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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돌지 않는다.

5화





요즘 들어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경질적이고 까탈스럽게 군다며 불평하던 하녀의 모습이 기억났다. 루이자를 보니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에스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좀 바쁠 것 같은데. 다른 하녀한테 부탁하시는 게.”

“이미 물어봤는데 다들 하나같이 바쁘다더군.”

한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에스델과 루이자는 눈빛을 교환했다. 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데. 게다가 내일은 정말 할 일도 꽤 많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저희는 좀.”

“지금 너희가 거절할 상황이 아닐 텐데.”

한스가 냉혹한 얼굴로 협박하듯 말을 잘랐다.

“물론 그 쓰레기 찻잎으로 끓인 거라고 해도 이 일을 깍듯한 하인즈 씨가 알게 되면…… 글쎄. 그다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그다지 흠잡힐 만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한스의 협박 같은 말투에 둘은 덜컥 겁이 났다. 마치 둘이 무언가 값비싼 물건을 훔친 도둑이 된 것만 같은. 특히 요즘 들어 하인즈 씨에게 자주 책잡혔었던 루이자는 많이 당황했다. 한 번만이라도 더 걸리면 저택에서 쫓겨날 줄 알라던 하인즈의 엄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어머, 한스 씨. 언제 저희가 안 된다고 했나요. 바쁘다는 것뿐이지.”

“그럼 네가 갈 거야?”

“아, 그게 어, 안타깝게 전 내일 무지 바빠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서요! 아쉽지만 전 안 될 것 같아요. 일만 아니라면 갈 텐데! 아! 아쉽다!”

“그럼 에스델 네가?”

“저는.”

“그래, 에스델! 넌 내일 아침에 시간 좀 빈다고 했었잖아! 그치? 안 그래도 아까 내일 아침에 도와줄 일 있냐고 물었었고. 딱이네!”

루이자가 중간에서 황급히 말을 채 갔다. 에스델이 황당해하며 그게 무슨 소리냐 추궁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루이자는 기어코 못 본 척했다. 죽어도 신경이 날카롭게 선 어린 귀족 아가씨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사양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에스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는 엄청나게 바쁠 루이자보단 시간이 날 것 같네요.”

엄청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며 말했다. 그에 루이자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렸다. 사실 한스도 이 둘 중 에스델이 루이자보단 배로 열심히 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 수가 그리 많지 않아 누구는 어떻고 또 저렇다더라 하는 평은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녀를 위해 도와줄 이유도 없었던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그래. 그럼 난 에스델 네가 내일 아침 헬레나 아가씨께 가는 걸로 알고 있을게.”

뚜벅뚜벅.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한스는 주체하지 않고 그대로 주방을 나섰다. 루이자는 곁눈질로 흘끔 에스델을 보았다. 에스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

“…….”

“음. 에스델 감자 먹을래?”

비굴하기 짝이 없는 웃음.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다음 날 아침 에스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로 끼니를 때운 뒤 곧장 헬레나의 방으로 향했다. 행여나 괜히 트집이라도 잡힐까 싶어 여러 번 옷매무새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헬레나의 방은 저택 3층 복도 끝 쪽, 어떻게 보면 살짝 구석진 곳이라 말할 곳에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보통 저택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법이 없었고 또 제 방을 출입하는 사람들에 대해 유독 까다로웠기 때문에 일부러 그녀를 찾아가지 않는 이상 그녀와 얼굴을 마주칠 가능성이 희박했다. 사실 에스델도 헬레나를 마지막으로 제대로 본 지 꽤 된 참이었다.

헬레나의 방 앞에 도착한 그녀가 잠시 멈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내 결단을 내린 듯, 그녀가 조용히 문에 노크했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행여 안에 안 계신 건 아닐까 하고 의문을 품는 순간 방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네, 아가씨.”

에스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처음에 눈에 보인 것은 어딘가 푸른빛으로 디자인해 놓은 생각보다 조금 더 큰 방과 한쪽 코너에 놓여 있는 드레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새초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보다 살짝 앳돼 보이는 여자는 비단으로 만든 청록색의 가운을 입고 제 황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침 잘 됐네. 안 그래도 누가 머리 좀 빗겨 줬으면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에스델을 향해 빗을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빗은 진주 자개로 장식해 놓아 언뜻 봐도 가격이 꽤 나가 보였다. 헬레나는 빗을 건네주자마자 빙글 돌아앉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된 에스델이 머뭇거리자 헬레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쏘아보았다.

“뭐 해? 빗어 달라니까.”

“아. 저 그게…….”

“빗어. 또 말하게 하지 말고.”

