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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개비 1화

#1 (1)





초봄에 찍기 시작한 웹 드라마의 크랭크업 시기가 되었다.

시린 바람과 꽃가루를 맞으며 징징대던 때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여름이다. 재채기를 불러일으켜 질색했던 꽃이었지만 오늘 받은 꽃다발은 마냥 예쁘기만 했다. 한 송이씩 눈에 담고 있자 카메라가 다가와 아쉽게 미소를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VJ의 인사에 도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도하 씨, 소감 한마디 부탁드려요.”

간단한 메이킹 촬영에 도하는 꽃을 고쳐 안고 카메라를 직시했다. 렌즈에 반사된 모습을 보니 다시금 허전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스물여덟이 되어 교복을 또 입었는데 이렇게 끝나는 게 아쉽네요.”

짙은 눈썹을 모아 한껏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용으로 제작한 특이한 디자인이었지만 꽤나 마음에 들었던 복장이었다.

“정말 학생 시절로 돌아간 느낌도 들었고 현장에 어린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지 젊은 기를 많이 받아 회춘한 기분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진심을 듬뿍 담은 미소와 함께 꾸벅 인사를 하자 VJ도 가볍게 목례하고 자리를 옮겼다.

VJ 뒤편으로 빨빨거리며 지나가는 학생 역 배우들을 보자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옹기종기 모여서 손 선풍기를 틀어 놓고 수다를 떠는 모습이 귀여운 토끼들 같았다. 재밌는 현장이었다. 이 나이에 다시 학생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신선하고 좋았다.

도하는 꽃다발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고 발을 돌렸다. 말을 걸어오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가볍게 목례와 한마디씩을 건네며 느긋하게 차로 돌아왔다.

아까 팬에게 받은 선물 상자와 쇼핑백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뒷좌석에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앞좌석을 보니 어느새 운전석에 앉은 매니저가 도하를 돌아보았다.

“형, 저 회식 갈 거예요! 쫑파티, 쫑파티! 말리지 말아요!”

매니저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도하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신이 난 도하의 목소리에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네가 말린다고 안 가는 애냐?” 체념이 가득한 말에 헤헤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그, 저번에 봤던 오디션 말이야.”

옷을 갈아입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저번에 봤던 오디션?’ 도하는 기억을 되짚어 봤다. 하도 많이 봐서 뭐가 뭔지 솔직히 잘 기억은 안 났다.

‘영화? 드라마? 조연 오디션을 봤던 그건가.’

도하는 다시 손을 움직이며 ‘응’이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뜸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떨어졌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한두 번도 아닌 일이기에 도하는 덤덤했다. 침울하긴커녕 오랜만에 회식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

“왜요, 떨어졌다고? 나 6년 동안 오디션 떨어진 적 많은데 뭘 그렇게 뜸 들여. 나 윤도하 오디션 떨어졌다고 기운 빠지는 사람이 아니란 거 잘 알잖아요. 어떤 오디션 얘기하는 건데?”

벨트를 푸는 소리와 함께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아까 한가득 품고 있던 아쉬움이 한 톨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오랜 세월 반복해서 받아 보는 불합격 통지표는 더 이상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웹 드라마에서 꾸준히 주연을 맡고 있었고 지인들을 통한 단역 출연도 많이 하고 있다. 자신을 알아봐 주고 챙겨 주는 팬들도 생겼다. 메인스트림에 발을 들이지 못하더라도 도하는 지금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소속사에서는 들들 볶으며 그보다 늦게 데뷔한 후배들 앞에서 비교를 하곤 했다. 도하는 그때마다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기보다는 “후배들이 더 유능하니까요.” 하고 넉살 좋게 웃어넘겼다. 해탈이기도 했고, 자조이기도 했다.

“윤정 감독의 드라마 말이야. 너 빌런 역으로 오디션 봤던 거. 그거 박호영한테 넘어갔어.”

“뭐? 넘어가?”

박호영은 지금 팀장이 밀고 있는 신인 배우였다. 스물두 살에 입사하자마자 찍었던 이온 음료 CF에서 예쁘장한 외모가 엄청난 화제를 끌어모아 단번에 라이징으로 올라섰다. 그 후로 2년간 쉴 틈 없이 일해 이 작은 회사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온화하게 듣던 도하는 ‘호영에게 넘어갔다’라는 말에 튕겨 나가듯 앞좌석 의자에 바싹 붙어 매니저를 노려보았다. 뱃속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매니저가 인상을 구겨 험악한 표정이 된 도하를 보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저렇게 열 낼 것을 예상하였다. 도하가 호영에게 자리를 뺏긴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영이 처음으로 찍은 CF도 원래는 도하 앞으로 컨택이 와 있던 것이었다. 당시 도하는 웹 드라마에서 청량한 이미지의 운동선수 역을 맡고 있어 이온 음료의 컨셉과 알맞았다. 미팅 날, 음료 회사 담당자도 선이 굵고 진한 이목구비인데 소년 같은 표정을 짓는 도하가 맘에 든다고도 했다.

