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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8화

#1 (8)





“아직 상대역, 아니 하재영 역은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에요. 유명 연예인 이름 따와서 물망 중이라는 기사가 줄줄이 올라오더라고요. 일관되는 이름은 없었고요. 거기에 도하 씨 이름도 같이 오르니까 홍보도 되고 욕도 먹는 중이네요.”

“욕먹는다는 말을 굉장히 가볍게 하시네요.”

“응, 근데 어쩔 수 없어요. 메인이 무명인 도하 씨인데 서브가 유명 연예인이다 뭐다 하면 자연스럽게 악의적 관심이 쏠리게 되잖아요?”

“역시 총알받이 맞구나.”

총알받이 역할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덤덤한 도하의 반응과는 달리 매니저는 착잡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던 홍보 팀 실장이 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임 실장님 표정 좀 푸세요. 이거 도하 씨한테 굉장히 좋은 기회잖아요. 중국이나 일본 쪽에서는 이미 이런 비엘, 브로맨스 작품으로 한 번에 뜬 배우들도 많아요. 한국 시장에서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보단 나을 거예요.”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여러 번 시도가 된 장르였다. 당장 옆 나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시도가 되었다. 필터 없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동성애를 그린 드라마가 나왔고 그쪽으로 관심이 많은 여성 시청자들을 끌어모아 크게 성공한 사례가 몇 있었다.

아직 전례가 없는 한국에서는 그 시도가 어려울 수밖에 없지만, 이 드라마는 원작이 어찌 됐든 브로맨스였다. 사랑을 빼고 우정으로 각색한 데다 메인 스토리 또한 확실하게 존재한다. 원작을 모르는 일반 시청자들에게 한 걸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맞아요. 형, 나 예전에 퀴어 영화도 찍었잖아. 비엘이든 브로맨스든 가려서 받을 시간 없어요. 남이 버린 기회라도 잡아야지. 누드 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똥통을 구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욕 좀 먹고 마는 거지.”

“도하 씨의 긍정적인 사고를 좀 나눠 가지세요.”

30분가량의 짧은 독립 영화에 출연했을 때의 얘기였다. 그때도 퀴어 영화라고 해서 별 저항감은 없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퇴마물이라 흥미가 더 붙었다.

“욕 좀 먹고 마는 거면 좋지. 이 드라마의 성적이 앞으로의 너에게 달릴 꼬리표, 네 팬덤의 발판이 되니까 걱정이지. 쩝, 그래……. 걱정만 쌓아 봐야 뭐가 해결되겠냐. 이왕 결정한 거 열심히 해 보자, 도하야.”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감히 걷어차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여러 기회를 날려 버린 도하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매니저가 뒷목을 벅벅 긁다가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물어다 준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든 도하에게 길을 열어 주어 기뻤다.

다시 홍보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소속사에서 낼 기사는 간단히 드라마 제목만 따온 윤도하에 대한 설명이었다. 웹 드라마 어디에 출연했다가 주 내용이다. 그리고 함께 나오는 정군의 이야기도 넣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로서 가벼운 끼워 팔기였다.

“유명 연예인 물망으로 줄줄이 나오면 나중에 들어올 사람 스트레스받겠다.”

“그렇긴 해요. 지금 상황으로는 이름 있는 젊은 조연이나 도하 씨와 비슷한 물 밑 메이저 정도가 올 것 같은데, 어느 쪽이든 지금 언급되는 사람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질 테니 비꼼도 많이 들을 거예요.”

“그래도 간절한 누군가는 들어오게 되겠지. 너처럼.”

짧은 회의가 끝나고 홍보 팀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을 나가면서 ‘도하 씨, 당분간 인터넷 보지 말고 멘탈 잡고 있어요.’라는 말을 남겼다. 도하는 괜히 겁주지 말라고 대답하려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당연하지만 욕먹는 걸 알아도 그 내용까지 보기는 싫었다.

회의 때문에 꺼 놓은 핸드폰은 이미 불티나게 연락이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같이 웹 드라마를 찍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었다. 축하한다는 얘기가 절반, 걱정이 절반이었다. 걱정의 이유가 매니저와 같지는 않았다.

[진짜 강세진이랑 찍어? 걔네 팬들 엄청 극성인데! 몸 사리고 다녀!]

‘이게 무슨 소리야?’

곰곰이 생각하다 저번에 원작자가 강세진을 원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제작사 측에서 낸 기사에 나온 물망 중인 유명 연예인이 강세진인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욕을 먹는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콧등을 긁으며 짧게 답장을 보낸 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매니저가 흘끗 그 모습을 보고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작가 선생님께서 강세진을 엄청나게 미나 봐요. 친구들한테 온 톡의 절반이 강세진 얘기야.”

“우리 도하 오래 살겠다. 욕 많이 먹어서.”

