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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4화

#1 (4)





장르물에는 흥미가 있었다. 도하는 대본을 손에 쥐었다. 시놉시스가 적혀 있는 부분을 다시 위로 올라가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이야기는 귀신을 볼 수 있는 김형우라는 주인공이 우연히 퇴마사 조직 ‘수성’에 엮이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귀신을 보는 것도 퇴치하는 것도 싫어했던 형우가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여러 유형의 귀신들을 접하면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게 된다.

거기에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적과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해 주는 동료들, 생사를 함께하는 파트너가 있다.

짧은 줄거리와 캐릭터 소개를 보면 유치한 느낌도 들지만, 너무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적당한 가벼움이 CVM 방송국 주 시청자들의 감성과 맞았다.

“주인공이 기억 상실증에 가족도 없다는 설정이어서 과거가 궁금하네요. 귀신을 보는 능력이 원래 있었는지, 아니면 기억을 잃게 만든 사고 후에 생겼는지.”

순수한 시청자로서의 감상은 그러했다. 진부한 설정이지만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근데 OCV는 몰라도 CVM이면 스토리에 짧은 로맨스라도 넣지 않던가? 이것만 보면 그런 느낌은 전혀 없는데.”

“왜 없어. 여기 있잖아.”

매니저는 주인공 다음에 이름을 올린 캐릭터를 가리켰다.

하재영.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은 25세 남자. 빙의 체질이라는 특이점이 있는 캐릭터였다. 까칠한 주인공 김형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티격태격하지만, 파트너로 일하면서 마음을 열어 간다. 의도치 않은 빙의에 자주 걸리기 때문에 주인공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도 적혀 있다.

“브로맨스.”

“아, 브로맨스. 요즘에는 그런 것도 유행이지.”

납득이 가는 대목이었다. 도하는 대본을 잡고 있던 엄지 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장르물은 언젠가 꼭 찍고 싶었다. 주로 찍던 웹 드라마는 현대 로맨스가 많았기에 연애 이외의 스토리가 당겼다. 거기다 본래 그가 즐겨 보는 작품 또한 로맨스보다는 추리나 액션, 가족애 같은 이야기였다.

도하는 겁이 많았지만 시놉시스에 나온 분위기로 보아서 섬뜩한 공포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찍고 싶었다. 신민기라는 캐릭터가 비중이 크지 않은 편이어도 지금까지 맡아 보지 못한 냉정한 성격이라는 점이 끌렸고 촬영 현장도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었다.

“주인공은 어느 배우가 해요? 궁금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서도진을 캐스팅하려나 봐. 그쪽에서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에이, 서도진 씨면 주연 발 벗고 나서지. 얼굴도 잘생겼고 최근에 찍은 작품 잘 돼서 명품 조연으로 이름 알렸잖아요. 첫 주연이 CVM 금토면 엄청 좋은 거 아니야?”

“겉으로 보기엔 좋아 보이긴 한데…….”

톡톡 책상을 치던 검지가 멈췄다. 뒷말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매니저를 도하가 빤히 쳐다보았다.

“원작이 있어.”

“원작 스포일러 걱정?”

뭐 별것도 아닌걸. 도하가 코웃음 쳤다. 웹소설과 웹툰이 흥하는 요즘 같은 때 원작이 있는 드라마나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원작 장르가 문제야. 비엘 소설이거든.”

“비, 뭐?”

“비엘. 보이즈 러브.”

보이즈 러브. 그는 매니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옹알거리며 따라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랑 파트너랑 로맨스. 드라마는 브로맨스로 각색했고.”

매니저의 설명에 도하가 ‘아아’ 하고 가볍게 끄덕이며 대본을 다시 바라보았다. 시놉시스만 보면 전혀 모를만한 사실이었다.

“인식이 바뀌니까 이런 것도 드라마로 나오는구나. 새로운 도전이네요. 영화 쪽은 꾸준히 퀴어 코드가 들어간 작품이 나왔지만, 드라마는 별로 못 봤는데. 특히 메인 쪽 서사가 이런 거는 처음 봐요.”

“그런 걸 꺼리는 배우들도 있으니 캐스팅 난항이다 어쩐다 말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일단 원작자가 눈이 높아서 값비싼 사람만 불러 대니 내부 트러블도 좀 있는 것 같고. 제작사가 붙어도 예산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이런 장르를 꺼려하는 배우는 많이 있다. 단순히 동성과의 로맨스를 찍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연기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에 따르는 리스크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있다. 특히 주연에게 오는 부담은 컸다.

그렇다고 아무나 뽑을 수는 없었다. 기본 시청률이 보장되는 가족물이나 로맨스물과는 달리 이제껏 크게 다루지 않았던 오컬트가 장르인 만큼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주연 배우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냐에 따라 화제성이 크게 바뀔 것이다.