헬레나가 단호하게 명령하며 다시 뒤 돌아앉았다. 타인의 머리는 루이자의 머리 빼고는 빗겨 본 적이 없었던 에스델은 잠시 주저했으나 거울을 통해 헬레나의 뾰족해지는 눈빛을 보곤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했다.

탐스럽고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은 보기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했다. 빗질에 전혀 엉킴 없이 스르륵, 손쉽게 빗겨졌다. 마치 흐르는 황금 물처럼 찰랑거리는 헬레나의 머리카락을 빗기며 에스델은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한참을 빗는데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네?”

“다른 애들은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찬양하느라 바쁘던데 넌 조용하구나. 네 기준에는 내 머리카락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가 보지?”

“네? 아, 아니에요.”

에스델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가씨. 매우 아름답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워서 할 말을 잊은 것뿐이에요. 제가 여태껏 봐 온 머릿결 중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래?”

“네. 주변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잔뜩 사시겠는걸요. 좋으시겠어요.”

에스델은 진심으로 칭찬했다. 그에 헬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곤 에스델을 쳐다보더니 이내 그녀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얼굴에 웃음이 폈다.

“그래. 네 말대로 난 타고난 편이긴 해. 하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지도로 나 자신을 꾸준히 가꿔 왔어. 숙녀라면 그 누구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꾸며 줘야 한다 생각해. 그렇지 않은 게으른 여인을 그 어느 신사 분께서 좋아해 주시겠어?”

그렇게 말한 헬레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에스델의 목덜미 쪽에 삐져나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파스락, 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마른 이파리처럼 바스락거렸다. 헬레나는 마치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털었다.

“만약 내가 너 같은 머리카락을 가졌더라면 난 정말 속상해서 울고 말 거야. 그 어떤 신사분께서 이런 머리를 은애해 주실까? 그런 면에선 난 정말 다행이지 싶어.”

에스델은 저도 모르게 빗질을 멈추었다. 뜬금없는 비하 발언에 어이가 없었으나 곧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녀의 두 뺨이 붉어졌다. 사실 에스델은 왕국에서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의 친한 친구들은 정열처럼 타오르는 불과 같다며 위로해 주려 했으나 대부분은 빨간 머리카락은 생피와 같다 여기며 불길하게 여겼다. 마치 검은 고양이는 불행을 불러온다는 미신처럼. 그 때문에 에스델은 어렸을 때 많은 놀림과 상처를 받았다.

한때는 자신도 헬레나와 같이 찬란한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신에게 열심히 기도도 드린 적도 있었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곤 그만두었지만. 그래도 에스델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푸석푸석한 빨간 머리카락을 보닛 모자 속에 모조리 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딱딱해진 에스델의 표정을 본 헬레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덧붙였다.

“어머. 걱정하지는 마. 넌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니잖니. 어차피 넌 사교계에 나갈 필요도 없고 신사분들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너는 이대로 지내다가 너랑 수준에 맞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살면 돼. 분명 네 주변에도 너의 이런 머리카락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을 거야. 특히, 평민들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잖아?”

위로를 하는 건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콕콕 박혔다. 다른 하녀들이 그녀를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라 꺼린 이유를 알겠다 생각하며 에스델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주제를 바꿨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실 게 있어서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부탁? 아아, 맞아. 너 한스가 보낸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루이자에게 떠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온 것이었지만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는 제 머리를 빗던 에스델의 손을 중지시키곤 진열돼 있던 향유 병을 건넸다. 받아 든 향유 병에선 고급스러운 향이 흘러나왔다. 에스델은 병을 기울여 적당량의 향유를 덜어 내어 헬레나의 머리에 발라 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좋은지 헬레나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녀는 노곤한 햇볕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눈을 살짝 감았다. 그 모습이 꽃처럼 고왔다.

‘계속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다면 참 사랑스러울 텐데.’

“그래서, 어떤 일을 부탁하시고 싶으신데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데.”

“네.”

헬레나가 살짝 뜸 들이는 듯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잠시 마을에 좀 다녀와 줘야겠어.”

“마을에요?”

에스델의 물음에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알다시피 곧 있으면 난 얼마 전에 성년이 됐어. 그러니 곧 헬름홀에서 주최되는 파티에 참석해 사교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딜 거야.”

헬레나가 살짝 기대에 찬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 말대로 헬레나는 얼마 전 여성으로서의 성년의 나이인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여느 귀족 여식들과 같이 하루라도 빨리 사교계에 데뷔하여 미래의 남편감을 물색할 예정이었다. 귀족 세계에선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레빈에는 자작가 딱 하나의 귀족 가문이 존재했기에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에스델에겐 사교계니, 파티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생소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