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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8화

#2 (9)





“그래도 찍는 재미가 있지 않아요? 자연에 동화되는 느낌!”

제일 열심히 구른 흙투성이의 도하가 그렇게 말하자 주변에서 허허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맞는 말이었다.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했다. 주변에 계곡이라도 있었다면 쉬는 시간에 놀기라도 했을 터였다.

“도하 씨는 출연작 대부분이 웹 드라마였어요?”

“네. 아니면 영화 단역으로 주로 나왔어요.”

“아, 저도 영화 단역 많이 했었는데! 혹시 최근에 찍은 영화 있어요?”

“곧 개봉하는 한송덕 감독님 영화에 한 1분 정도 나와요.”

“우와. 이번에 개봉하는 거면 ‘고요’ 맞죠? 홍원 선배님이랑 강소찬 선배님 나오는 거 아니에요? 김근태 씨가 주인공이고!”

같은 처지의 배우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이런 얘기들이 많았다. 어디에 나왔고, 어느 감독님이 무섭고, 어느 제작사가 힘이 있고, 자신들이 이렇게 노력하지만 허들이 높다는 얘기. 무명 배우들의 처지는 다 비슷해서 어떡해서라도 한 작품이라도 더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는 매일이다. 웹 드라마를 꾸준히 나왔던 도하는 그나마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도하 씨 오디션으로 들어온 거죠? 오디션장에서 본 것 같은데.”

신민기 역의 양효민이 물었다. 그는 오디션장에서 도하의 앞 번호였던 사람이었다.

“네, 맞아요. 제가 효민 씨 다음 순서였어요. 와!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도하 씨가 유난히 기억에 남기는 했어요.”

“아, 잘생겨서 그런가요?”

당돌하게 말하는 도하의 모습에 효민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네 맞아요.” 하고 대답했다. 농담 같은 분위기에 다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신민기로 오디션을 봤는데 어쩌다 보니 김형우가 되었네요.”

“와아, 순식간에 주인공! 근데 저는 도하 씨, 형우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제 얼굴이 그렇게 까칠해 보여요?”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좀 그래 보여요. 입 열면 와장창 느낌이 좀 나고.”

“와장창이라니…….”

자주 듣는 말이긴 했지만 들을 때마다 웃겼다. 얼굴하고 말하는 게 그렇게 안 어울리는 걸까. 정작 도하 본인은 잘 못 느꼈다. 애처럼 군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단독 촬영이 끝난 세진이 감독에게 확인을 받는 것이 보였다. 따가운 햇볕을 받은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고개를 들자 드러난 고운 얼굴에 박힌 투명하고 신비로운 갈색 눈동자가 빛을 머금은 것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조차 그림이 따로 없다. 멀리서 그를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화제를 세진으로 바꿨다.

“강세진 씨는 굉장히 의외이긴 해요. 이 드라마 나오는 거.”

“음, 다들 생각하는 건 똑같네요. 저도 리딩 현장에서 처음 보고 엄청 놀랐어요.”

“그죠. 저는 소식 듣고 봤는데도 믿기지 않더라고요.”

보통 사람들이 세진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비슷했다. 마슈크의 강세진. 인기 아이돌. 왕자님 이미지. 성실하고 조용함. CF 스타. 연기 활동은 안 함. 특별한 친분은 멤버들 이외에 없음. 예능에 얼굴을 자주 비치지 않는 신비주의 연예인.

그런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무명 배우들로 채워진 드라마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언밸런스였다.

“세진 씨 등장으로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요. 처음에도 제 입장에선 그렇게 나쁘진 않았는데, 지금은 확신에 찬 느낌이잖아요. 감독님이 특히.”

“하하하, 그 느낌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이해도 가잖아요.”

도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이 제일 신났다. 그리고 신날 만했다. 드라마를 살려 준 구세주가 아니던가.

“도하 씨는 세진 씨랑 친한 거 맞죠? 대본 리딩 때도 그렇고 포스터 촬영 때도 그렇고 자주 대화하는 것 같던데.”

“아, 네. 고등학생 때 알던 사이라서 그래요.”