또 원작이 있는 이상 각색의 완성도 역시 중요했다. 좋은 작품이라면 기존 원작 팬 외에도 호기심에 보는 사람들을 마지막 화까지 이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둘 중 무엇 하나 잡지 못한다면 드라마가 침몰할 건 뻔했다.

‘투자비가 많이 들어올 느낌은 아니지. 그럼 원작자를 뺀 제작진 측은 아주 대단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배우를 원하지 않을까? 아니면 적당히 이름이 알려진 아이돌 중에 배우로 키울 예정인 멤버 정도?’

그 정도를 예상하는 도하는 원작자가 원하는 값비싼 배우가 궁금해졌다.

“누굴 원하는데요?”

“마슈크 강세진.”

누가 들을세라 몸을 낮춰 조용히 말하는 매니저의 염려도 무시한 채 도하는 익숙한 이름에 펄쩍 뛰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졌다. 바퀴가 달린 의자는 그대로 뒤로 쭈욱 밀려 나갔다.

“강세지이인? 걔 드라마 안 할 텐데?”

“그래. 안 할 텐데, 러브 콜을 계속 넣고 있는 것 같아.”

강세진은 ‘이노센트 알파’ 외에도 벌써 몇 번이나 유명 감독이 제작하는 드라마 물망 기사에 이름을 올렸지만 단 한 번도 확정된 적이 없었다. 도하가 생각하기에는 소속사에서 대놓고 밀어 주려고 대본을 보내는데 당사자가 다 거절하는 것 같았다.

쟁쟁한 캐스트의 대규모 드라마도 고사하는 사람이 캐스팅 난항을 겪고 있는 드라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무엇보다…….

“걔는 좀, 발 연기인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도하가 의자를 다시 끌고 와 은밀하게 말하자 매니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야, 세진이가 나랑 옛날에 알던 사이니까 그렇지. 걔 진짜 발 연기야.”

“또 그 소리. 너 작년에 김근태랑 알던 사이라고 했는데 촬영장에서 완전 무시당했던 거 기억해? 어우. 내가 다 공감성 수치더라. 진짜 알던 사이인 거 맞아?”

“아, 근태는 원래 싸가지 없는 놈이었고! 세진이, 세진이도…… 좀 그렇긴 한데. 아는 사이인 건 맞아요. 형, 내가 말했잖아! 나 옛날에 아이돌 준비했었다니까? 그때 같이 연습했던 애들이에요!”

못 미더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매니저가 답답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말이 신뢰를 잃은 것은 다 작년 영화 촬영장에서 만났던 김근태 때문이 분명했다.

둘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입봉작부터 지금까지 매년 쏟아지는 상업 영화 사이에서도 손익 분기점을 못 넘긴 적이 없는 감독의 대체 역사물 영화였다. 주연들은 다 쟁쟁한 베테랑이었고, 예쁜 여자 아이돌 한 명과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남배우도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그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남배우’가 바로 김근태였다.

당시 도하는 오디션으로 단역을 받았다. 비중은 크지 않았고 초반에 죽는 역할이었지만 대사도 있었고, 그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던 감독이 클로즈업 장면까지 만들어 주었다.

한 컷에 불과할 장면을 찍기 위해 도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기약 없는 땡볕 속 기다림에 지쳐 있던 중 반가운 얼굴을 마주해 붕붕 손을 흔들었다.

‘근태야!’

그와는 다르게 메인스트림에서 활동 중인 인기 배우 김근태. 꽤 크게 소리쳤음에도 못 들은 것처럼 지나가기에 아예 바짝 따라붙어 알은체했다. 그러나 근태는 가까이에 붙어도 눈길을 한 번 안 주더니 자리를 옮겼다. 말 한마디, 눈짓 하나 안 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도하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말을 안 하기에 그냥 따라만 다녔다. 귀찮아지거나 짜증이 나면 뭐라 한마디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근태의 고집도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겨우 서로 말을 트게 된 것은 영화 속 대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 촬영장에서 다들 너 불쌍하다고 수군거린 거 아냐? 얼마나 불쌍했으면 홍원 선배님께서 너를 돌봐 주시냐. 단역인 너를!”

“내가 아들 역이라 그런 거지.”

괜히 머쓱해져 뺨을 긁었다. 아마 그때의 일로 근태도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떴다고 무명 배우 무시하는 인성!’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에게는 원래 그런 소문이 파다했기에 특별한 흠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또 그때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닌 도하도 또라이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나왔었기에 퉁 친 셈이다.

“남 얘기는 상관없어. 난 내 살길이나 봐야지!”

“그래. 오디션 일주일 후니까 잘 준비해 봐. 이번에는 주연보다 얼굴 튄다고 까이지는 않을 거다. 원작자가 원하는 게 꽃미남 파라다이스니까.”

상황을 끝맺었다. 도하는 드라마 원작이 뭐가 되었든 조연으로 오디션을 볼 것이고, 주연이 누가 오든 어떤 리스크를 안든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기분 좋게 대본을 가방에 넣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그 모습을 보던 매니저는 도하의 말을 되씹어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