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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5화

#2 (6)





가장 처음 촬영한 것은 형우와 재영의 과거 장면이었다.

도하는 아역 배우와 나란히 서려니 부담감이 대단히 컸다. 몇 번이고 감독에게 진짜 괜찮냐고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감독은 괜찮다며 엄지를 추어올렸다. 하지만 그걸로 안심이 될 리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카메라 앞을 서성이던 도하는 이내 아역 배우에게도 ‘내가 형으로 보이니? 삼촌으로 보이니?’ 하고 물어서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 촬영에서는 없는 귀신을 보고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기도 했다. 재미야 있었지만 컷 소리가 나오면 자꾸 민망해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중에 CG로 추가될 귀신들이 기대되기도 했다. 물론 너무 무서우면 못 본다. 도하에게 공포는 쥐약이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야외 촬영은 부슬비가 내리는 밤까지 이어졌다. 예정된 시간을 넘어서자 주요 스태프들 이외에는 다 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촬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과거의 장면을 어떻게 연기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한 세진은 내일이 첫 촬영이었음에도 현장에서 스태프 한 명 몫을 하면서 현장을 구경했다.

“이야, 비싼 반사판이네.”

아역 배우에게 두루마기를 입혀 주고 고름까지 예쁘게 접어 준 도하가 반사판을 들고 서 있는 세진을 보고 낄낄 웃었다. 반사판 앞으로 아역을 데리고 가 세우더니 ‘비싼 반사판으로 사진 한번 찍어.’ 하고 말하며 원 샷을 찍어 주었다.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인기 아이돌 마슈크의 강세진이 든 반사판 앞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아역 배우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잘 나왔다고 박수까지 쳐 주자 아이도 사진을 보며 하하 크게 웃었다. 성인용 두루마기가 큰지 소매에 먹힌 손이 귀여웠다.

“너 엄청 구르더라.”

“내가 이렇게 몸을 안 사린단다.”

세진이 흙과 먼지, 진흙으로 잔뜩 더러워진 도하를 훑어보며 말했다. 도하는 짧게 대답하며 방금 촬영했던 장면을 곱씹었다. 말 그대로 산에서 뛰고 굴러다녔다. 진짜 넘어진 건지 연기로 넘어진 건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바닥을 구른 끝에 첫 촬영이 끝났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다.

세진은 재영의 감정선에 더 집중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아역 배우의 연기와 도하가 연기한 고등학생 형우가 세진이 연기할 재영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도하는 오늘 현장이 재영의 분석에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른 재영 씨, 형우가 이렇게 몸을 굴려 과거의 당신을 구했습니다. 어떤 느낌이십니까!”

도하가 장난스럽게 인터뷰하듯 마이크를 쥐는 시늉을 하며 손을 세진에게 가져다 댔다. 세진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손에 한번 눈길을 주고 대답했다.

“불쌍해.”

“그건 지금 윤도하에 대한 감상 아니야?”

“맞아.”

세진은 도하의 투명 마이크를 무시하며 반사판을 스태프에게 반납했다. 재미없는 반응에 아쉬워하던 도하는 스태프에게 받은 수건으로 먼지 묻은 얼굴을 닦고 젖은 머리를 털었다. 눅눅해서 살짝 붙은 셔츠도 훑어 내고 다시 수거하는 스태프에게 돌려주었다.

어느새 10시가 되었다. 더는 촬영할 수 없는 아역 배우가 매니저와 함께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너도나도 오늘 수고했다며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하며 아이를 배웅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하도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활짝 웃으며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귀여웠다.

역시 애들은 귀엽다고 생각하며 추가적으로 필요한 장면을 찍기 위해 대기하던 중 감독이 장면을 검토하다 그를 불렀다.

“도하 씨, 이 부분 한 번만 더 찍어요. 바스트 숏인데…….”

대본의 한 부분을 콕 집으며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대사가 없는 장면이었다. 촬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아역 배우에게 맞추기 위해 급하게 찍은 터라 디테일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이었다.

재촬영 이유가 충분히 납득돼 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독의 설명을 머리에서 그려 갔다. 그러는 사이 분장 팀이 도하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다시 먼지와 흙이 묻은 것처럼 얼굴을 손봤다. 아까 아역에게 입혀 주었던 두루마기도 돌아왔다.

