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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5화
#1 (5)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작년 촬영장에서 근태는 도하를 아는 눈치였다. 한참 연기를 하는 도하를 눈으로 쫓다가 막상 다가오면 피했다. 그걸 멀리서 보았다. 무시하는 거야 자존심 문제인지 그냥 그런 성격인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김근태가 윤도하에게 흥미를 갖고 있고 그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10대 시절 함께 준비했던 친구들이 앞서 꽃길을 걷고 있을 때 그들과 함께한 추억을 즐겁게 얘기하는 도하는 아직 수면 밑에 있었다. 허탈감이 있을 법도 한데 반가워하며 다가가기도 하고, 무시당해서 삐지기도 하고, 굴하지 않고 쫓아다니기도 했다.
도하는 아직 그 시절에서 성장하지 않은 10대 소년 같았다. 그 점이 귀엽기도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이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대본을 주고 싶었지만, 당장 차기작으로 결정할 수 있을 만한 대본은 그것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호영이 떨군 다른 대본들은 이미 후배들의 손에 들어가 있거나 이미 오디션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사가 방임하니 도하와 매니저가 웹 드라마 쪽에 자리를 일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의실이 조용해지자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밤톨 머리의 정군이 들어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와, 정군이다! 안녕!”
“안녕하세요, 도하 형.”
한동안 학교 시험이 있다고 코빼기도 안 보였던 정군의 얼굴을 보자 반가움이 든 도하가 소녀 팬처럼 방정맞게 인사를 건넸다. 익숙한 듯 정군은 특별한 반응 없이 덤덤하게 받아쳤다.
정군이 오자 매니저는 허겁지겁 짐을 챙겼다.
“이제 가야지. 윤도하 일어나. 차에 있는 네 짐 가지고 가.”
“가는 길에 집까지 데려다주세요.”
“지하철 이용해라.”
“치사해.”
매몰찬 거절에 도하가 다시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
“다음 분 들어오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렸다. 다음 순서인 배우가 보고 있던 서류를 꾸깃꾸깃 가방에 넣으며 일어나 안내인을 따라갔다. 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순서를 확인했다. 벌써 다음 차례다.
오디션까지 무려 일주일의 여유가 있었기에 하루 종일 대본을 보며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 나름대로 캐릭터를 구상할 수 있었다. 잘 볼 자신이 있었다.
먼저 들어갔었던 정군은 긴장한 표정 없이 들어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도하를 기다리기 위해 옆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럴 때의 정군을 보면 ‘연기를 제대로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출연작을 본 결과 연기는 무난하게 잘하는 편이었다.
“도하 형, 안 더워요?”
“더워 죽을 거 같아…….”
반팔 입고 올걸. 도하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대답했다. 하늘색 와이셔츠에 회색 정장 바지를 입었는데 잘못 고른 것 같았다. 바지가 겨울용처럼 두꺼웠다.
아직 살이 덜 올라 여름옷을 입으면 몸 두께가 가늘어 보일까 봐 일부러 봄가을용으로 추정되는 옷을 꺼내 왔는데 겨울용이었나 보다.
아침에 오디션장에 왔을 때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온이 오르자 땀이 흘러내렸고 하얀 뺨이 붉게 익었다. 그래도 원래 생각했던 재킷까지 포함된 정장 차림이 아니라 버스에서 봐 온 가벼운 회사원 복장을 골라서 다행이었다. 도하가 드라마를 찍으며 입었던 정장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챙겨 온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아 냈다.
‘아, 얼른 오디션 보고 가서 씻고 싶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때마침 도하의 차례가 되었다. 급히 일어나려던 발이 꺾여 정군이 잡아 주었다. 도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끝나면 맛있는 거 사 줄게!” 하고 말하자 정군이 파이팅 하라는 듯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안내를 따라 들어가니 기다란 회의실용 책상에 세 사람이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전 오디션을 본 사람에 대한 감상이었다. 이력서를 뒤적이며 한마디 하던 젊은 감독이 도하가 들어온 것을 보고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한 사람은 원작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각본가인 모양이다.
도하는 바닥에 X 표시가 적힌 곳까지 걸어갔다. 자리에 서니 바로 앞에 카메라가 삼각대 위에 놓여 있었고 대각선 쪽에는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있었다. 표시 자리에 선 단정한 차림의 도하가 화면 정가운데에 비쳤다.
“음, 네. 자기소개하시고, 준비해 오신 캐릭터 연기, 자유 연기, 그리고 저희 쪽에서 내는 즉석 연기 하나까지 순서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중간에 질문이 있으면 저희가 손을 들을 테니 본인 페이스로 진행해 주세요.”
