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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7화
#2 (8)
하기야 드라마 스태프들이 묵어서 호텔 차원에서도 더 신경 쓰고 있을 플로어에서도 이 사달이 나는데 다른 플로어로 간들 나아질 리 없었다. 더 심해지면 모를까.
열심히 살아서 일 많고 좋을 줄 알았는데 인기 아이돌은 정말 힘들구나. 이런 모습을 보니 새삼 안타까워졌다. 과자를 집어 먹던 도하는 세진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가 두 개여서 다행이네. 아니었으면 내가 소파행이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우리 슈퍼스타를 소파에서 재워! 내가 그러고 싶어도 매니저 형한테 욕먹어. 아, 아니면 같은 침대에서 자려고?”
나는 상관없어. 도하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세진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싫은가. 농담임에도 살짝 상처받았다. 물론 그는 세진이 다른 사람과 한 침대, 한 이불에서 못 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너 남이랑 못 자는 거 알아요. 마침 침대도 두 개예요.”
맥주 캔을 든 팔뚝을 짝짝짝 손바닥으로 치며 말하자 곧 딩동 하는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보자 도하의 매니저였다. 문을 열자 그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
“세진 씨 짐 여기 가져왔어요. 도하 너, 세진 씨 괴롭히지 말고.”
“내가 왜 괴롭혀요!”
“넌 습관적으로 남을 괴롭혀.”
괜히 욕먹은 기분이 들었다. 매니저는 도하의 차림새를 보고도 옷차림이 그게 뭐냐며 한마디 했다.
“같은 남자에 친한 친구인데 편하게 입으면 어때서?”
입을 삐죽 내밀며 가운을 잡아 펄럭거리자 매니저는 혀를 차며 기본적인 매너는 지키고 살자고 말했다. 도하는 혼자 편하게 있는 중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것은 세진인데 자기만 잔소리를 듣고 있는 게 억울했다.
세진은 그가 억울해하든 말든 매니저에게 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갑작스럽게 폐를 끼치게 돼서 놀라셨을 텐데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편히 쉬세요.”
매니저는 나갈 때까지 눈으로 경고를 보내길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에 질린 도하가 등을 떠밀어 그를 내보냈다.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평화를 되찾은 도하는 다시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며 세진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슈퍼스타가 부슬비에 젖어 축축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손님, 씻으시지요.”
“그럴 겁니다.”
세진은 도하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자리한 싱글 침대에 간편한 복장을 올려 두었다. 그 옆에 스킨로션 병과 내일 찍을 장면이 담긴 대본을 마저 꺼내고 다시 캐리어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워시 키트와 옷을 들고 욕실로 걸어갔다. 난장판으로 옷을 꺼내 놓고 방치한 도하의 캐리어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걸어가는 중에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도하의 시선에 인상을 쓰며 “뭐.” 하고 말했다.
“아이돌 구경.”
“그냥 자라.”
“더 놀고 싶은데.”
“MT 왔어?”
탁 소리를 내며 닫힌 무심한 욕실 문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도하는 다 마신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툭 쳤다. 조금씩 야금야금 먹었다고 생각한 봉지 과자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입 안을 헹구고는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들었다.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간다.
대본을 꺼내서 읽다가 슬슬 가물가물해지는 눈꺼풀을 이길 수 없어질 때쯤 욕실 문이 열렸다.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던 세진이 테이블에 흐트러진 과자 봉지와 빈 맥주 캔, 엎드려서 고개를 꾸벅거리는 도하를 번갈아 보더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양치는 해라, 좀.”
“어…… 어! 너 왜 안경 썼어?”
“그럼 렌즈를 끼고 자?”
졸음을 이겨 내며 몸을 일으켜 세운 도하가 달라진 세진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언제 꺼냈는지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끼는 세진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와, 안경까지 끼니까 진짜 중학생 때랑 똑같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이후로는 렌즈를 끼고 살았다. 도하가 자주 안경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했고 나중에 활동할 때를 대비해 미리 익숙해지는 것이 좋겠다 판단해서였다.
렌즈를 처음 끼던 날 눈이 새빨갛게 변했던 세진의 얼굴을 기억하는 도하가 추억에 젖은 눈을 했다. 안경테에 손을 대려고 하자 얼굴을 뒤로 빼며 피했다. 그 모습 또한 어렸을 때랑 똑같았다.
