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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4화

#2 (5)





하얀 배경으로 들어가 감독의 지시에 따른 고등학생 시절의 형우를 만들어 냈다. 기억을 잃은 후와는 다르게 밝게 그려진다. 애초에 자신이 왜 귀신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위기를 모면할 방법도 알고 있는 시절이니 긴장이나 위기감도 덜하다. 대본에서 과거 부분을 읽었을 때 마냥 선한 얼굴로 그려졌다.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니 강풍기에서 바람이 일어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였다. 맞바람에 눈이 살짝 시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진 몇 장을 포즈를 바꿔 찍고 나니 오케이 사인이 들어와 모니터를 하기 위해 감독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스타일링을 바꾸고 나온 세진도 어느새 감독의 옆에서 사진을 보고 있었다.

“괜찮게 나왔네요. 응, 형우 과거는 이 스타일링으로 합시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사진을 보았다. 이게 정녕 현역 중학생 옆에 서도 될 만한 비주얼인지 구석구석 살폈다. 자신의 얼굴에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편이지만, 나이마저 속일 순 없기에 이 부분만큼은 예민하게 따져 봐야 할 문제였다. 늙었다고 욕먹기 싫으니까.

도하는 조용히 사진을 보고 있는 세진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어때, 아역이랑 붙어서도 고등학생으로 보일 거 같아?”

당장의 걱정은 그것뿐이었다. 평소와 달리 한껏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세진도 진지하게 사진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너 고등학생 때보다 어리게 나왔어.”

“아, 그럼 역시 내가…….”

“노안이었던 거지.”

“허.”

예상치도 못한 세진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도하가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쳐다보자 그는 무표정으로 자신의 말에 긍정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원래 노안이 나중에 동안 되는 거잖아.”

삐진 도하가 주먹으로 팔을 약하게 툭 치자 ‘동안 된 거 축하해’ 하고 비웃듯 말하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마지막까지 대못을 꾹꾹 눌러 박는다.

카메라 앞에 선 세진은 고양이같이 무심하고 새침한 얼굴에서 순식간에 청순한 얼굴이 되었다. 연갈색 생머리와 아주 잘 어울리는 청량한 미소를 짓는데 괜히 얄미웠다.

주연인 도하와 세진의 스타일링 테스트가 끝나자 다른 조연들도 스타일링 테스트에 들어갔다. 도하는 포스터를 찍기 전 잠시 떠 버린 시간에 촬영장 구석에 앉아 다른 배우들을 구경했다. 대기실에만 앉아 있으면 심심할 것이 분명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니 대기실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던 세진도 근처에 앉아서 대본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의자를 조용히 끌고 옆으로 가자 그가 대본을 보던 눈을 거두고 차분한 시선으로 도하를 보았다.

“세진아, 너 진짜 어쩌다 이 드라마 찍게 된 거야?”

역시나 궁금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도하가 또다시 물었다. ‘저번에도 묻지 않았어?’라는 표정으로 세진이 답했다.

“주헌이 동생이 네 팬이라 찍어 보라고 해서.”

덤덤한 말에 도하가 당황했다. 지난번 장난으로 했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지금 한 말이 농담일 수도 있겠지만, 얼굴만 보아서는 농담을 하는지 사실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도하는 한번 눈을 굴리다가 익살스럽게 미소 지었다.

“주헌 씨 동생이 제 팬이니까 한번 만나서 사인을 받아 오게 하도록 드라마를 찍게 했다는 건가요? 그 말은즉 주희 씨는 강세진을 쥐었다 폈다 할 정도의 권력을 갖고 계시다는 건가요? 혹시, 여자 친구?”

세상에! 엄청난 비밀을 알아 버린 사람처럼 입가를 가리며 놀라는 척을 하자 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너 같은 사람들이 루머를 만드는 거지.”

“아니, 신기하잖아! 공식적으로 네가 고사한 드라마가 몇 갠데 고작 그런 이유로 출연을 결정한 게. 주희 씨가 엄청 예쁘거나 엄청 특별한 사람인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걸!”

도하가 실실 웃으며 말하자 대본 끝을 만지작거리던 세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꾸깃 접혔다.

“걔 고등학생이야.”

“어어, 세진아. 네가 그런 취향인 줄은…….”

“아니라고.”

