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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3화
#1 (3)
식당 문을 열기 전, 챙겨야 하는 짐을 확인하고 스태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웹에 갱신이 시작되면 인터넷 생방송으로 한 번 더 만날 예정인 배우들과도 가볍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도하는 너털너털 조금은 붕 뜬 발걸음으로 쿵쿵 울리는 최신 가요들과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의 도로를 걸었다. 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누구 노래였더라?’
조금 멍한 정신으로 기억을 더듬거리던 중 상가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 마슈크 노래구나.”
앨범이 발매됐다 하면 음악 차트 줄 세우기는 기본인 인기 절정의 아이돌 그룹 노래였다.
스마트폰 광고를 찍은 7인조 남자 아이돌의 포스터가 통신사 직영점 유리 벽에 붙어 있었다. 도하는 발을 돌려 포스터 앞으로 다가갔다. 예쁘장하게 생긴 멤버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훑어보다가 귀엽고 앳된 얼굴에서 시선이 멈췄다. 작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학원물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활약한 아이였다.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젖살이 덜 빠진 얼굴이 역할과 잘 어울렸다.
손가락으로 톡톡 포스터 속 아이의 가슴께를 치다가 다른 멤버에게 눈을 돌렸다. 연갈색 머리에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예쁘장하게 잘생긴 얼굴 덕에 팬들 사이에서는 ‘왕자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도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포스터 속 왕자님을 눈에 가득 담다가 바람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돌을 배우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쓰지 마. 네 눈엔 진지하게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병신 같아 보이지?’
흐릿한 기억 속에 여린 얼굴이 떠올랐다. 한 뼘 정도 낮은 시야에 인상을 쓴 백옥 같은 소년이었다. 언제나 그에게 신경질을 내던 고약한 성격이었다. 아니, 기실 무관심에 가깝긴 하나 다른 사람들에겐 얌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하는 자신이 먼저 다가가 귀찮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콧등을 긁었다. 그를 조금 많이 귀찮게 했었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가 자신에게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고, 훗날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하는 포스터 속 예쁜 얼굴을 손가락으로 한번 쓸어 보고 미소 지었다.
‘배우가 되기 위한 발판…….’
머릿속에 어린 얼굴의 멤버와 아까 TV에 나왔던 여자 아이돌, 침울해 보이던 은하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그게 현실이다. 당시의 도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마 본능적으로 더 쉬워 보이는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의 자신의 꼴을 보면 그때 생각했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대로 아이돌이 되었다면, 인기는 크게 없어도 방송에 얼굴을 비추는 횟수가 늘어나 작품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더 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한심한 상상이었다. 애초에 아이돌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민망한 웃음이 나왔다.
***
아침부터 자꾸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도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괴롭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오늘은 분명 하루 종일 후배인 정군의 스케줄을 따라다닌다고 들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썼다.
갑작스럽게 잡힐 스케줄도 없다. 새벽에 들어와서 피곤하다. 그렇기에 무시한다. 도하는 처음 진동이 울리던 순간, 빠르게 판단하여 매니저의 연락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벌써 외면한 전화가 10통이 넘었다. 더는 무리였다.
“으으, 시끄러워…….”
끊이질 않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널브러진 옷가지로 난잡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역시 매니저였다. 도하는 아직 절반밖에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통화 아이콘을 밀었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아니, 형. 나 오늘 새벽에 들어왔고, 지금 전화 받는 것도 오늘 새벽이에요.”
-적당히 먹으랬지.
“나 오늘 스케줄 없잖아. 늦잠 자게 해 주면 안 돼?”
-정군이 만나기 전에 잠깐 시간 나니까 나랑 미팅 좀 하자.
“지금?”
갈라진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매니저는 빨리 오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도하는 뚜, 뚜 하는 신호음만 들리는 핸드폰을 들고 벙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까치집이 된 머리를 이마에서부터 쓸어 올렸다.
‘그냥 미팅만 하고 오면 되는 거겠지.’
팔을 늘려 기지개를 쭈욱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데워지지 않은 찬물로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와 무채색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색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가방을 챙겼다. 중요한 일이었으면 대충 나오지 말라고 당부를 했을 것이다.
