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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7화

#1 (7)





매니저는 곧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을 꺼내며 급하게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작아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도하는 MC가 다시 자신에게 말을 걸자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도하 씨부터! 마지막으로 시청자 여러분께 한마디 해 주세요.”

“아, 옛날에 인터넷 소설 보신 분들 많이 계실 텐데요. 이번 드라마가 딱 그때를 추억할 수 있을 만한 내용입니다. 어떤 느낌인지 다들 아시죠? 네. 오글오글하고 간질간질한 그런 느낌입니다. 어째 주연들이 다 성인이어서 교복이 안 어울릴 줄 아셨을 텐데, 다들 그때 그 시절을 경험한 세대여서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촬영에 임했더니 회춘하지 않았어요? 하하. 재밌는 작품이니까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생방송이 끝나고 1화 스트리밍이 시작되었다. 다 같이 앉아서 실시간 반응을 확인하기로 했기에 가만히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1화가 올라오자 시청자 수가 두 배로 더 늘었다.

편집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궁금해서 오프닝 영상을 진지하게 보는데 긴 통화가 끝난 매니저가 돌아왔다.

“도하야, 잠깐만.”

“네? 네, 네.”

스태프들이 까 놓은 과자에 뻗은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매니저가 그대로 끌고 갔다. 도하가 끌려가면서 아쉬운 얼굴로 과자를 보자 은하가 약 올리듯 집으려던 과자를 들어 흔들었다. 몹시 얄미운 모습이었다.

매니저는 어떤 중대한 얘기를 하려는지 아예 스튜디오 밖 복도로 나왔다. 소란스러운 안쪽과는 다르게 지나가는 사람 수가 별로 없어서 조용했다. 도하는 한 번에 소음이 사라지니 괜히 어색해 잠시 귀를 만졌다.

“저번에 봤던 오디션 말인데.”

“네. 그 정군이랑 같이 본 오디션?”

“그래, 그거.”

도하 자신에게는 만족스러운 오디션이었으나 부족한 점을 지적받았던 것 때문에 좋은 답은 안 나올 것 같았다. 떨어져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 좋은 기회였던 것은 확실했다.

“떨어졌다고?”

이제는 뭐 당연한 듯 그런 말이 나온다. 담담한 말에 매니저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니저의 반응을 보아하니 떨어진 게 맞는 듯했다. 알았다고 끄덕이며 다시 스튜디오로 들어가려던 도하는 한숨 끝에 들리는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붙었어.”

“진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어깨를 붙잡자 매니저가 아픈 듯 인상을 썼다.

“아. 미안, 미안.”

도하가 어색하게 손을 떼고 가볍게 털어 주며 재차 물었다.

“붙었다고?”

“그래, 붙었는데…….”

“근데 왜 한숨을 쉬어! 떨어진 줄 알았잖아요!”

도하의 목소리가 붕붕 떠다니기 시작했다.

붙었다니! CVM 드라마 조연이라니! TV 출연이라니! 도하가 매니저의 양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적어도 매주 한 번 이상, 또 1분 이상 TV에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은하가 말했던 것처럼 웹 드라마 주연보다 TV 드라마 조연이 더 끌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대본 구해 줘서 고마워! 형이 오디션 보라고 해서 내가 붙었어! 다 형 덕분이야!”

신이 난 아이같이 구는 도하를 한참 보던 매니저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다시 말을 쏟았다.

“신민기가 아니야.”

“어? 그럼, 다른 단역인가? 게스트?”

단역이면 어떠하리. TV에 나오면 됐지. 단발성이어도 좋았다. 오디션에 붙었다는 말은 적어도 한 회에는 출연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퇴마물이니까 매회 게스트가 존재할 터였다. 그중 한 명이어도 좋았다.

당장 도하의 머릿속 긍정 회로는 TV 드라마에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형우.”

“엉.”

“김형우 역이라고.”

“어?”

“그니까, 주인공 역에……. 아휴. 내가 정말 걱정이다.”

벙한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무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도하는 주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강아지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래.”

“왜?”

“왜겠어.”

“잘생겨서?”

“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고가 부럽다, 야.”

말을 그렇게 해도 절반은 맞는 말이긴 했다. 매니저가 벽에 기대어 여전히 자신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는 도하를 관찰했다. 주연이라고 하면 더 신나 할 줄 알았는데 어리벙벙한 기색이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붙었다는 말을 곱씹었다.

“주연으로 캐스팅하려던 사람들이 다 퇴짜 놓으니까 너를 골랐지.”

“아아. 그렇구나. 어우, 놀래라.”