세진이 깐죽대는 도하의 주둥이를 잡으며 미간을 구겼다. 째려보는 눈빛이 살벌했다. 매서운 눈길에 도하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런 화제가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심기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다.

“아니 뭐, 세진이 네가 마음이 바뀌어서 드라마를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이 드라마에 나오는 걸 G.I에서 안 말렸나 궁금하기도 하고오.”

명색이 대형 기획사인데 자회사 최고 인기를 가진 아이돌을 저예산 드라마의 두 번째 주연으로 꽂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노센트 알파는 비주류 장르에 무려 원작이 BL 소설이었다.

도하의 매니저가 걱정했던 것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걱정할 만한 일이 산더미처럼 있을 것이었다. 이미지 소비도 그러했고 시청률 성적표도 그러했다. 이미 곱게 닦아 놓은 강세진이라는 브랜드에 비엘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낮은 시청률이라는 참혹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였지만 로맨스 코미디를 찍으면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어째서 소속사에서 위험 요소가 있는 작품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한 것인지 궁금했다.

신경을 긁지 않도록 얌전히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하자 세진이 잠시 생각하듯 입가를 손가락으로 쓸며 대답했다.

“저예산인 게 문제야? 아니면 장르물이라서? CVM 금토는 장르물 괜찮다고 들었는데.”

약간 포인트가 달랐다. 그런 문제도 있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도하가 눈을 내리뜨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 그게 아니라 비…….”

“비?”

“원작이 비엘이잖아.”

세진은 도하의 말을 듣고도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도하는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눈앞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비엘이 뭔지는 알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들어오기 전에 분명 소속사에서 말해 주었을 터였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돌아온 반응은 의외의 것이었다. 세진의 어처구니없어하는 웃음을 흘렸다.

“우리 팬들, 멤버들 가지고 엄청 엮어. 그게 뭐가 대수라고.”

“그거랑 드라마 찍는 거랑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뭐. 드라마에서 뭐가 나오긴 해? 다 각색돼서 우정 말곤 보이는 것도 없던데.”

세진은 대본을 팔랑팔랑 흔들며 시원스럽게 답했다. 이는 도하가 처음 대본을 봤을 때도 느꼈던 부분이었다. 원작 팬이 아닌 이상 둘이 본래 커플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만한 낌새는 전혀 없어 보였다.

대본을 본 소속사에서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판단을 했는지 특별히 제제를 두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이미 드라마 출연을 했던 그룹의 막내 견의가 로맨스 코미디로 이름을 알리자 세진의 장르물 도전 역시 새로운 팬층을 얻을 수 있을 기회로 보고 긍정적으로 지원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화에 게스트로 등장하는 배우 소하연이었다. 당연히 일방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주인공이 아닌 게스트 출연도 해 보고 싶다고 꾸준히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세진의 첫 주연 드라마를 밀어주고자 했던 회사 측 입장과 맞물려 단역 출연이 성사된 것이다.

그뿐일까. 회사의 얼굴인 세진의 드라마가 망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므로 홍보는 물론 OST까지 G.I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무려 마슈크의 메인 보컬인 균수가 삽입곡을 부르기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 역시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그는 한참 드라마를 고사하던 세진이 처음으로 들어간 드라마인 것이 신경 쓰여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세진의 존재만으로도 큰 홍보 자체인데 지원도 해 준다니. 역시 대형 기획사는 관점이 달랐다. 드라마가 열리면 사그라들 것이 분명한 의혹들까지 이미 파악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얘기를 줄줄이 듣던 도하가 감격에 못 이겨 세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 세진아! 진짜 복덩이! 어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끌어안고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기분을 꾹 눌렀다. 상상도 못 할 일이 자꾸 벌어지니 무서울 지경이었다. 바로 몇 주 전만 해도 호영에게 역할도 빼앗기고 포스터 속 세진과 자신이 너무나도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눈앞에 세진이 있고 호영에게 빼앗긴 것보다 더 큰 것들이 자꾸자꾸 굴러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이 드라마의 복덩이네. 내가 있어서 세진이 네가 여기 온 거잖아.”

조금 뻔뻔스러운 말이었지만 도하는 당당했다. 세진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고 즐겁게 흔들며 자신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매니저한테 자랑하겠다 말했지만, 세진은 그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대본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