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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1화

#2 (2)





세진의 연기는 도하가 기억했던 것만큼 발 연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돌 출신 배우 중에서는 잘하는 편에 속했다. 또 대본 리딩에 꽤 진지하게 임했다. 그것이 의외였기에 한 번씩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세진이 감독의 피드백을 그대로 대본에 적어 내렸다. 자신에게 온 피드백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에게 간 피드백까지 꼬박 적은 탓에 대본이 검은색 문자로 빼곡했다. 도하는 그것을 보고 기함했다. 저래 가지고 뭐가 자기한테 온 피드백인지 구별이 되나 싶었다.

도하는 자신이 쓰던 삼색 볼펜을 세진의 대본 위에 올렸다. 세진이 뭐 하는 거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다른 배우가 리딩 중이었기에 말은 안 하고 빨간색을 누른 후 아까 세진이 받은 피드백들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러면 본인 것이 한눈에 들어오겠지.

그 모습을 본 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쓰던 검은색 볼펜을 도하에게 주고 삼색 볼펜을 받아 들었다. 조용한 물물 교환이었다.

“세진아, 세진아. 슈퍼스타 강세진.”

대본 리딩이 끝나고 나서야 도하는 잠그고 있었던 입 지퍼를 열었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터져 나온 목소리가 통통 튀어 올랐다. 방정맞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짐을 챙기던 세진이 단정한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고개를 돌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나 진짜 깜짝 놀랐어!”

“뭐가 그렇게 놀라운데?”

자연스럽게 나오는 퉁명한 대답에 도하의 표정이 헤벌쭉하게 변했다. 몇 년 만에 만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몸을 앞으로 숙여 반듯이 앉은 세진의 얼굴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웃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네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도 그렇고! 와, 맨날 TV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너는? 너는 나 안 반가워?”

여기 왜 있냐고 묻기도 전에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었지만 이내 뭉게뭉게 피어나는 기쁨이 그것을 집어삼켰다. 도하는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교를 부렸다. 세진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반갑겠냐, 어? 반갑겠냐고.”

세진이 까칠하게 대답하며 도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툭 쳤다. 회의실에 들어온 시점부터 내내 조용하고 예의 있게 굴던 세진이 한순간에 고등학생 남자아이 같은 모습으로 돌변했다. 방송에서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세진을 힐끔힐끔 보던 주변 사람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너 우리가 어떻게 헤어진 건지 기억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어머, 세진아. 우리가 그렇게 열정적인 연인 사이였었니?”

“아. 윤도하…….”

“하하하!”

세진의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지자 도하가 더 크게 웃었다. 여전한 반응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가 화가 난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멋쩍기도 했다.

도하는 고등학교 3년간을 꼬박 망해 가는 중소기업의 연습생으로 살았다. 그것은 세진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연습생이 된 세진은 먼저 소속돼 있던 도하와는 한 살 차이로 함께 아이돌 수업을 받았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오디션을 보았는데 갑자기 아이돌을 하라니! 도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사기 계약이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애초에 희망하는 진로가 달랐던 터라 둘은 참 많이도 삐걱거렸다. 하지만 지지고 볶고 말다툼을 벌인 끝에 결국은 친해졌다.

빠른 생이었던 도하는 세진과 아예 말을 놓고 친구를 먹고 자신과 학년이 같은 근태를 낀 개족보를 완성했다.

손발을 맞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때는 다 잘될 줄 알았다. 실제로 셋이 속한 회사는 비록 중소였어도 선배 그룹이 나름 인기를 끌어 차기 그룹에 투자도 많이 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모두 기대를 하며 준비했었다. 이미 꾸려진 팀으로 유대감을 쌓으며 힘들지만 즐거운 매일을 지냈다.

하지만 선배 그룹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회사는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들을 살려 보려고 차기 그룹에 대한 투자도 빼돌렸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소속사도 연관되어 있다는 폭로가 이어져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데뷔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한둘씩 연습생이 빠져나갔고 근태 또한 그 시기에 회사를 떠났다.

그런 암흑기 같은 때에 세진은 지금 소속된 대형 기획사 G.I 엔터테인먼트에 캐스팅되었다. 도하는 그 사실을 알고 세진에게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다시없을 좋은 기회였으니까.

