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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돌지 않는다.

4화





어처구니없게도 그날 저녁 메뉴는 감자 샐러드였다. 루이자는 이대로 가다간 곧 제 몸뚱어리에서 감자 꽃이 필 것 같다며 투덜거렸지만 제 몫으로 나온 음식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녀는 에스델의 몫으로 나온 음식까지 눈독을 들였으나 보다 못한 주방장 셰토 씨가 그녀에게 설거지나 하라며 주방으로 쫓아내는 걸로 마무리됐다.

저녁 식사 후 에스델은 자작 부부를 위해 그들이 가끔 즐겨 마시는 데이지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데이지 차는 찻잎 중 따지고 보면 그리 귀한 것도 아니건만, 가난하고 작은 마을인 레빈에선 이조차도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이가 흔하지 않았다.

사실 에스델이 차를 끓일 기회는 별로 없었다. 자작 부부가 차를 매일 마시는 것도 아닐뿐더러 평소에는 그녀보다 연차가 높은 하녀가 도맡아 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를 담당하던 하녀는 본가에 일이 생겨 출타했고,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집사 하인즈는 어쩔 수 없이 제 곁을 지나가던 에스델에게 차를 준비해 오라 부탁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주방장 셰토도 그녀의 손끝이 야무지다며 칭찬한 아이니 그 정도쯤이야 별 무리 없을 것이라 여기며.

알맞은 온도의 뜨거운 물을 찻잎에 붓자 모락모락 한 김과 함께 향긋한 꽃향기가 우러났다. 에스델이 그 향을 마음껏 맡으며 눈을 감았다. 온몸에 쌓였던 피로가 살짝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 난로 곁에서 이 향긋한 차를 마시며 하루를 마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의 쥐꼬리만 한 임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몬에 물을 탄 듯 연한 맑은 노란 빛을 띠면 찻잎을 건져 내라고 했지.’

행여나 비싼 차를 엉망으로 끓여낼까 걱정된 에스델은 단 1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또 다른 하녀 한 명이 다가왔다.

“차는 준비됐니?”

“아, 네. 안 그래도 지금 딱 알맞게 우려진 것 같아요.”

그 말에 하녀는 에스델의 어깨너머로 맑은 노란 빛의 액체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알맞게 우려진 것 같네. 찻잎은 건져 내고.”

“네.”

에스델이 조심스럽게 찻잎을 건져 냈다. 금을 두른 고풍스러워 보이는 쟁반 위 찻잔과 찻주전자, 그리고 조각 설탕을 먹음직스럽게 담은 접시를 올려놓았다. 수고했어, 하고 그 하녀가 쟁반을 받아 들곤 사라졌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이렇게 끝나는 듯했다. 에스델은 자리를 정리하고 건져 낸 찻잎을 버리려 쓰레기통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탕, 하고 꽤 과격하게 문이 열리며 루이자가 들어섰다.

“오, 이 향긋한 꽃향기. 이번에는 뭐야? 데이지 차?”

“응. 안 그래도 지금 막 가져갔어.”

“그래? 근데 웬일로 너한테 부탁하셨대?”

“알잖아. 데니스 언니 본가에 일 생겨서 간 거.”

“아 맞다. 깜빡했네.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루이자가 별로 걱정스럽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귀족들은 정말 다른가 봐. 마시는 물도 달콤해야 하는 걸 보면. 도대체 차라는 건 무슨 맛일까? 정말 이 향처럼 향긋한 걸까?”

루이자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에스델 역시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순간 루이자가 에스델의 손에 쥐고 있는 찻잎들을 발견했다.

“잠깐, 그거 데이지 찻잎이야?”

“아, 응. 지금 막 버리려고.”

에스델이 쓰레기통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자 루이자가 급히 그녀를 막았다. 그녀의 두 눈은 무언가 위험한 발상을 한 듯 반짝였다.

“잠깐, 잠깐만. 너 데이지 차 마셔 본 적 없지?”

“그거야 당연히…….”

아무리 마시고 싶다 해도 제 주인 것을 훔쳐 마셨을까. 에스델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루이자의 의중을 모르겠던 에스델은 점점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이자의 반짝이는 눈. 자신의 손에 쥐어 있는 우려진 찻잎. 귀족 내들의 달콤한 차를 마셔보고 싶은 두 명의 하녀. 그리고 조용한 주방.

“안 돼.”

루이자의 의중을 읽은 에스델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루이자. 절대 안 돼.”

“안 될 게 뭐야. 어차피 버리려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버릴 거면 훔치는 것도 아니고, 오늘 온종일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아까 그 침구 옮기느라 삭신이 다 쑤시는데…….”

루이자가 일부러 과장해서 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리고 사실 자작 부인도 우리가 이러길 바라실 거야.”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정말 그러셨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잘 아신다면 그러실 거라는 거지.”

루이자는 이상한 논리를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솔직히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이런 사치스러운 물을 마셔보겠어? 그리고 귀족 가에서 일하면 이 정도 포상 정도는 떨어져도 되는 거야.”