하핫 하고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던 도하가 몸을 쭉 늘리며 캐리어에서 칫솔을 찾아 치약만 묻힌 채 앉아서 양치를 했다.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엎드려 조는 사이 풀어 헤쳐진 앞섶을 고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세진은 자신의 침대에 앉아 가볍게 스킨로션을 바르고 대본을 폈다. 조용한 방 안에 도하가 치카치카 이를 닦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거슬렸는지 세진이 입을 열었다.
“가서 해.”
“가 꺼야.”
“말하지 마.”
“하 꺼야.”
“옷 좀 제대로 입어.”
“시어, 흐흐.”
도하는 세진의 잔소리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어눌하게 대꾸하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왜 저러는 거야. 얕게 흔들리는 도하의 뒷모습을 보던 세진이 갑자기 휙 자신을 돌아보며 엉금엉금 기어오는 모습에 기겁했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기괴한 모습에 급하게 다시 대본으로 눈을 떨궜다.
금세 세진의 앞에 앉은 도하가 순진무구하게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예나에…… 읍!”
“뱉고 말해. 더럽게 진짜.”
손으로 도하의 입을 틀어막은 세진이 인상을 썼다. 눈도 안 마주치며 꾸짖는 모습에 도하는 눈썹을 모아 불쌍한 척을 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욕실로 걸어갔다.
세진은 그 팔랑거리는 가운 자락을 보다가 손바닥을 한번 확인했다. 다행히 거품은 묻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닫히지 않은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폈던 대본을 빠르게 덮어 그 위에 안경을 벗어 올려놓곤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는 빨리 잠이 들기를 바라는 것처럼 눈을 꼬옥 감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도하가 양치를 다 하고 졸음이 약간 깬 상태로 나왔을 때, 세진은 이미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 몇 초 사이에 잠을 자? 뱉고 말하라며!
조금 더 떠들고 싶었던 도하는 그를 흔들어 볼까 생각했지만, 내일 있을 첫 촬영을 생각해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불을 껐다. 예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다고 회상하며 떠들고 싶었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알람 소리와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정신이 깬 도하는 어딘지 불편함을 느꼈다.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비몽사몽 중에 눈을 느릿하게 뜨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결박당한 것처럼 온몸이 얇은 이불에 돌돌 말려 있었다. 마치 김밥 같았다.
‘내가 이런 잠버릇이 있었나?’
도하는 잠이 덜 깨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 왜 이러고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먼저 일어난 세진은 벌써 나갈 준비를 끝낸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는 도하의 물음에 눈길 한번 안 주고 대답하며 대본을 들고 객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왜 저렇게 급하 게 나가나 했는데, 하품하며 생각해 보니 또 어디서 팬들이 날아올지 모르니 빨리 피신 간 것 같았다.
도하는 꼬물꼬물 이불에서 벗어나 잠시 침대 위에서 멍을 때렸다. 이불을 풀면서 같이 헤친 건지 입고 있던 가운이 거의 벗겨져 있었다. 잠결에 추워서 이불을 꽁꽁 싸맨 것 같기도 하다.
***
호텔에서 간단한 조식을 먹고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도하는 어제의 선한 학생 같은 모습이 아닌 예민한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앞머리를 까서 이마와 짙은 눈썹이 훤히 드러났다. 작렬하는 햇볕으로 인해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누가 말을 걸면 멱살부터 잡을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너 화났니?”
“햇볕이 눈을 공격해.”
그러나 인상만 그러했을 뿐 목소리는 평소처럼 징징거렸다.
도하는 매니저에게서 손 선풍기를 받아 들고 감독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의 첫 촬영은 1화에 들어갈 야외 장면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산에서 구르고 뛰어야 했다. 드라마를 찍는 동안 가만히 서 있는 시간보다 뛰고 구르는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아 걱정이다.
여름의 땡볕 아래에서 일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장비를 들고 움직이는 스태프들도 힘들고, 흐르는 땀과 상기되는 뺨으로 인해 NG가 나는 배우들도 힘들었다. 특히나 벌레가 많은 산에서의 촬영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모기에 물리는 스태프들이 대거 발생하고 갑작스러운 벌레 해프닝으로 촬영이 중단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여름 야외 촬영은 진짜 벌칙인 것 같아요.”