나도 알지 못하는 숨겨진 매력이라도 발견하신 줄 알았네. 도하가 아직 실감이 안 난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매니저가 눈썹을 구기며 인상을 썼다.

“속 편한 소리 나오네. 지금 너 총알받이 된 거야. 화제성 없어도 무명인 네 탓, 시청률 안 나와도 무명인 네 탓. 재미없어도 무명이 주연이라 힘 뺐다는 소리 나오고, 아무것도 안 해도 원작 팬들한테 욕먹고. 원작 얘기 나오면 한국에서 동성애 드라마가 웬 말이냐며 기독교다 학부모회다 난리 칠 것까지 다 너한테 돌아올 거야.”

섬뜩한 내용을 격양된 목소리로 줄줄 내뱉는 매니저에 도하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듣네요.”

“그래. 나는 너 조연으로 보냈으니까. 조연이면 아무 상관없거든. 그 제작진도 아주 도박이지, 도박. 인지도 없어도 윤도하 얼굴 믿고 막 던져 보는 거야.”

이래저래 난항을 겪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주연 자리를 내줄 줄은 몰랐다. 원했던 배우들이 줄줄이 거절하니 어지간히 속이 탄 모양이었다.

무명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명품 감독들은 간혹 자신의 작품을 시험해 보기 위해 무명배우를 주연으로 두고 작가 놀음, 감독 놀음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소수의, 시청자로 하여금 ‘이 감독이랑 이 작가, 새로 작품 하네?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을 만드는 유명한 감독과 작가의 경우에만 해당했다.

그런 면에서 ‘이노센트 알파’의 감독과 각본가는 유명하지 않았다. 그런 류가 아니다. 작품에 자신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도박을 던진 것인지. 어느 쪽에 가까울까 생각하면 당연히 후자다.

매니저의 말을 들으며 침착하게 눈을 굴리던 도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파트너, 하재영……? 그 역은 누군데요?”

“몰라. 네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묻지도 못했다. 정군이. 그래, 정군이한테도 연락해야지. 정군이도 붙었으니까. 하여튼 이따, 나중에 다시 회사 가서 미팅 좀 하자.”

매니저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계산기 두드릴 시간도 모자란데 정군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고 스케줄도 새로 짜야 했다. 도하는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다가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어느새 1화가 끝나 댓글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던 은하가 도하를 발견하고는 손에 과자를 한 움큼 쥔 채 다가왔다. 그리고 빈손에 과자를 쥐여 주며 장난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녀는 아까처럼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걱정되어 어깨를 가볍게 부딪쳤다.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영혼이 나갔어요?”

“내가 총알받이가 됐대.”

많은 것이 생략된 대답에 은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군대 다녀온 거 아니었어?”



***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도하는 매니저 눈치를 살피며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사실 도하는 긍정적이었다. 조연 역이라도 붙으면 좋겠다고 빌었는데, 갑자기 덜컥 TV 드라마 주연이라니. 이런 기회가 정말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다시없을 이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또 설령 드라마가 망한다 하더라도 웹 드라마 주연과 TV 드라마 주연은 입지부터가 달랐다. 힘든 시기가 되겠지만 잘만 마치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올 것이다.

하지만 매니저는 걱정이 더 컸다. 누구보다 도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바라 온 그였지만 이 드라마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욕을 먹고 시작하는 데다 드라마가 잘 되든 못 되든 따라오는 후폭풍이 클 것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매니저가 양손 엄지로 미간을 꾸욱 누르던 순간, 회의실 문이 열리며 홍보 팀 실장이 들어왔다. 그 역시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도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음. 일단 도하 씨, 주연 축하해.”

“네, 감사합니다.”

홍보 팀 실장은 손깍지를 끼고 가볍게 웃었다. 오래 봐 왔던 도하가 드디어 제대로 뭍으로 나온 것이 진심으로 기꺼웠다. 물론 그의 목소리에도 걱정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일단 캐스팅 기사는 그쪽에서 먼저 냈어요. 도하 씨 어제 웹 드라마 1화 나왔잖아요. 그거랑 엮어서 냈더라고요. 그리고 또…… 음. 이거는 됐다. 도하 씨는 SNS 안 하니까 이전에 찍은 웹 화보를 써서 기사 좀 낼게요.”

“반응은 어때요?”

“당분간은 안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CVM 드라마라 생각보다 기사가 크게 났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관심을 가져 주는 게 고마울 따름 아니겠어요?”

안 좋은 반응이 많더라도 일단 관심을 끄는 것이 중요했다. 호기심에라도 리모컨을 쥐게 만드는 것이 시청률과 화제성을 올리는 길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