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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2화

#1 (2)





매니저는 분명 그가 ‘한 방’을 만나면 크게 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수는 없었다. 무언가 하나라도 많은 사람에게 얼굴을 비출 만한 작품 하나를 물어다 주고 싶었다.

회사에 가면 쌓여 있는 것이 대본이다. 도하는 아직 차기작으로 결정된 작품이 없었고 호영은 윤 감독의 작품에 들어간다. 그 시기에 맞춰서, 혹여나 동시 촬영을 할 가능성이 있으니…….

“가능하면 박호영이 넘보지 않을 만한 작품으로.”

액셀을 밟은 매니저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



“도하 오빠!”

입 한가득 고기쌈을 물고 우물거리던 도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은 사람은 3개월간 자신과 함께 나이에 맞지 않는 교복을 입고 연기했던 여주인공 역의 은하였다. 벌써 취했는지 얼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도하가 잠깐만 기다리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은하가 웃으며 “천천히 먹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햄스터처럼 볼이 빵빵하게 오른 도하의 얼굴을 보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오빠, 볼 찔러 봐도 돼요?”

취기에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은하를 보고 기겁하며 도리질 쳤다. 몇 번을 더 우물거리더니 목 안으로 삼켜 낸 도하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넌 벌써 술 톤이네.”

“오빠는 안 마시고 계속 고기만 먹었잖아요. 오빠 빼고 다 술 톤이다!”

둘러보니 정말 자신을 뺀 모두가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어린 배우들은 먼저 보내서 다행이었다. 취기에 실없이 웃어 대는 어른들 사이에 있는 것은 고역일 테니까 말이다.

‘이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는 것이 나의 임무인가.’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 같아서 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오빠?”

팔을 툭툭 치며 묻는 말에 그냥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무사히 집에 도착하길 기도하고 있어.”

“하하하하, 불가능해요! 오늘 여기서 다 죽는 거야!”

은하가 크게 웃으며 도하의 허벅지를 아프게 때렸다.

‘얘는 왜 이렇게 손이 매워.’

도하는 팍팍 소리가 나게 맞은 부위를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은하는 그 모습과 자신의 손바닥을 번갈아 보다가 “오빠도 한 잔 더 하세요.” 하고 말하며 아까 새로 내온 소주병을 손에 들었다.

배가 고파서 며칠 굶은 사람처럼 고기만 집어 먹었지만 술도 당겼었다. 도하는 첫 잔만 비운 술잔을 다시 들었다.

“노노.”

“노노……?”

무슨 말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하를 보자 손에 잡힌 술잔을 빼앗더니 대뜸 초록색 소주병을 쥐여 주었다.

“원샷, 원샷!”

“미쳤어?”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일정한 박자로 박수를 치기 시작한 은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놀라 잠시 입술을 만졌다. 하지만 도하가 당황하든 말든 은하는 신나게 손뼉을 치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여러분, 도하 오빠가 소주 원샷에 도전합니다!”

“은하야……!”

“오오! 윤도하! 윤도하!”

취기가 오른 사람들은 말 한마디에 쉽게 넘어가 분위기를 탔다.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던 스태프들도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면서 시선을 옮겨 도하의 이름을 외쳐 댔다. 은하를 중심으로 배우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다.

역시 여기서 제일 멀쩡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도하는 한숨을 내뱉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런 곳에서는 멀쩡하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멋지다!”

“잘생겼다!”

“알아요!”

잘생겼다는 말에 대답하자 다들 와하하 웃어 댔다. 원샷은 몸을 망치니까 불가능했지만, 분위기를 타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도하가 입구에 입을 대고 맑은 술을 목 안으로 쏟아 내자 오오, 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환호성이 울렸다.

조금만 마시고 장난스럽게 끝낼 생각이었는데, 술이 한 모금씩 목을 넘어갈 때마다 아까 전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목마름에 식도가 바싹바싹 타는 기분이었다.

회사 건물에서 만날 때마다 겁에 질린 토끼처럼 피하던 호영의 모습. 그를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팀장, CF, 이번에 넘어간 역할.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흘러갔을 것이 분명한 기회들.

‘아니지, 아니야. 내 기회가 아니라 호영이 기회였던 거야.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그렇게 되뇌는 사이 입가에 흐른 두세 방울을 제외한 모든 술이 식도를 바싹 태우고 지나갔다. 급하게 마신 탓에 취기가 금세 올랐다.

“오오오! 윤도하! 윤도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원샷 하는 멋지고 잘생긴 윤도하가 되겠습니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에 도하가 입가를 닦던 손바닥을 뺨에 대었다. 뜨끈뜨끈한 열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옆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은하가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입을 빼쭉 내밀며 노려보자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아, 재밌었다. 재밌었는데, 이제 끝이구나.”