조연 중 홍일점 역할인 단비가 손 선풍기를 켜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단역과 조연 경험도 많고 산속에서 자신의 촬영분이 있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리던 한이 있어 이러한 상황이 익숙했지만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2 (8)
하기야 드라마 스태프들이 묵어서 호텔 차원에서도 더 신경 쓰고 있을 플로어에서도 이 사달이 나는데 다른 플로어로 간들 나아질 리 없었다. 더 심해지면 모를까.
열심히 살아서 일 많고 좋을 줄 알았는데 인기 아이돌은 정말 힘들구나. 이런 모습을 보니 새삼 안타까워졌다. 과자를 집어 먹던 도하는 세진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가 두 개여서 다행이네. 아니었으면 내가 소파행이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우리 슈퍼스타를 소파에서 재워! 내가 그러고 싶어도 매니저 형한테 욕먹어. 아, 아니면 같은 침대에서 자려고?”
나는 상관없어. 도하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세진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싫은가. 농담임에도 살짝 상처받았다. 물론 그는 세진이 다른 사람과 한 침대, 한 이불에서 못 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너 남이랑 못 자는 거 알아요. 마침 침대도 두 개예요.”
맥주 캔을 든 팔뚝을 짝짝짝 손바닥으로 치며 말하자 곧 딩동 하는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보자 도하의 매니저였다. 문을 열자 그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
“세진 씨 짐 여기 가져왔어요. 도하 너, 세진 씨 괴롭히지 말고.”
“내가 왜 괴롭혀요!”
“넌 습관적으로 남을 괴롭혀.”
괜히 욕먹은 기분이 들었다. 매니저는 도하의 차림새를 보고도 옷차림이 그게 뭐냐며 한마디 했다.
“같은 남자에 친한 친구인데 편하게 입으면 어때서?”
입을 삐죽 내밀며 가운을 잡아 펄럭거리자 매니저는 혀를 차며 기본적인 매너는 지키고 살자고 말했다. 도하는 혼자 편하게 있는 중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것은 세진인데 자기만 잔소리를 듣고 있는 게 억울했다.
세진은 그가 억울해하든 말든 매니저에게 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갑작스럽게 폐를 끼치게 돼서 놀라셨을 텐데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편히 쉬세요.”
매니저는 나갈 때까지 눈으로 경고를 보내길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에 질린 도하가 등을 떠밀어 그를 내보냈다.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평화를 되찾은 도하는 다시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며 세진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슈퍼스타가 부슬비에 젖어 축축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손님, 씻으시지요.”
“그럴 겁니다.”
세진은 도하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자리한 싱글 침대에 간편한 복장을 올려 두었다. 그 옆에 스킨로션 병과 내일 찍을 장면이 담긴 대본을 마저 꺼내고 다시 캐리어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워시 키트와 옷을 들고 욕실로 걸어갔다. 난장판으로 옷을 꺼내 놓고 방치한 도하의 캐리어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걸어가는 중에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도하의 시선에 인상을 쓰며 “뭐.” 하고 말했다.
“아이돌 구경.”
“그냥 자라.”
“더 놀고 싶은데.”
“MT 왔어?”
탁 소리를 내며 닫힌 무심한 욕실 문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도하는 다 마신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툭 쳤다. 조금씩 야금야금 먹었다고 생각한 봉지 과자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입 안을 헹구고는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들었다.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간다.
대본을 꺼내서 읽다가 슬슬 가물가물해지는 눈꺼풀을 이길 수 없어질 때쯤 욕실 문이 열렸다.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던 세진이 테이블에 흐트러진 과자 봉지와 빈 맥주 캔, 엎드려서 고개를 꾸벅거리는 도하를 번갈아 보더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양치는 해라, 좀.”
“어…… 어! 너 왜 안경 썼어?”
“그럼 렌즈를 끼고 자?”
졸음을 이겨 내며 몸을 일으켜 세운 도하가 달라진 세진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언제 꺼냈는지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끼는 세진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와, 안경까지 끼니까 진짜 중학생 때랑 똑같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이후로는 렌즈를 끼고 살았다. 도하가 자주 안경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했고 나중에 활동할 때를 대비해 미리 익숙해지는 것이 좋겠다 판단해서였다.
렌즈를 처음 끼던 날 눈이 새빨갛게 변했던 세진의 얼굴을 기억하는 도하가 추억에 젖은 눈을 했다. 안경테에 손을 대려고 하자 얼굴을 뒤로 빼며 피했다. 그 모습 또한 어렸을 때랑 똑같았다.