다 털어 내지 못한 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져 어깨를 적셨지만, 도하는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길어진 여름이라고 해도 아침 바람은 조금 쌀쌀하다. 머리를 손으로 한번 털어 물기를 날리며 원룸의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하자 초췌한 얼굴들이 도하를 반겼다. 업무가 끝나지 않아 집에 들어가지 못한 직원들이었다. 도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다들 좀비처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는 블랙 기업이 확실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매니저가 오라고 했던 회의실 문을 열자 그 좀비들과 비슷한 안색을 하고 있는 매니저가 보였다. 눈 밑이 꺼먼 게 한숨도 못 잔 듯했다. 도하는 담당이라고는 자신과 정군이 다인 매니저가 뭐가 바빠서 밤을 지새운 것인지 궁금해졌다.
의아함을 숨긴 채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어휴, 깜짝이야! 기척 좀 내, 기척 좀. 네가 자객이야?”
“내가 자객이었으면 형은 이미 죽은 목숨이야.”
“죄 없는데 죽이지 마라. 아직 먹여 살려야 하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다고.”
매니저가 읽고 있던 종이 뭉텅이를 탁탁 모으며 대답했다. 도하는 킬킬 웃으며 옆자리에 의자를 빼 앉았다. 아직 졸음이 덜 깬 도하와 잠을 못 잔 것 같은 매니저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지만 옅은 미소도 함께했다.
“그래서 왜요. 뭐 어떤 거 때문에 그래요?”
“이거.”
도하가 턱을 괴며 심드렁하게 묻자 매니저가 가지고 있던 종이 뭉텅이를 그 앞에 놓았다. 눈을 내리떠 자세히 보니 대본이었다.
[CVM 금토 드라마 이노센트 알파]
표지에 적혀 있는 글자를 조용히 읊어 보았다. CVM이면 요즘 나오는 드라마마다 화제가 되는 케이블 방송사였다. 물론 개중에는 화제성이 떨어지는 작품도 있었지만, 수목 저녁에 편성되는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는 줄줄이 성공했고 금토의 장르 드라마도 간간이 매니아들을 형성했다.
도하는 ‘혹시 오디션이 들어왔나?’ 싶은 생각에 제목을 뚫어지라 보던 눈을 굴려 매니저를 보았다.
“정군이한테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어.”
“뭐야.”
두근두근, 기대를 하던 도하가 김빠진 풍선처럼 푸슉 소리를 내며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정군이 대본을 왜 나한테 보여 줘!”
고개를 휙 돌려 원망이 담긴 눈초리를 보내자 매니저가 일단 들어 보라며 대본 페이지를 넘겼다.
“형, 나한테 정군이 오디션 뺏어라 이런 건 아니지?”
“내가 미쳤냐. 나는 정군이도 성공해야 하고 너도 성공해야 해!”
매니저는 의심이 가득한 도하의 이마를 검지로 콕 찌르고는 그대로 손을 옮겨 대본을 가리켰다. 도하는 입을 삐죽 내밀어 작게 툴툴거리다 찔린 이마를 손등으로 비비며 시선을 돌렸다.
[신민기, 33세. 어린 시절부터 귀신이 보이는 것에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다. 냉정하고 현실적이다. 수성에 스카우트 된 후에도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 월급쟁이로서의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퇴마를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여기고 있고 공감 능력이 없어 조직원들과 트러블이 일기도 한다.]
간단한 캐릭터 소개만 봐도 소재가 특이했다. 도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귀신? 퇴마? 공포 드라마인 건가?’
흘끗 표정을 살핀 매니저가 설명을 덧붙였다. 다행히 관심은 보이는 듯했다.
“지금 자리가 남은 게 정군이 앞으로 온 박윤종라는 대학생 역 하고, 이 신민기라는 회사원이래. 둘 다 조연이고. 이 정도 나이대면 붙어서 뺏길 일은 없을 거다. 도하 네가 캐스팅된다는 전제하에 얘기지만.”
그동안은 20대 역 위주로 오디션을 봤다. 고등학생 역까지 할 정도로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을 연기한 도하지만 ‘아직은 20대니까, 좀 더 젊은 역할을 많이 하자’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독이었다. 따낸 역할이 비슷한 연령대를 연기하는 호영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었다.
바쁘게 일하는 호영이었지만, 회사로 오는 좋은 드라마 대본은 거의 독식하다시피 가져갔다. 본인의 이미지에 맞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어쩌다 거름망에서 걸러져 굴러떨어진 윤 감독의 드라마는 도하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역시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기에 내색은 안 해도 굳이 정군에게 온 오디션까지 훑어서 연령을 올린 역할을 찾아 준 매니저가 고마웠다.
“이게 무슨 드라마예요?”
“이 소개만 보면 무슨 드라마 같아?”
“음……. 퇴마물?”