“세진 씨, 앞에 좀 서 주세요.”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감독이 마침 자리에 있던 세진을 앞에 세웠다. 나란히 서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간선상 절대 마주하지 못하는 스물다섯의 재영과 열여덟의 형우가 마주 보고 있었다. 세진으로서는 처음으로 도하의 연기를 직접 마주하게 된 상황이었다.

큐 사인이 나오자 윤도하의 얼굴이 지워졌다. 방금까지 정신없이 뛰어다닌 형우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어깨가 가늘게 떨려 왔다.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뒤를 둘러보다가 눈앞의 세진을 보고 잠시 숨을 덜컥 멈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고 무언가 생각하듯 길게 눈을 내리뜨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시선을 올렸다. 선한 얼굴에 걸린 곧은 눈빛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루마기의 고름을 스르륵 풀었다. 짙은 남색 천이 걷히며 하늘색 셔츠가 모습을 드러내자 감독이 컷이라 외쳤다.

감독에게서 오늘 촬영은 끝이라는 확답을 얻어 낸 도하는 스태프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하며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곧 빠르게 촬영장의 뒷정리가 시작되었다.

도하는 어정쩡하게 걸려 있는 두루마기를 벗어 반납하고 세진에게 다가갔다. 세진은 큐 사인 때부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왜 그렇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

도하가 능청스럽게 묻자 세진이 시선을 거두었다.

“너를 본 게 아닌데.”

“김형우를 보셨어요?”

그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실제로 상대하니 이미지가 잡히는 건가. 조금은 도움을 준 것 같아서 도하의 만족도가 올라갔다.

본격적인 연기는 처음인 세진에게 이것저것 도움이 되고 싶었기에 가능하면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매번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휭 가 버리는 세진 때문에 아쉬웠던 차였다.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 열심히 관찰하고 공부하려는 모습이 보여 기분이 좋았다.

둘은 스태프들이 챙기는 장비를 하나씩 거들어 챙기고는 산에서 내려오며 대화를 이어 갔다.

“하재영이 김형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것도 있고,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주었기 때문도 있잖아.”

“그렇지?”

“그런 사람을 어떻게 10년이 지났다고 못 알아보지? 그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

그와 캐릭터 해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신선했다. 도하가 잠시 고민하듯 “음…….” 하고 입 속으로 소리를 내다가 대답했다.

“10년이면 못 알아볼 만하지. 드라마는 내가 둘 다 연기하니까 똑같은 얼굴이지만 10년이면 사람 얼굴도 휙 바뀌잖아. 너만 해도 고등학생 때랑……. 아, 키만 컸구나.”

세진을 훑어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정말 키가 크고 선이 굵어진 것 외에는 거의 바뀐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20대라서 그런 거겠지?

도하의 시선을 느낀 세진이 잠시 움찔 어깨를 떨다가 팍 인상을 썼다.

“네 얼굴 보고 납득이 갔다는 말이야.”

“잘생긴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구나!”

“하…….”

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앞서가는 세진의 뒤를 뒤처지지 않게 쫓았다. 얼굴 보고 납득이 갔다는 말이 그 말 아닌가? 도하는 의중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만 하면 매번 한숨을 쉬는 이유를 모르겠다.

호텔에 도착하고 장비를 반납하자 스태프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미소로 답하며 어딘가 어수선한 주변을 보았다. 스태프와 배우들 이외의 투숙객이 많은 모양이었다.

멀뚱히 주변을 둘러보다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냐고 세진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는 이미 도하의 근처에서 모습을 감췄다.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허공에 올린 손이 괜히 민망해져 입맛을 다셨다.

도하는 자신이 묵을 객실의 카드 키를 받은 매니저와 함께 땀과 먼지에 찌든 몸을 이끌고 승강기에 올랐다.

“너 여기서는 강세진하고 안 붙어 있는 게 나을 거다.”

“왜?”

“걔네 팬들, 아니지. 사생? 암튼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 호텔에 우글우글해. 괜히 찍히지 말고.”

여름 방학 기간이라고 학생들도 꽤 있더라. 도하는 그렇게 말을 붙인 매니저를 보며 아까 로비에 어슬렁거리던 여성 투숙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돌 팬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어도 소문으로 몇 가지 무서운 일화를 들었다. 전부 세진의 팬은 아니겠지만 괜히 무서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세진 팬들의 별명을 듣고 나서는 더 두려워졌다.

플로어에 도착해 승강기 문이 열리자 한 남성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