감독이 양손을 턱에 대고 몇 번씩 반복한 말을 음률 없이 조곤조곤 말했다. 오랜 시간 앉아서 연기를 보았던 터라 따분한 기색이 보였다. 그나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도하의 반듯한 얼굴에는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만월 엔터테인먼트 윤도하입니다.”
도하는 더위 따윈 잊은 시원한 미소로 운을 떼었다. 실제로 이 공간은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서 쾌적했다. 달아올랐던 뺨이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준비해 온 연기는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평범한 척해도 능력과 성격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신민기. 가면을 쓰고 평범한 가정, 평범한 직업, 평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만,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감 없이 본연의 냉정한 성격을 보여 준다.
주어진 대본에는 사람들과 트러블 없이 잘 지내는 유능하고 털털한 회사원의 모습과 악의 없는 착하고 여린 귀신들조차 가차 없이 없애는 냉혈한 퇴마사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평범한 대사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럴듯하지만 악당 같은 느낌이 감돌았다. 그 갭을 보면 ‘이 인물이 사실은 흑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쓴 모습은 여름의 에어컨 바람이고 본래의 모습은 겨울의 한파 같은 것이 아닐까. 아까 땀을 흘리면서 했던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대본 속 신민기가 처한 상황에 몰입해 입을 뗐다.
사람 좋은 선한 웃음과 섬뜩하게 감정이 지워진 표정을 오가며 첫 번째 과제를 마치자 각본가가 잠시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지금 연기하신 신민기에 대해 아는 점은 시놉시스에 적힌 부분과 오디션 대사로 한정되어 있잖아요? 도하 씨가 연기에 쓰신 독자적인 설정을 듣고 싶어요.”
공통 질문이었다. 도하는 양손을 잡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머릿속에서 구상했던 이미지를 끄집어내며 큰 눈을 굴렸다.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평범함을 연기한다. 엄마 옆에 귀신이 보여도 엄마가 놀라거나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눈치껏 행동했을 것 같아요. 신민기는 대다수 사람과 같은 평범함을 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수성에는 왜 들어갔을까요?”
“그 공간은 신민기가 제일 마음 편하게 얻을 수 있는 평범함이니까요. 모두가 귀신을 보고 느끼는 사람들이잖아요.”
“네. 그럼 마지막으로 신민기는 가차 없이 귀신을 퇴치하는 캐릭터인데 자신의 평범함을 망친 귀신을 증오해서 그럴까요?”
“증오는 안 할 것 같아요. 그냥 신민기에게 귀신은 세상의 틀린 답이에요. 보여서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니까 지우개로 지우는 감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다행히 도하가 생각했던 범위 안에서 나오는 질문이어서 지체 없이 대답이 나왔다. 도하의 대답을 들은 각본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은 아니어도 불만족스러운 대답도 아니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음 자유 연기 준비되시면 시작해 주세요.”
자유 연기는 이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꼽았다. 연상의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는 젊은 남편이었다. 특별히 재미가 있거나 설레거나 감정연기가 들어가지 않은 가볍게 듣기 좋은 장면이었다. 희미한 미소가 지어질 정도의 짧고 담백한 연기였다.
“일상 연기 들고 오셨네요? 다른 분들은 감정이 격양되는 연기를 많이 준비하셨던데. 그쪽이 더 연기력을 보여 줄 수 있기도 하고요.”
의외라 생각했는지 감독이 턱을 쓸었다.
“많이 보셨을 거 같아서요. 매운 것만 먹으면 가끔은 담백한 것도 먹고 싶어지잖아요.”
“하하, 그러네요.”
도하 자신도 이전에 보던 오디션에서 대부분 격한 감정 연기를 위주로 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는 적었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심사 위원 입장에선 후반에 질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인상에 남지 않는 조용한 연기라도 새빨간 짬뽕이 가득한 테이블 위에 크림 스파게티가 있으면 단연 눈에 띄지 않겠는가. 얄팍한 꼼수였다.
감독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이 카드를 뒤적였다. 몇 개를 훑어 넘기고 있으니 옆에서 원작가가 하나를 콕 집었다. 그녀가 고른 카드가 마음에 들었는지 감독은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이더니 도하에게 카드를 넘겼다.
“다음은 저희 쪽에서 준비한 단문인데 해석은 자유예요. 정답도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3분 안에 설정 마치고 시작해 주세요.”
네, 하고 대답하고 받은 종이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대사는 한 줄이었다. ‘다음에 또 구해 줄 테니까 걱정 마.’ 너무 짧다. 대사만 보고 퍼뜩 떠오른 이미지는 있지만, 그거로 해도 되는 걸까? 너무나도 평범해서 도리어 망설여졌다.
