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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6화

#2 (7)





“이 플로어 전부 드라마 스태프가 쓰니까 본인이 묵는 층으로 가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세진 오빠 여기 있는 거 맞잖아요! 얼굴 한 번만 본다니까요?”

“강세진 씨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그럼 들어가는 거만 보고 갈게요.”

뻔뻔하게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서 있는 여성이 몇 번 본 적이 있는 세진의 매니저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승강기를 빠져나와 그 모습을 힐끗 보자 도하의 매니저가 “보지 마, 보지 마.” 하며 팔을 당겼다. 괜히 눈에 띄어 시비가 트면 곤란했다.

하지만 승강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색을 드러내며 빠르게 이쪽을 돌아보는 그녀의 눈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어…….”

피할 새도 없이 마주친 눈에 도하가 당황했다. 그녀는 내린 이가 세진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 순식간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뭐야. 강세진 버스 탄 사람이네.”

불쾌함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였다. 그녀의 발언에 세진의 매니저가 기겁하며 말리려고 하자 만지면 신고할 거라고 날카롭게 쪼아 댔다. 도하는 그 모습을 무시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객실로 향했다.

돌아선 그의 등에 싸가지 없게 사람을 노려봤다는 자의식 과잉인 오해와 왜 세진이 주인공이 아니냐는 불만이 꽂혀 왔다. 이후로 줄줄 늘어지는 말이 인터넷 게시판을 줄줄 읊는 수준의 폭격이었다. 어쩜 저런 말들을 머릿속에 전부 입력하고 온 것인지 신기했다.

곧 호텔 직원이 올라와 그녀를 끌고 갔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신경질을 내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나도 여기 묵는 사람이라며 쩌렁쩌렁 목청을 높이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저런 애들이 지금 이 호텔에 가득 있다는 말이야.”

매니저가 소름이 돋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도하는 내일까지 객실에서 절대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예상된 반응이었기 때문에 놀라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매니저는 요깃거리를 사 올 테니 씻고 조용히 있으라 말하며 다시 객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서 괜히 사고 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매니저는 툴툴거리다가 순순히 그러겠다 대답하는 도하를 못 미더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카드 키 내가 가져간다.” 하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삐리릭. 잠금 소리가 들리고, 도하는 객실에 갇히게 되었다.

“나가는 것 자체가 사고라는 말이군.”

도하는 뺨을 긁으며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땀과 먼지를 따듯한 물로 흘려보내며 노래를 흥얼거리자 기분이 살아났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후 오랜만에 노곤하게 욕조에 몸을 뉘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물은 적당히 피로감을 흡수해 갔다. 도하는 한껏 풀어진 얼굴로 조금 전 세진의 팬에게서 들은 말을 곱씹었다. 워낙 강렬해서 머릿속에 콕 박혔다.

강세진 버스. 직접 따라 해 보니 맥 빠진 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드라마와 도하는 강세진 버스, 정확히는 G.I라는 큰 탱크를 타고 있었다.

자각이야 매일매일 반복해서 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들으니 새삼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생각하겠지. 홍보도 주인공인 도하가 아닌 세진을 앞세울 것이고, 모든 매체에서 세진이 도하의 이름 앞에 나올 것이다. 세진의 소속사에서 해 준 지원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게 좋은 거지.”

그의 입장은 그러했다. 이노센트 알파는 강세진의 이름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그래야 관심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관심을 얻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드라마를 볼 것이고 이는 드라마의 성공과 직결되었다.

주인공이라고 무조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한다. 어차피 얻어걸린 주인공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세진에게 가려진 그림자 주인공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침몰하는 배의 선장보다는 유유자적 항로를 달리는 배의 선원이 좋았다.

도하는 기지개를 쭈욱 펴며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게 기분이 좋았다. 내일도 산속에서 촬영해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 남은 피로를 풀어야 했다. 매니저는 분명 도하가 좋아할 만한 과자나 안주와 함께 맥주를 사 올 것이다. 맥주 한 잔만 먹고 자야지.

목욕 가운을 몸에 걸치고 욕실을 빠져나오자 문밖이 다시 소란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또 세진의 팬들인가? 얘네는 잠도 없나, 벌써 새벽인데. 그녀들의 엄청난 열정에 혀를 내두르며 세진의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객실 문이 열렸다.

“혀…엉?”

매니저인 줄 알고 간식을 기대하며 다가갔더니 편의점 봉투를 든 세진이 서 있었다. 옷차림은 산에서 촬영했을 때 눅눅해진 사복 그대로였고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피곤과 그늘이 가득했다. 바닥을 보며 멍하게 서 있는 걸 보니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얘가 왜 여기 있어? 도하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세진에게 다가갔다.

