답시고 쪼그린 채 허둥대던 윤이 주저앉았다. 넘어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설원은 윤과 마주친 시선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윤이 열없이 웃었다.

그는 욕실을 나와서야 팔의 상처를 살폈다. 설원이를 씻기는 동안 상처는 자신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처럼 줄곧 얼얼한 한편, 들어 올리기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아 팔에 힘을 주고 있기도 어려웠다. 그새 응고된 피는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윤은 붕대를 감기에도, 밴드를 붙이기에도 애매한 상처를 그저 가만 보고 있었다. 윤이 왼손을 쥐고, 폈다. 아직도 홧홧한 살갗은 주먹을 쥐면서 피부가 팽팽하게 땅겨지자 비명을 질러 댔다. 상처 주변이 진득하게 아려 왔다.

윤이 인상을 썼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상처 난 부위가 연신 두근거려 윤이 연고를 찾아 제 상처에 치덕치덕 발랐다. 손을 대기엔 너무 따가워서, 차마 펴 바르지도 못한 채 그 위에 대충 덩어리째 연고를 얹었다. 이게 최선이다. 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무 힘든 하루였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설원은 원래 제자리인 양 윤의 침대 반을 차지한 채 둥글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윤은 조심스럽게 설원의 옆에 몸을 누였다. 그는 망설이다 설원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새우잠을 청했다. 잘 자. 혹여나 깰까, 말하지 못한 밤 인사가 그의 마음에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