사실 그녀 말대로 차를 우려낸 찻잎은 더는 쓸모가 없긴 했다. 정말 괜찮은 걸까? 고민하는 에스델을 두고 루이자는 찬장에서 투박해 보이는 컵 하나를 꺼낸 뒤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곧 삐이― 하고 희미하게 물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델, 빨리.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자작 부인도 원할 거라더니 루이자는 행여 누군가에게 들킬까 에스델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고민했으나 에스델 역시 데이지 차의 맛이 궁금하긴 매한가지.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잎을 컵 안에 부었다. 기다렸다는 듯 루이자가 곧바로 뜨거운 물을 따랐다. 처음에 우렸을 때보단 훨씬 약하지만, 여전히 향긋한 데이지 향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이거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 거야?”

“맑은 노란 물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돼.”

“맑은 노란 물? 노랗다기보단 좀 초록빛이 나는 것 같은데…….”

루이자의 말대로 그녀의 컵 속 차는 초록 빛깔을 띠고 있었다. 덜 우려져서 그런 건가 싶어 내버려뒀더니 점점 더 진한 초록빛을 내기 시작했다. 향도 살짝 더 진해진 듯했다.

“내가 봤을 땐 아무래도 이게 최선인 것 같아. 한 번 마셔보자.”

루이자가 두 손을 비비며 즐거운 듯 말하곤 컵을 들었다. 그러곤 혹 데일라 후후 불다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얼마나 달콤하다고 할지, 에스델은 그 모습을 기대한 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웁. 이게 뭐야?”

루이자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것을 뱉어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녀는 들고 있는 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귀족들은 정말 이런 걸 즐겨 마신단 말이야?”

“왜? 별로야?”

“이건 진짜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우선 마셔 봐.”

루이자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컵을 건넸다. 에스델은 살짝 의아했으나 이내 컵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셔봤다. 처음에는 향긋한 향기가 코를 찌르며 기분 좋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주 떫고 쓴맛이 그녀의 목구멍을 통해 넘어갔다. 마치 쑥 같은 쓴맛의 풀잎에 후추와 모래를 섞어놓은 맛이랄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루이자는 이미 맹물로 입을 헹구는 중이었다.

“생각했던 맛이랑은 너무 달라.”

“맛? 이건 진짜 맛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해. 뭐 이런 걸 마시지? 귀족들은 미각도 다른가? 원한 있는 사람들한테나 내가는 거면 몰라도.”

“처참하긴 덜떨어진 네 머릿속이 더 처참한 것 같은데.”

그녀들의 등 뒤로 빈정거리는 말투가 들려왔다.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던 차 맛에 정신이 팔렸던 둘은 누가 주방에 들어선 것도 몰랐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자 어리석다는 표정을 지은 한스가 보였다. 그는 주방 안에서 풍기는 데이지 향과 그 둘 앞에 놓여 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보곤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한스 씨. 이, 이건 그러니까 생각하시는 거랑 다르거든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루이자가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어, 어차피 버릴 거였으니까 저희가 죄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맛이 좋았던 것도 아니라고요. 입맛만 버린 것 같아서 속상한데……. 자, 잠깐만,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처참하다고요? 지금 저희한테 처참하다고 하셨어요?”

횡설수설 설명하던 그녀가 갑자기 발끈하며 쏴 물었다. 한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려냈던 찻잎을 다시 우려내는 멍청이가 어딨냐? 찻잎을 제시간에 맞춰서 건져 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몰라? 설마 지금 마신 그 쓰레기 같은 게 참된 차 맛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무, 무, 물론 아니죠!”

루이자가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녀의 두 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알만 하다는 듯 츳, 하고 혀를 찬 한스는 시선을 곁에 조용히 서 있던 에스델에게 옮겼다.

“뭐, 넌 원래 그렇다 쳐도 에스델 너까지 이런 바보 같은 짓에 어울릴 줄은 몰랐는데. 하긴 끼리끼리 어울린다니까.”

“뭐라고요!”

“무슨 일이에요. 한스 씨?”

거세게 분노하는 루이자와 대조되게 에스델은 침착하게 물었다. 이 시간에 그가 용건 없이 주방에 찾아왔을 리는 없을 터. 한스는 그런 그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주시하다가 말했다.

“너희 둘 중 내일 아침에 시간 여유 좀 있는 게 누구야?”

“그건 왜요?”

“누구냐니까.”

“그거야 대답에 따라 다르죠. 이 저택에서 시간 여유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할 일이 산더민데.”

아, 혹시 이거 데이트 신청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방정맞게 묻던 루이자는 한스의 서늘한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조용해진 걸 확인한 한스가 말했다.

“헬레나 아가씨께서 부탁하실 게 있다는데 하녀 하나를 불러 달라 하시더군.”

“아가씨께서요?”

“그래. 아마 심부름시키시려는 것 같아.”

헬레나라 하면 자작가의 유일한 딸이자 한스가 모시고 있는 그레고리 도련님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헬레나는 자작가의 저택에서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작 부부와 그레고리의 관심과 걱정을 듬뿍 받고 자랐고 결국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제멋대로의 성격이 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