#1 (5)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작년 촬영장에서 근태는 도하를 아는 눈치였다. 한참 연기를 하는 도하를 눈으로 쫓다가 막상 다가오면 피했다. 그걸 멀리서 보았다. 무시하는 거야 자존심 문제인지 그냥 그런 성격인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김근태가 윤도하에게 흥미를 갖고 있고 그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10대 시절 함께 준비했던 친구들이 앞서 꽃길을 걷고 있을 때 그들과 함께한 추억을 즐겁게 얘기하는 도하는 아직 수면 밑에 있었다. 허탈감이 있을 법도 한데 반가워하며 다가가기도 하고, 무시당해서 삐지기도 하고, 굴하지 않고 쫓아다니기도 했다.
도하는 아직 그 시절에서 성장하지 않은 10대 소년 같았다. 그 점이 귀엽기도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이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대본을 주고 싶었지만, 당장 차기작으로 결정할 수 있을 만한 대본은 그것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호영이 떨군 다른 대본들은 이미 후배들의 손에 들어가 있거나 이미 오디션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사가 방임하니 도하와 매니저가 웹 드라마 쪽에 자리를 일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의실이 조용해지자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밤톨 머리의 정군이 들어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와, 정군이다! 안녕!”
“안녕하세요, 도하 형.”
한동안 학교 시험이 있다고 코빼기도 안 보였던 정군의 얼굴을 보자 반가움이 든 도하가 소녀 팬처럼 방정맞게 인사를 건넸다. 익숙한 듯 정군은 특별한 반응 없이 덤덤하게 받아쳤다.
정군이 오자 매니저는 허겁지겁 짐을 챙겼다.
“이제 가야지. 윤도하 일어나. 차에 있는 네 짐 가지고 가.”
“가는 길에 집까지 데려다주세요.”
“지하철 이용해라.”
“치사해.”
매몰찬 거절에 도하가 다시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
“다음 분 들어오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렸다. 다음 순서인 배우가 보고 있던 서류를 꾸깃꾸깃 가방에 넣으며 일어나 안내인을 따라갔다. 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순서를 확인했다. 벌써 다음 차례다.
오디션까지 무려 일주일의 여유가 있었기에 하루 종일 대본을 보며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 나름대로 캐릭터를 구상할 수 있었다. 잘 볼 자신이 있었다.
먼저 들어갔었던 정군은 긴장한 표정 없이 들어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도하를 기다리기 위해 옆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럴 때의 정군을 보면 ‘연기를 제대로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출연작을 본 결과 연기는 무난하게 잘하는 편이었다.
“도하 형, 안 더워요?”
“더워 죽을 거 같아…….”
반팔 입고 올걸. 도하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대답했다. 하늘색 와이셔츠에 회색 정장 바지를 입었는데 잘못 고른 것 같았다. 바지가 겨울용처럼 두꺼웠다.
아직 살이 덜 올라 여름옷을 입으면 몸 두께가 가늘어 보일까 봐 일부러 봄가을용으로 추정되는 옷을 꺼내 왔는데 겨울용이었나 보다.
아침에 오디션장에 왔을 때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온이 오르자 땀이 흘러내렸고 하얀 뺨이 붉게 익었다. 그래도 원래 생각했던 재킷까지 포함된 정장 차림이 아니라 버스에서 봐 온 가벼운 회사원 복장을 골라서 다행이었다. 도하가 드라마를 찍으며 입었던 정장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챙겨 온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아 냈다.
‘아, 얼른 오디션 보고 가서 씻고 싶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때마침 도하의 차례가 되었다. 급히 일어나려던 발이 꺾여 정군이 잡아 주었다. 도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끝나면 맛있는 거 사 줄게!” 하고 말하자 정군이 파이팅 하라는 듯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안내를 따라 들어가니 기다란 회의실용 책상에 세 사람이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전 오디션을 본 사람에 대한 감상이었다. 이력서를 뒤적이며 한마디 하던 젊은 감독이 도하가 들어온 것을 보고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한 사람은 원작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각본가인 모양이다.
도하는 바닥에 X 표시가 적힌 곳까지 걸어갔다. 자리에 서니 바로 앞에 카메라가 삼각대 위에 놓여 있었고 대각선 쪽에는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있었다. 표시 자리에 선 단정한 차림의 도하가 화면 정가운데에 비쳤다.
“음, 네. 자기소개하시고, 준비해 오신 캐릭터 연기, 자유 연기, 그리고 저희 쪽에서 내는 즉석 연기 하나까지 순서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중간에 질문이 있으면 저희가 손을 들을 테니 본인 페이스로 진행해 주세요.”