“뭐야, 나랑 자려고 왔어?”

툭 던진 질문에 넋이 돌아온 듯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도하의 모습을 보고 급습당한 고양이처럼 털을 잔뜩 곤두세우며 뒷걸음질 쳤다. 뭐야. 왜 네가 놀라? 침입당한 내가 더 놀라야지! 도하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뒷걸음질 친 세진이 문에 쿵 하고 부딪치자 갑자기 밖에서 긴박하게 문을 두들겨 왔다.

“세진 오빠! 세진 오빠 여기 있어요?”

“오빠! 세진 오빠!”

세진의 팬들이었다. 그 소리에 세진이 질겁하며 다시 문에서 몸을 떼어 안으로 한 발짝 들어왔다.

4D로 즐기는 공포 영화인 건가. 나 공포 영화 싫어하는데. 도하는 자신의 방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관객이 된 느낌이었다. 고요한 방을 울리는 노크 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광기가 어려 있었다.

똑똑 두들기던 소리가 쾅쾅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세진을 찾는 목소리 또한 확신에 찬 듯 높아져 갔다.

방 주인인 도하는 귀를 찌르는 소리에 인상을 쓰며 세진의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잠시 움찔거렸지만 쉽게 끌려왔다. 객실 문에서 안 보일 만한 구석에 앉히고서 다시 문 쪽으로 가 진동으로 시끄럽게 흔들리는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에 있는 사람은 10대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아까 만난 아역 배우와 비슷한 또래인 것 같았다. 도하가 문틀에 어깨를 기대며 팔짱을 꼈다. 방금 막 씻고 나온 탓에 마르지 않은 머리칼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걸쳐 입은 목욕 가운의 앞섶은 살짝 벌어졌다.

예상하던 이와 다른 사람이 등장한 데다 상대의 큰 키와 덩치에 압박을 느낀 아이들이 몸을 굳혔다. 눈이 머물 곳을 잃고 방황했다. 얼굴을 한번 힐끔 보는가 싶더니 날이 선 인상에 금세 꼬리를 내렸다.

“세진 오빠 없어요.”

도하가 눈을 내리뜨며 낮게 말하자 바들대던 아이들은 방 안쪽을 한번 흘겨보더니 대답도 없이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그러다가 호텔 직원한테 걸려 끌려갔다. 벌써 두 번째 보는 광경이다. 끌려가며 징징거리는 것까지 구경한 도하가 문을 닫았다.

복도가 조용해지니 세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스르륵 허리를 숙였다.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계속 도망을 다닌 것 같았다. 촬영분도 없으면서 굳이 오늘 험한 촬영장으로 발을 옮겼던 게 연기를 참고하기 위해서가 전부는 아닌 모양이다.

“너는 이런 거 엄청 익숙하지 않아?”

“익숙해도 적응이 안 되는 게 있는 거지.”

어느새 멀쩡해진 세진이 도하의 품에 편의점 봉투를 던지며 대답했다. 아이돌 생활을 아무리 오래한들 온갖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오는 팬들에게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을 거다.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을 테고. 방금 공포 영화 한 장면을 목격한 도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팬이 아니라 스릴러를 찍는 스토커처럼 느껴졌다. 안 그런 표정으로 내쫓았지만, 사실은 무서웠다.

“근데 넌 왜 여기로 왔어? 우리가 언제부터 룸메이트가 된 거야?”

침대에 풀썩 앉아서 봉투 안을 뒤적이며 물었다. 손에 잡히는 차가운 맥주 캔의 감촉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함께 들어 있는 부스럭거리는 과자 봉지를 꺼내 내용물이 모두 보이게 뜯고 맥주 캔을 깠다. 여기까지 오면서 과격하게 흔들렸는지 따자마자 거품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가운을 적셨다.

“어어어, 배달하려면 좀 잘하지!”

도하가 울상을 지으며 핀잔을 주자 당황한 세진이 급하게 테이블 위에 있는 티슈 갑에서 서너 장을 뽑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들고는 가운을 들어 올려 벅벅 닦았다. 가늘어진 눈으로는 올려다보니 흔들리는 세진의 눈빛이 도하가 닦는 가운에 닿아 있었다.

대충 매니저가 세진에게 봉지를 맡긴 것은 알겠다. 카드 키를 세진이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했다.

“내 매니저가 네 매니저한테 부탁했나 봐. 내 방이 팬들한테 알려져서 지금……. 하, 이 플로어는 이미 자리가 다 찼고 다른 플로어로 넘어가면 더 심해질 거 같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어. 잠깐만 여기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