그 말에 우와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도하는 그 반응이 웃겨서 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어 버렸다. 그러자 아래에 있던 스태프들이 도하 쪽을 올려다보았다. 세진과 감독도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곧 신경을 끄고 진지하게 다시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 조금 힘드셨겠다.”

이렇게 이목을 끌 줄 몰라서 당황한 도하가 입을 손으로 막으며 죄송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단비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제 친구가 갑자기 확 떠서 유명 배우가 됐을 때 엄청 힘들었거든요. 분명 그 애가 노력한 것도 맞고 능력이 있는 것도 맞는데…… 뭐랄까, 허탈함? 나도 노력을 이렇게 하는데 안 되네, 운이 안 따라주네 하고 자꾸 땅 파게 되고.”

비단 배우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무엇을 하든 성과가 나오는 일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면 더욱 그러했다.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는 만큼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것 또한 사실이고 인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업계에서 운이란 중요했다. 노력한다고 모두에게 똑같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분은 알아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니까 오는 무력감. 근데 세진이나 다른 친구들이 유명해지는 건 힘들기보단 좋았어요.”

도하가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 한번 연기를 그만뒀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세진이가 TV에 나오는 걸 보고 다시 연기자에 발을 들이게 되었거든요. 잘나가는 세진이 보면 부럽기야 했지만 그만큼 좋은 자극이 됐어요.”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어제 팬들한테 쫓기는 모습은 부럽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가 어린 시절 어떻게 노력해 왔는지 가까이에서 봤기에 기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정말 꿈을 이룬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일을 하면서 주변에 이런 존재를 갖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한발 더 내딛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

도하의 말이 끝나자 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친구를 부러워했지만 결국 축하해 주었고, 그만큼 자극을 받았기에 허탈해하면서도 꾸준히 이 업계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너무 솔직했나 싶어서 등이 간지러워진다.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나려는데 효민이 “도하 씨, 뒤에.” 하며 눈짓을 했다. 뒤를 돌아보니 세진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도하는 깜짝 놀라 가슴을 쓸었다. 나쁜 말은 하나도 안 했는데 이상하게 범행을 들킨 범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등장하지 마. 나 네 욕 안 했어.”

드라마로 치면 긴장감을 위해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될 법한 극적인 등장이었다.

“알아. 팬들이 보낸 커피 차 왔어요. 내려가 보세요.”

세진은 도하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효민과 단비에게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스태프들에게도 친절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도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턱짓으로 너도 내려가 하고 말했다.

취급이 이렇게 다르다니. 도하가 내려가면서 나도 친절하게 대해 달라고 작게 투정을 부렸지만, 세진은 가볍게 무시했다.

마슈크의 마크와 세진의 사진이 거대하게 박힌 커피 차 근처에는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커피나 음료수를 마시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참 더울 때라 그런지 대기 줄이 길었다. 사이드 메뉴도 다양하게 있어서 배가 고픈 이들은 손에 핫도그며 와플이며 따끈해 보이는 음식들을 들고 끼니를 때웠다.

커피 차 옆에는 세진의 매니저가 팬 두세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커피 차를 보낸 팬 대표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로 꾸벅꾸벅 인사를 하다가 세진을 발견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화들짝 놀랐다. 우물쭈물하며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세진에게도 꾸벅 인사를 했다.

어제의 팬들과는 참으로 많이 차이가 났다. 모두 저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는데 손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도하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들고 선 세진이 보였다. 어느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도하가 고맙다고 말하며 받자 그는 반응도 없이 휙 팬들에게로 다가갔다. 도하는 손에 쥔 얼음이 가득 담긴 차가운 음료를 바라보았다. 새치기해서 받아 온 건가. 하기야 저 커피 차의 주인은 세진이나 다름없었다.

도하는 눈으로 그를 좇았다. 세진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걸자 팬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가방에서 A4 용지와 매직을 꺼냈다.

“음, 약간 그거 같다. 병 주고 약 주고.”

사생이 병 주고, 팬이 약 주고.

빨대를 쪽 빨자 시원하고 달달한 맛이 입 안을 적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복숭아 아이스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