감독이 양손을 턱에 대고 몇 번씩 반복한 말을 음률 없이 조곤조곤 말했다. 오랜 시간 앉아서 연기를 보았던 터라 따분한 기색이 보였다. 그나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도하의 반듯한 얼굴에는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만월 엔터테인먼트 윤도하입니다.”
도하는 더위 따윈 잊은 시원한 미소로 운을 떼었다. 실제로 이 공간은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서 쾌적했다. 달아올랐던 뺨이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준비해 온 연기는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평범한 척해도 능력과 성격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신민기. 가면을 쓰고 평범한 가정, 평범한 직업, 평범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만,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감 없이 본연의 냉정한 성격을 보여 준다.
주어진 대본에는 사람들과 트러블 없이 잘 지내는 유능하고 털털한 회사원의 모습과 악의 없는 착하고 여린 귀신들조차 가차 없이 없애는 냉혈한 퇴마사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평범한 대사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럴듯하지만 악당 같은 느낌이 감돌았다. 그 갭을 보면 ‘이 인물이 사실은 흑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쓴 모습은 여름의 에어컨 바람이고 본래의 모습은 겨울의 한파 같은 것이 아닐까. 아까 땀을 흘리면서 했던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대본 속 신민기가 처한 상황에 몰입해 입을 뗐다.
사람 좋은 선한 웃음과 섬뜩하게 감정이 지워진 표정을 오가며 첫 번째 과제를 마치자 각본가가 잠시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지금 연기하신 신민기에 대해 아는 점은 시놉시스에 적힌 부분과 오디션 대사로 한정되어 있잖아요? 도하 씨가 연기에 쓰신 독자적인 설정을 듣고 싶어요.”
공통 질문이었다. 도하는 양손을 잡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머릿속에서 구상했던 이미지를 끄집어내며 큰 눈을 굴렸다.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평범함을 연기한다. 엄마 옆에 귀신이 보여도 엄마가 놀라거나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눈치껏 행동했을 것 같아요. 신민기는 대다수 사람과 같은 평범함을 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수성에는 왜 들어갔을까요?”
“그 공간은 신민기가 제일 마음 편하게 얻을 수 있는 평범함이니까요. 모두가 귀신을 보고 느끼는 사람들이잖아요.”
“네. 그럼 마지막으로 신민기는 가차 없이 귀신을 퇴치하는 캐릭터인데 자신의 평범함을 망친 귀신을 증오해서 그럴까요?”
“증오는 안 할 것 같아요. 그냥 신민기에게 귀신은 세상의 틀린 답이에요. 보여서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되니까 지우개로 지우는 감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다행히 도하가 생각했던 범위 안에서 나오는 질문이어서 지체 없이 대답이 나왔다. 도하의 대답을 들은 각본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은 아니어도 불만족스러운 대답도 아니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음 자유 연기 준비되시면 시작해 주세요.”
자유 연기는 이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꼽았다. 연상의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는 젊은 남편이었다. 특별히 재미가 있거나 설레거나 감정연기가 들어가지 않은 가볍게 듣기 좋은 장면이었다. 희미한 미소가 지어질 정도의 짧고 담백한 연기였다.
“일상 연기 들고 오셨네요? 다른 분들은 감정이 격양되는 연기를 많이 준비하셨던데. 그쪽이 더 연기력을 보여 줄 수 있기도 하고요.”
의외라 생각했는지 감독이 턱을 쓸었다.
“많이 보셨을 거 같아서요. 매운 것만 먹으면 가끔은 담백한 것도 먹고 싶어지잖아요.”
“하하, 그러네요.”
도하 자신도 이전에 보던 오디션에서 대부분 격한 감정 연기를 위주로 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는 적었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심사 위원 입장에선 후반에 질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인상에 남지 않는 조용한 연기라도 새빨간 짬뽕이 가득한 테이블 위에 크림 스파게티가 있으면 단연 눈에 띄지 않겠는가. 얄팍한 꼼수였다.
감독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이 카드를 뒤적였다. 몇 개를 훑어 넘기고 있으니 옆에서 원작가가 하나를 콕 집었다. 그녀가 고른 카드가 마음에 들었는지 감독은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이더니 도하에게 카드를 넘겼다.
“다음은 저희 쪽에서 준비한 단문인데 해석은 자유예요. 정답도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3분 안에 설정 마치고 시작해 주세요.”
네, 하고 대답하고 받은 종이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대사는 한 줄이었다. ‘다음에 또 구해 줄 테니까 걱정 마.’ 너무 짧다. 대사만 보고 퍼뜩 떠오른 이미지는 있지만, 그거로 해도 되는 걸까? 너무나도 평범해서 도리어 망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