하핫 하고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던 도하가 몸을 쭉 늘리며 캐리어에서 칫솔을 찾아 치약만 묻힌 채 앉아서 양치를 했다.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엎드려 조는 사이 풀어 헤쳐진 앞섶을 고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세진은 자신의 침대에 앉아 가볍게 스킨로션을 바르고 대본을 폈다. 조용한 방 안에 도하가 치카치카 이를 닦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거슬렸는지 세진이 입을 열었다.
“가서 해.”
“가 꺼야.”
“말하지 마.”
“하 꺼야.”
“옷 좀 제대로 입어.”
“시어, 흐흐.”
도하는 세진의 잔소리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어눌하게 대꾸하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왜 저러는 거야. 얕게 흔들리는 도하의 뒷모습을 보던 세진이 갑자기 휙 자신을 돌아보며 엉금엉금 기어오는 모습에 기겁했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기괴한 모습에 급하게 다시 대본으로 눈을 떨궜다.
금세 세진의 앞에 앉은 도하가 순진무구하게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예나에…… 읍!”
“뱉고 말해. 더럽게 진짜.”
손으로 도하의 입을 틀어막은 세진이 인상을 썼다. 눈도 안 마주치며 꾸짖는 모습에 도하는 눈썹을 모아 불쌍한 척을 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욕실로 걸어갔다.
세진은 그 팔랑거리는 가운 자락을 보다가 손바닥을 한번 확인했다. 다행히 거품은 묻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닫히지 않은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폈던 대본을 빠르게 덮어 그 위에 안경을 벗어 올려놓곤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는 빨리 잠이 들기를 바라는 것처럼 눈을 꼬옥 감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도하가 양치를 다 하고 졸음이 약간 깬 상태로 나왔을 때, 세진은 이미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 몇 초 사이에 잠을 자? 뱉고 말하라며!
조금 더 떠들고 싶었던 도하는 그를 흔들어 볼까 생각했지만, 내일 있을 첫 촬영을 생각해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불을 껐다. 예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다고 회상하며 떠들고 싶었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알람 소리와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정신이 깬 도하는 어딘지 불편함을 느꼈다.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비몽사몽 중에 눈을 느릿하게 뜨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결박당한 것처럼 온몸이 얇은 이불에 돌돌 말려 있었다. 마치 김밥 같았다.
‘내가 이런 잠버릇이 있었나?’
도하는 잠이 덜 깨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 왜 이러고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먼저 일어난 세진은 벌써 나갈 준비를 끝낸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는 도하의 물음에 눈길 한번 안 주고 대답하며 대본을 들고 객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왜 저렇게 급하 게 나가나 했는데, 하품하며 생각해 보니 또 어디서 팬들이 날아올지 모르니 빨리 피신 간 것 같았다.
도하는 꼬물꼬물 이불에서 벗어나 잠시 침대 위에서 멍을 때렸다. 이불을 풀면서 같이 헤친 건지 입고 있던 가운이 거의 벗겨져 있었다. 잠결에 추워서 이불을 꽁꽁 싸맨 것 같기도 하다.
***
호텔에서 간단한 조식을 먹고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도하는 어제의 선한 학생 같은 모습이 아닌 예민한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앞머리를 까서 이마와 짙은 눈썹이 훤히 드러났다. 작렬하는 햇볕으로 인해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누가 말을 걸면 멱살부터 잡을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너 화났니?”
“햇볕이 눈을 공격해.”
그러나 인상만 그러했을 뿐 목소리는 평소처럼 징징거렸다.
도하는 매니저에게서 손 선풍기를 받아 들고 감독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의 첫 촬영은 1화에 들어갈 야외 장면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산에서 구르고 뛰어야 했다. 드라마를 찍는 동안 가만히 서 있는 시간보다 뛰고 구르는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아 걱정이다.
여름의 땡볕 아래에서 일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장비를 들고 움직이는 스태프들도 힘들고, 흐르는 땀과 상기되는 뺨으로 인해 NG가 나는 배우들도 힘들었다. 특히나 벌레가 많은 산에서의 촬영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모기에 물리는 스태프들이 대거 발생하고 갑작스러운 벌레 해프닝으로 촬영이 중단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여름 야외 촬영은 진짜 벌칙인 것 같아요.”
조연 중 홍일점 역할인 단비가 손 선풍기를 켜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단역과 조연 경험도 많고 산속에서 자신의 촬영분이 있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리던 한이 있어 이러한 상황이 익숙했지만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