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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2화

#2 (3)







“너 진짜 드라마는 어쩌다 찍는 거야? 나한테는 ‘아이돌 이용하지 마라! 불쾌해!’ 이랬으면서 본인은 아이돌 이용해서 배우하시네요?”

자연스럽게 회의실을 빠져나와서 건물 복도를 걷는 중 도하가 불쑥 물었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은 것이지만, 놀려 주고 싶은 마음도 살짝 있었다. 채 숨기지 못한 장난기에 세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그래서, 싫어?”

“아이고, 아니죠. 세진아, 난 너 보자마자 속으로 환호했어. 후광이 보이더라니까?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환호하진 않고 당황만 했다. 하지만 도하는 세진의 심기가 뒤틀리지 않게 그의 손을 양손으로 고이 붙잡고 아부를 떨었다.

지금 강세진은 존재만으로도 이 드라마의 빛이었다. 비유하자면 언제 침몰할지 모를 위태위태한 배를 다시 일으킨 고급 진 대형 돛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하는 이 작은 배에 갑자기 대형 돛을 달린 이유가 궁금했다. 소속사에서 시킨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데 세진은 덤덤히 도하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전이라면 확 빼 버렸을 텐데 얌전히 붙잡혀 있는 게 신기해 잠시 보고 있자니 한 번 더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혹시…… 나 보러 온 건가 해서!”

“너는 참, 여전하네.”

“여전해서 좋지 않아? 나도 너 여전해서 좋은데.”

세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야?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묻자 잡힌 손을 휘휘 털어 버리고 몇 걸음 앞을 휘적휘적 걸어갔다. TV에서 여러 번 봤지만 실제로 보니까 다리가 긴 것이 더 실감이 난다. 도하는 기다란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 옆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근데 세진이 너 엄청 컸다. 예전에는 이만했잖아.”

도하가 자신의 쇄골 부근을 표시하며 말하자 세진이 욱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니지, 한 요만했나? 어쨌든 엄청 큰 건 맞잖아. 나랑 비슷하네. 그렇게 소식해서 언제 크나 걱정했는데.”

“참나.”

기억 속 세진은 도하보다 한 뼘은 작았다. 몸 선도 가늘었고 아이돌에 최적화된 가냘픈 미소년 이미지였다. 먹는 양도 도하의 절반이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번 이러다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도 들었는데 의외로 단 한 번도 쓰러진 적 없는 강철 체력이었다.

지금은 그룹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큰 것 같았고, 어깨도 넓어졌다. 도하와 나란히 섰을 때 눈높이가 같은 걸 보면 그 당시랑 이미지가 많이 변하기는 했다. 언제 이렇게 자랐니. 친척 아저씨의 마음으로 바라보자 세진이 어이없어했다.

옆에서 쫑알쫑알 못다 한 이야기를 하며 세진을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괜히 내려왔군. 현재 차도 매니저도 없는 도하는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다.

“어쨌든 반가웠어, 세진아. 나는 지하철 타러 간다. 촬영 때 보자!”

주차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세진의 등에 대고 외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돌아보면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고 했는데 다부진 등만이 그를 배웅했다. 안 돌아보려나? 도하가 심통 난 표정을 지으려던 순간, 세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가는데?”

“너 스케줄 없어? 데려다주게?”

“어.”

“그럼 우리 집까지 가자.”

“뻔뻔하네.”

도하가 꼬리를 흔들며 한걸음에 달려오자 세진이 픽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자신의 얘기만 계속하던 도하가 이번에는 질문왕이 되어 이것저것을 물어 왔다. 세진은 운전 중에 산만해진다면서 핀잔을 주긴 했지만,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대부분 과거에 좋아했던 것이나 싫어했던 것을 지금도 좋아하고 싫어하느냐는 질문이나 그룹 활동에 관한 질문이 많었다.

세진은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힘들어도 만족도는 높아 보였다. 도하는 어릴 적 꿈을 이룬 사람은 이렇게 반짝거리는구나 하고 느꼈다.

“아이돌들은 10년 정도 같이 숙소에서 사는 줄 알았는데 세진이 넌 벌써 탈출했구나.”

“숙소 옮기면서 나온 거야. 얼마 안 됐어. 그리고 어떻게 걔들을 데리고 10년을 같이 살아.”

징글징글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기야 조용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세진이 제각각 삶의 방식을 가진 남자 아이들과 우글우글 모여 사는 게 힘들만 했다.

도하와 함께 있었을 때는 막내였지만 지금 그룹에서는 맏형이 된 세진은 동생들 때문에 고생이 많은 듯 보였다.

“너희 그룹 애들 다 동생이랬지? 막내와는 다섯 살 차였나? 데뷔했을 때 네가 제일 커 보여서 놀랐는데.”

“데뷔를 군대 다녀온 후에 해서 더 그래 보였을걸.”