#1 (3)
식당 문을 열기 전, 챙겨야 하는 짐을 확인하고 스태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웹에 갱신이 시작되면 인터넷 생방송으로 한 번 더 만날 예정인 배우들과도 가볍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도하는 너털너털 조금은 붕 뜬 발걸음으로 쿵쿵 울리는 최신 가요들과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의 도로를 걸었다. 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누구 노래였더라?’
조금 멍한 정신으로 기억을 더듬거리던 중 상가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 마슈크 노래구나.”
앨범이 발매됐다 하면 음악 차트 줄 세우기는 기본인 인기 절정의 아이돌 그룹 노래였다.
스마트폰 광고를 찍은 7인조 남자 아이돌의 포스터가 통신사 직영점 유리 벽에 붙어 있었다. 도하는 발을 돌려 포스터 앞으로 다가갔다. 예쁘장하게 생긴 멤버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훑어보다가 귀엽고 앳된 얼굴에서 시선이 멈췄다. 작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학원물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활약한 아이였다.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젖살이 덜 빠진 얼굴이 역할과 잘 어울렸다.
손가락으로 톡톡 포스터 속 아이의 가슴께를 치다가 다른 멤버에게 눈을 돌렸다. 연갈색 머리에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예쁘장하게 잘생긴 얼굴 덕에 팬들 사이에서는 ‘왕자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도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포스터 속 왕자님을 눈에 가득 담다가 바람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돌을 배우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쓰지 마. 네 눈엔 진지하게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병신 같아 보이지?’
흐릿한 기억 속에 여린 얼굴이 떠올랐다. 한 뼘 정도 낮은 시야에 인상을 쓴 백옥 같은 소년이었다. 언제나 그에게 신경질을 내던 고약한 성격이었다. 아니, 기실 무관심에 가깝긴 하나 다른 사람들에겐 얌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하는 자신이 먼저 다가가 귀찮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콧등을 긁었다. 그를 조금 많이 귀찮게 했었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가 자신에게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고, 훗날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하는 포스터 속 예쁜 얼굴을 손가락으로 한번 쓸어 보고 미소 지었다.
‘배우가 되기 위한 발판…….’
머릿속에 어린 얼굴의 멤버와 아까 TV에 나왔던 여자 아이돌, 침울해 보이던 은하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그게 현실이다. 당시의 도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마 본능적으로 더 쉬워 보이는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의 자신의 꼴을 보면 그때 생각했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대로 아이돌이 되었다면, 인기는 크게 없어도 방송에 얼굴을 비추는 횟수가 늘어나 작품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더 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한심한 상상이었다. 애초에 아이돌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민망한 웃음이 나왔다.
***
아침부터 자꾸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도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괴롭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오늘은 분명 하루 종일 후배인 정군의 스케줄을 따라다닌다고 들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썼다.
갑작스럽게 잡힐 스케줄도 없다. 새벽에 들어와서 피곤하다. 그렇기에 무시한다. 도하는 처음 진동이 울리던 순간, 빠르게 판단하여 매니저의 연락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벌써 외면한 전화가 10통이 넘었다. 더는 무리였다.
“으으, 시끄러워…….”
끊이질 않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널브러진 옷가지로 난잡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역시 매니저였다. 도하는 아직 절반밖에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통화 아이콘을 밀었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아니, 형. 나 오늘 새벽에 들어왔고, 지금 전화 받는 것도 오늘 새벽이에요.”
-적당히 먹으랬지.
“나 오늘 스케줄 없잖아. 늦잠 자게 해 주면 안 돼?”
-정군이 만나기 전에 잠깐 시간 나니까 나랑 미팅 좀 하자.
“지금?”
갈라진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매니저는 빨리 오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도하는 뚜, 뚜 하는 신호음만 들리는 핸드폰을 들고 벙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까치집이 된 머리를 이마에서부터 쓸어 올렸다.
‘그냥 미팅만 하고 오면 되는 거겠지.’
팔을 늘려 기지개를 쭈욱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데워지지 않은 찬물로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와 무채색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색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가방을 챙겼다. 중요한 일이었으면 대충 나오지 말라고 당부를 했을 것이다.