“장수해서 형 호강시켜 줄게요”

히히 하고 웃으며 어깨에 뺨을 비비자 매니저가 징그럽다며 머리통을 밀어 내었다. 그래도 도하는 끈질기게 팔짱을 끼고는 이마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형 덕에 내가, 어? CVM 드라마 주연도 해 본다.”

어쩌면 호영에게 기회를 뺏긴 것이 팀장과 대등하게 싸우지 못한 자신의 탓일지도 모르는데 원망하거나 실망하는 일 없이 치대는 도하에 매니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일 못 하는 매니저라 욕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덩치도 큰 이 녀석은 나이에 맞지 않게 늘 웃으면서 안겨 왔다.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머리를 한번 쓰다듬자 생글생글 눈을 접으며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 모습이 여우가 따로 없었다.

“교태를 부리려면 유명 감독이나 스폰서 쪽에 하지 그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는 고까운 목소리였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등줄기가 식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자 회의실 문에 기대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팀장이 보였다. 도하는 매니저의 팔에 둘렀던 손을 빠르게 거두어 뒷짐을 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도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팀장이 고개만 끄덕이며 다가왔다.

“윤도하, 주연 잡아 왔다며. 대단하네.”

책상 위에 있는 대본을 힐끔 보는 눈에 비소가 담긴 듯 보였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자네가 높은 사람들한테 임 실장한테 하는 것처럼만 굴었어도 더 일찍 기회가 왔을 텐데 말이야.”

팀장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비꼬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참으로 부드러웠다. 아직도 스폰서 얘기로 속을 긁는 게 못마땅해 억지로 풀어 놨던 도하의 표정이 뾰족하게 바뀌었다.

늦게나마 찾아온 기회가 그때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듯해 기쁘던 차에 뺏어간 사람이 저런 얘기를 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내 눈을 내리뜨며 시선을 피했다. 이 상태로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버릇없다고 괜히 시비를 걸 것이 분명했다.

“기사 보니까 뭐 다 비슷한 사람들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응? 드라마의 성공보다는 첫 주연이 기념적인 거니까.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면 돼.”

도하의 어깨를 격려하듯 토닥이는 손길은 다정했으나 말하는 내용은 경시 그 자체였다. 주연도 조연도, 감독이나 작가까지 다 고만고만한 인지도의 사람들이니 조용히 망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속을 긁어 대는 목소리에 뒷짐을 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팀장은 확실하게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없는 모양이었다. 마이너한 장르와 마이너한 배우의 조합이니 그럴 만도 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들어진 웃음으로 대답하니 팀장이 사람 좋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을 나갔다.

“아오, 저 재수 없는 너구리.”

다시 심기 불편해진 매니저가 문을 쏘아보며 욕을 했다. 말하는 투가 기분 나쁘긴 해도 내용은 평범한 조언이나 다름없으니 대뜸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하는 매니저를 진정시키며 대본을 집어 들었다. 캐릭터가 바뀌었으니 분석을 다시 해야 했다.

주인공.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는 작품. 다시 찾아온 큰 기회. 손에 힘이 들어가자 대본에 눌린 손자국이 생겨났다.



며칠 뒤 정식 대본이 12화까지 한 번에 도착했다. 감독과의 통화로 준비 과정을 보고받은 후부터는 대본을 분석하며 요구받은 사항대로 운동을 시작했다.

감독은 적당한 근육을, 작가진은 지금처럼 적당히 마른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 중간을 목표로 근력 위주로 운동했다.

도하는 스포츠는 좋아했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근력 운동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해냈다. 그나마 다이어트 전에 붙었던 근육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 다행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꾸준히 헬스장에 출석하자 턱선이 더 날렵해지며 제법 작중 캐릭터처럼 예민한 분위기가 났다.

도하는 종일 헬스장을 빨빨 돌아다니다가 집에 오면 대본을 폈다. 10회가 넘어가자 주인공 김형우의 과거가 풀리며 설정이 자세해졌다. 벌써 너덜거리는 대본을 손에 쥔 채 머릿속에 주인공의 얼굴을 그려 가며 장면을 만들어 내길 반복했다. 매니저가 알려 준 다른 역할들 배우의 사진을 보고 자세한 관계와 배경을 구축했다. 누가 올지 모르는 파트너 역은 달걀귀신이 둥둥 떠다녔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하루빨리 대본 리딩에 들어가 호흡을 맞춰 보는 것이 좋았다. ‘아직도 역할이 정해지지 않았나?’ 핸드폰을 한번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안 보는 게 약이다.

한참 누워서 대본을 보고 있자 아까 무시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매니저였다.

“네, 형.”

-대본 리딩 하고 촬영 기간 잡혔어. 컨셉 포스터 촬영하는 날에 고사도 할 거야.

“재영이 역은 누구예요?”

-몰라. 그냥 결정 났으니 와서 만나 보라는 얘기만 하더라.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매니저의 말에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