“어, 너 군대도 갔다 왔어?”

“그럼 스물두 살 때까지 얌전히 연습만 하고 있었게. 선배 그룹 데뷔 잡히고 바로 갔어. 어차피 한동안은 새 그룹 데뷔 안 시킬 테니까.”

군대 다녀오면 인상 변한다고 싫어하지 않나? 아이돌 중 데뷔 전에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별로 없다 보니 신기했다.

“좋은 선택이었네. 데뷔하고 바로 떴잖아. 너는 군백기 없이 활동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다른 애들은 몇 년 후면 가야 하지만.”

“아, 그때의 솔로 활동을 위해 연기에 도전하는 건가요?”

세진이 속해 있는 그룹은 데뷔 운이 꽤나 좋았는데, 다른 대형 기획사의 그룹들이 하나둘씩 사건 사고가 터지면서 팬들의 환승이 빠르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팬들은 기존의 아는 얼굴들보다는 신선함을 원했다. 그리고 그 세대교체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막 데뷔한 마슈크였다.

자본이 있는 대형 기획사의 신인 남자 아이돌 그룹은 혼란스러운 가요계에서 제일 팬을 흡수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마스크가 신선했고, 성장시키는 맛도 있고, 무엇보다 아직 연예계에 때 타지 않은 이미지가 좋았다. 게다가 실력 또한 갈수록 높은 퍼포먼스와 가창력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장기적으로 이끌기에도 손색 없었다. 적어도 같은 선의 아이돌과 비교해서는 좋은 실력이었다.

모든 것을 평균 이상으로 올리기까지 무수한 땀을 흘렸겠지만, 결과적으로 시기를 잘 탔기 때문에 지금의 톱 아이돌이 된 것이다.

“TV에서 네 얼굴 봤을 때 엄청 반갑고 좋더라. 실제로 보니까 더 좋고.”

도하는 TV에서 세진의 얼굴을 처음 봤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영화 스태프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기였다. 쏟아지는 명함들을 보며 다시 배우의 길에 발을 들일까 말까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우연히 TV를 보았다. 공중파 음악 방송이 나오고 있었는데 짧은 순위 발표가 끝나고 화면이 데뷔곡으로 1위를 차지한 마슈크를 비추었다. 머리 위로 반짝이 꽃가루가 휘날렸고 어리바리한 멤버들 사이에서 그들과 똑같이 놀란 표정의 세진이 보였다.

말 그대로 반갑고 좋았다. 몇 년간 같이 지냈던 친구를 봐서 반가웠고, 그렇게 바라던 데뷔를 해서 기뻤고, 순식간에 인기 아이돌로 등극해서 자랑스러웠다.

머리에 가득 붙은 꽃가루를 땔 생각도 못 하고 마이크를 양손에 꼭 쥐어 횡설수설 수상 소감을 말하는 모습에 가슴 속이 뭉클했다. 그리고 무언가 숨겨 두었던 스위치가 눌린 기분이었다. 도하가 오디션을 다시 보게 된 계기였다.

‘세진이 너는 꿈을 이뤘네. 이제 나도 다시 도전해야지.’

그때를 회상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있는 세진을 바라보았다. 그림 같은 옆모습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상기된 뺨을 하고 놀라던 그때와 비교되었다.

신기했다. 아직 그만큼 성공은 못 했지만 다시 만났다는 게.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에 불과한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또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여전히 그때와 변함없이 대한다는 게. 동시에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무시하던 근태 그 나쁜 놈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도하는 머릿속에서 얄미운 근태에게 꿀밤을 먹이곤 장난스럽게 웃으며 질문했다.

“너는 나 봤었어?”

“아니. 전혀.”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도 빨리 나온 대답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빈말이라도 해 줘.”

“그래. 뭔가 봤어, 뭔가.”

세진이 표정 하나 안 변하며 대충 맞춰 주는 말을 하는 사이 도하가 사는 원룸빌에 도착했다.

자연스레 안전벨트를 풀고 가방을 챙기자 세진이 뒷좌석에서 무선 공책 하나와 두꺼운 매직을 꺼내어 도하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도하는 갑자기 나타난 물건들과 여전히 무표정한 세진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여기 사인 좀 해 봐.”

“나 아무 데나 사인 안 하는데. 사기당할지도 모르잖아.”

“내가 사기 친다는 말이야 지금?”

“아니, 어…… 할게. 근데 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매직 뚜껑을 이로 물고 열어 흰 종이에 꽉 찰 만큼 크게 사인을 적었다. 세진이 어디 사기 칠 때 써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왜 필요한 건지 의아했다.

“주헌이 동생이 네 팬이라 사인받아 오래.”

주헌은 마슈크의 멤버였다. 그룹 내 둘째였고 세진보다 두 살 어렸다. 오, 내 팬이라니. 도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변두리에서 열심히 활동한 보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