한 참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은하가 섭섭한 듯 조용히 말했다.

“오빠, 오빠는 다음 작품 정해졌어요?”

“아직. 너는?”

“저도요.”

은하는 스테인리스 컵 안에 있는 물을 빙글빙글 돌리며 미소 지었다. 넘실거리는 투명한 물을 바라보다가 한 모금 마셔 입을 축였다. 그러다 무언가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요, 웹 드라마 제의 들어왔을 때 원래 봤던 오디션이 있어서 그거 결과 기다린다고 거절했었거든요. 실제로 그 드라마 붙기도 했고. 조연이지만 웹 드라마 주연보다는 TV 드라마 조연이 낫잖아요. 그래서 막 기대했는데, 갑자기 떨어졌다고 다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거의 억지로 여기 들어오게 된 건데…….”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려 말을 멈췄다. TV에서 나는 소리였던 듯 음량을 줄이라는 손님들의 요구에 TV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컵 안을 보던 은하가 아까의 소리에 놀라 도하의 뒤에 있는 벽에 걸린 커다란 TV를 보았다. 말을 잇지 않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 시선을 따라 TV를 보았다.

케이블 드라마가 한창 방영 중이었다. 재방송인 것 같았다. 젊은 남배우와 베테랑 조연 배우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더니 곧 탄탄한 팬층을 바탕으로 점차 활동을 넓히고 있는 여자 아이돌로 화면이 옮겨졌다. 굳은 표정이 인상적이다. 바르지 못한 발음과 어색한 발성이 어우러진 소리가 시끄러운 고깃집 소리에 묻혔다.

도하는 다시 은하를 보았다. 그녀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가슴 깊은 곳까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아까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에 도하는 가볍게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엄청 좋았어요. 나 첫 주연이 이 드라마라서 너무 좋아요. 오랜만에 교복도 입어 보고, 대사도 많이 쳐 보고, 스태프들도 다 좋고. 또 상대역이 도하 오빠여서 좋았어요. 솔직히 저 배우보다 오빠가 100배는 더 잘생겼어!”

은하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서 아이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에 도하도 똑같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래, 내가 제일 잘생겼지.”

겸손 없는 말에 또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취기가 아직 남아 있는지 발그레해진 뺨을 손등으로 훑던 은하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음에도 좋은 작품 만나면 좋겠어요.”

“네가 즐겁게 연기할 수 있으면 그게 다 좋은 작품이지 뭐.”

“맞아요, 맞아요.”

도하는 힘차게 끄덕이던 은하를 보며 ‘목 안 아픈가?’ 생각하다가 뒤로 넘어가는 모습에 놀라 뒤통수에 손을 받쳤다. 쿵 하고 벽에 닿은 손등이 살짝 쓰렸다. 은하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푸흐흐 하며 입술을 털며 웃었다. 술이 안 깬 것은 확실했다.

“다음에는 내가 딴 역할 내가 하고 싶다.”

옆에 앉아 있던 도하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였다. 감정이 눌린 목소리가 안타깝기도 하고 공감도 갔다.

도하는 컵에 물을 한가득 따라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은하는 꾸벅 목 인사를 하고는 물을 한 번에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줄줄 턱을 타고 내려오는 물을 팔뚝으로 쓱 닦으며 “난 성공한다!” 하고 외쳤다.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최은하! 최은하!” 하고 구호처럼 외치자 도하도 그 흐름을 탔다.

은하가 벌떡 일어나 더 힘차게 소리쳤다.

“우리는 성공한다!”

회식 자리의 분위기는 최고조로 물들고 있었다.



***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물을 마시는 스태프들과 대리운전을 부르는 배우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다들 널브러져서 제 몸도 못 가눌 줄 알았건만 돌아갈 정신머리는 남겨 놓은 모양이다.

도하도 술기운을 날리기 위해 양 손바닥으로 뺨을 짝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게진 뺨 위로 다시 한 겹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

“윤 배우, 다음에도 잘 부탁해!”

“네. 다음에도 꼭 불러 주세요! 그때는 좀 덜 마른 역할로!”

“하하하하! 그래, 그래.”

갈 준비를 하는 도하의 모습에 감독이 다가와 호탕하게 웃었다. 이번에 맡은 역할이 학생이기도 했고 슬림한 체형에 날카로운 인상이라는 설정이라서 다이어트를 했었다. 그렇다고 너무 빼면 얼굴이 나이 들어 보이니까 적당하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 힘들었다.

오늘 회식 자리에서 고기만 열심히 주워 먹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 감독은 어깨를 팡팡 치고는 손을 흔들었다. 은하도 그랬지만 감독 또한 손이 참 매웠다. 도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