잘만 성사되면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도하는 그동안 버려두었던 기대감을 주워 담았다. 지금에 만족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CF는 호영에게 넘어갔다.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도하와 호영은 무명이라는 점에서 비슷했지만, 객관적으로 따지면 도하 쪽이 더 사람들에게 먹힐 만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경험도 많았고 연기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 CF는 막 들어온 2개월짜리 신인에게 갔고 그것으로 호영은 지금 ‘뜨는 스타’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는데 이번에 또 빼앗긴 것이다. 도하는 크게 심호흡했다.

윤정 감독은 장르물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도하는 윤 감독의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볼 정도로 좋아했다. 그래서 이번에 오디션을 보게 되었을 때도 긴장되는 만큼 준비도 많이 했다. 매력적인 악역을 몇 안 되는 설정 내에서 분석하고 또 했다. 그동안 수없이 보았던 오디션 중에서 제일 집중했던 기간이었다.

그냥 떨어졌다는 소식만 들으면 훌훌 털어 버렸을 텐데, 윤정 감독의 드라마에 운명처럼 박호영이 캐스팅됐다.

아니, 이번에는 아닐 거다. 호영이가 오디션을 봤을 수도 있지. 도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훑어 내리며 머리를 식혔다. 구겼던 인상을 펴고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쉰 후 큰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의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감독님께서 호영이가 더 마음에 드셨나 보네.”

나직하게 말하는 도하의 목소리에 매니저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도 화가 나 호영의 담당 매니저와 크게 말싸움을 했는데 도하는 잠시 화를 내나 싶더니 금방 식어 버린다.

팀에서 의도적으로 도하에게 온 일을 빼돌린다는 것은 진작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니라 발뺌을 하더라도 여러 번 반복이 되면 누구라도 의심을 할 것이다. 매니저가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앞으로 받았던 오디션 대본들도 뺏긴 적이 많이 있었다.

도하는 팀 내에서 낙동강 오리 알 같은 신세였다. 처음에 팀장에게 밉보인 것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스폰서요? 제가요? 왜요?’

젊은 놈의 패기라면 패기였다. 스폰서가 없는 연예인들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젊은 무명들은 어떻게든 동아줄을 잡으려 애를 썼다. 당시엔 아직 소속사도 지금보다 작은 편이었기에 간판스타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다.

마침 도하의 잘생긴 얼굴과 큰 키를 마음에 들어 하는 스폰서가 나타나 제안을 했고 팀장 역시 소속 배우 중 가장 눈에 띄는 도하를 간판스타로 만들고 싶어 했던 터라 살살 달래 가며 애를 썼다.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뻥 하고 발로 차 버렸다. 그와 동시에 팀장의 신뢰도 같이 저 먼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시절이다. 스폰서 없이도, 팀장의 편애 없이도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20대 초반의 윤도하. 지금도 그 선택에 큰 후회는 없지만…….

‘아니, 없나?’

매니저는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도하를 돌아보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도하가 의상과 가방을 챙기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차 문을 열었다. 아까 험악하게 인상을 썼던 사람이라고 상상도 안 되는 즐거운 표정이다.

“형은 회사 들렀다 올 거지?”

밖으로 나가 얼굴만 빼꼼 보이며 물었다. 후회는 없어 보였다. 매니저가 봐 왔던 윤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도하는 말없이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는 매니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왜, 맨날 봐도 새롭게 잘생긴 얼굴이라 넋 나갔어요?”

“으휴, 말이나 못 하면. 난 안 가. 너나 실컷 먹어라!”

“어어, 실컷 먹으라고 했다?”

도하가 차 문을 닫으며 신나게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에 매니저가 다급하게 창문을 내렸다.

“아니야, 조금만 먹어!”

그는 뒤에서 소리치는 매니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 들려요!” 하고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멀어져 갔다. 더없이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매니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동을 걸었다.

군대도 다녀온 놈이고, 얼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잘생겼고, 연기도 웬만한 배우들보다 잘했다. 본인 성격도 서글서글해 트러블을 일으킨 적도 없는데 계속 기회를 빼앗기기만 한다. 명랑한 성격이지만 갈수록 자조적인 면이 늘어가는 게 보여 마음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