도하야 원래 배우가 목표였기 때문에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세진은 달랐다. 그는 정말 아이돌을 하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어릴 때 하루라도 빨리 나가서 자리를 잡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세진이 이미 캐스팅 담당자와는 말을 끝냈다며 도하에게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도하는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이해가 안 가 어리둥절하면서도 선뜻 그 손을 잡았다.

잡았지만…….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잠수를 타?”

“아이, 세진아. 내가 잘못했지 그럼. 다 내 잘못이야. 하지만 나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

운이 안 좋았던 것은 그때가 시작이었던 모양이다. 이전 소속사를 나오고 G.I 엔터테인먼트의 본사에서 만나기로 한 날, 악재가 잇따라 일어났다.

첫 번째로는 도하 본인이 눈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두 번째로는 그 사고로 몇 년간 쓰고 있던 구형 핸드폰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으며, 세 번째로는 하나뿐인 가족이자 그의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사고를 당한 다음 날, 병원에서 눈을 뜬 도하는 바로 세진에게 연락하려 했다. 하지만 핸드폰이 없으니 바로 전화를 걸 수 없었고, 친구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외우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니 공중전화도 무용지물이었다. 도하의 모든 인관관계는 사고를 기점으로 모두 리셋 되었다.

몇 달을 어머니와 서로서로 돌봐 주며 지내다 겨우 틈이 생겼을 즈음, 딱 한 번 놀러갔던 세진의 집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근데 너희 집 이사 갔더라. 연락할 방법이 없네? 그치?”

“…….”

“진짜 일부러 잠수 탄 거 아니야. 요놈의 핸드폰, 아니, 내가 네 전화번호를 못 외운 게 잘못이지!”

세진은 도하네 집에 놀러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찾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연락이 끊기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었다.

오디션을 보러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일정 시기가 아니면 공개 오디션을 열지 않는 G.I 엔터테인먼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렇다고 세진을 만나기 위해 소속사 건물 앞에 죽치고 앉아서 사생들처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셨기에 돌봐 드려야 하는 것도 있었고, 고졸인 그를 기용해 줄 직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새 출발을 도와줄 소속사를 구하는 일은 사치였다. 허공에 뜬 꿈을 접고 현실을 걸어갈 때였다. 어머니가 쉬는 동안 도하는 가장이 되어야 했으니까.

모든 인연이란 갑작스럽게 끊어지기 마련이니 그중 하나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이른 스물이 시작되는 봄의 일이었다.

사건의 경위를 술술 얘기하자 굳어 있던 세진의 표정이 스르르 풀려 나갔다. 그 틈을 노려 어깨를 살짝 부딪치며 물었다.

“그것 때문에 그동안 나한테 화가 나 계셨어요?”

“네 존재를 잊고 열심히 살았지.”

“그럴 줄 알았다.”

하기야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무심한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을 보아 반가운 모양인지 세진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긴 대화를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빈자리가 늘었다. 도하와 세진도 급하게 짐을 챙겨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했다.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던 스태프 한 명이 ‘아는 사이셨나 봐요.’ 하고 조용히 묻자 두 사람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에 감독이 ‘그럼 호흡 잘 맞겠네!’ 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예상치 못한 친분에 기분 최고조까지 오른 것 같았다.

도하가 주변을 돌아보며 일행을 찾았다. 정군과 매니저가 도하 쪽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매니저는 의외라는 얼굴로 도하와 세진을 번갈아 보았다. 마슈크 강세진이 등장한 것도 의외였지만 둘이 꽤나 친근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것도 그러했다. 당장 작년에 근태와 도하의 엇갈린 시선을 봐서 그런지 더욱 신기했다.

정군은 리딩 이후로 따로 스케줄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매니저는 그의 뒤를 따르며 도하에게 조심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도하는 열심히 하라고 정군의 어깨를 토닥여 준 후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문 앞에는 하연과 세진이 서로 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스포트라이트를 켠 것처럼 환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던 도하는 옆을 돌아보는 하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싱긋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세진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같이 가게?”

나 기다린 건가? 크게 뜬 눈이 곡선을 그렸다. 도하가 작게 미소 지으며 묻자 그가 자신의 머리를 어색하게 헝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