다 털어 내지 못한 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져 어깨를 적셨지만, 도하는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길어진 여름이라고 해도 아침 바람은 조금 쌀쌀하다. 머리를 손으로 한번 털어 물기를 날리며 원룸의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하자 초췌한 얼굴들이 도하를 반겼다. 업무가 끝나지 않아 집에 들어가지 못한 직원들이었다. 도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다들 좀비처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는 블랙 기업이 확실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매니저가 오라고 했던 회의실 문을 열자 그 좀비들과 비슷한 안색을 하고 있는 매니저가 보였다. 눈 밑이 꺼먼 게 한숨도 못 잔 듯했다. 도하는 담당이라고는 자신과 정군이 다인 매니저가 뭐가 바빠서 밤을 지새운 것인지 궁금해졌다.
의아함을 숨긴 채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어휴, 깜짝이야! 기척 좀 내, 기척 좀. 네가 자객이야?”
“내가 자객이었으면 형은 이미 죽은 목숨이야.”
“죄 없는데 죽이지 마라. 아직 먹여 살려야 하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다고.”
매니저가 읽고 있던 종이 뭉텅이를 탁탁 모으며 대답했다. 도하는 킬킬 웃으며 옆자리에 의자를 빼 앉았다. 아직 졸음이 덜 깬 도하와 잠을 못 잔 것 같은 매니저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지만 옅은 미소도 함께했다.
“그래서 왜요. 뭐 어떤 거 때문에 그래요?”
“이거.”
도하가 턱을 괴며 심드렁하게 묻자 매니저가 가지고 있던 종이 뭉텅이를 그 앞에 놓았다. 눈을 내리떠 자세히 보니 대본이었다.
[CVM 금토 드라마 이노센트 알파]
표지에 적혀 있는 글자를 조용히 읊어 보았다. CVM이면 요즘 나오는 드라마마다 화제가 되는 케이블 방송사였다. 물론 개중에는 화제성이 떨어지는 작품도 있었지만, 수목 저녁에 편성되는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는 줄줄이 성공했고 금토의 장르 드라마도 간간이 매니아들을 형성했다.
도하는 ‘혹시 오디션이 들어왔나?’ 싶은 생각에 제목을 뚫어지라 보던 눈을 굴려 매니저를 보았다.
“정군이한테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어.”
“뭐야.”
두근두근, 기대를 하던 도하가 김빠진 풍선처럼 푸슉 소리를 내며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정군이 대본을 왜 나한테 보여 줘!”
고개를 휙 돌려 원망이 담긴 눈초리를 보내자 매니저가 일단 들어 보라며 대본 페이지를 넘겼다.
“형, 나한테 정군이 오디션 뺏어라 이런 건 아니지?”
“내가 미쳤냐. 나는 정군이도 성공해야 하고 너도 성공해야 해!”
매니저는 의심이 가득한 도하의 이마를 검지로 콕 찌르고는 그대로 손을 옮겨 대본을 가리켰다. 도하는 입을 삐죽 내밀어 작게 툴툴거리다 찔린 이마를 손등으로 비비며 시선을 돌렸다.
[신민기, 33세. 어린 시절부터 귀신이 보이는 것에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다. 냉정하고 현실적이다. 수성에 스카우트 된 후에도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 월급쟁이로서의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퇴마를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여기고 있고 공감 능력이 없어 조직원들과 트러블이 일기도 한다.]
간단한 캐릭터 소개만 봐도 소재가 특이했다. 도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귀신? 퇴마? 공포 드라마인 건가?’
흘끗 표정을 살핀 매니저가 설명을 덧붙였다. 다행히 관심은 보이는 듯했다.
“지금 자리가 남은 게 정군이 앞으로 온 박윤종라는 대학생 역 하고, 이 신민기라는 회사원이래. 둘 다 조연이고. 이 정도 나이대면 붙어서 뺏길 일은 없을 거다. 도하 네가 캐스팅된다는 전제하에 얘기지만.”
그동안은 20대 역 위주로 오디션을 봤다. 고등학생 역까지 할 정도로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을 연기한 도하지만 ‘아직은 20대니까, 좀 더 젊은 역할을 많이 하자’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독이었다. 따낸 역할이 비슷한 연령대를 연기하는 호영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었다.
바쁘게 일하는 호영이었지만, 회사로 오는 좋은 드라마 대본은 거의 독식하다시피 가져갔다. 본인의 이미지에 맞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어쩌다 거름망에서 걸러져 굴러떨어진 윤 감독의 드라마는 도하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역시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기에 내색은 안 해도 굳이 정군에게 온 오디션까지 훑어서 연령을 올린 역할을 찾아 준 매니저가 고마웠다.
“이게 무슨 드라마예요?”
“이 소개만 보면 무슨 드라마 같아?”
“음……. 퇴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