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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돌지 않는다.
3화
1부
대륙에는 열한 개의 국가가 존재했다. 그 국가 중에서도 가장 작고 힘없는 국가인 델라이트 왕국은 대륙의 남서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기름진 토지 대신 바위 밭과 메마른 땅이 대부분인 이곳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척박하고 먹고 살기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건 델라이트 왕국으로선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비옥한 땅이었다든지 아니면 혹 힘 있는 대제국 사이에 끼어 있었더라면 이 소왕국은 오래전 침략을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 때문에 주변 많은 국가가 서로 으깨 물고 짓이겨 대며 사라지고, 또 건국할 동안 델라이트 국민은 저들만의 땅에서 조용히 작은 평화를 즐기며 대를 이어왔다. 비록 삶은 고달프지만, 그들에게는 오백 년의 역사를 가진 델라이트 왕국을 향한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많은 국가들이 지식과 무력,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제 나라가 더욱 발전하고 강대해질 수 있을지에 힘을 쏟는 동안 델라이트 왕국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내년에 더 많은 수확을 내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생존 고민을 했다.
이렇기에 다른 왕국에서 방문한 많은 이들은 혀를 차며 델라이트 국은 아마 다른 대륙 국가들과 비교하면 많이 뒤처져 있다고 비웃곤 했다. 물론 델라이트 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니, 그들은 제 나라 밖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저 먼 곳 국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궁금증보단 당장 내일 아침 식탁 위에 빵 한 덩어리가 올라가 있을지 말지가 더욱 큰 관심사일 뿐이었다.
그 작은 델라이트 왕국 중에서도 남쪽 끝 변방에는 레빈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수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는 단 하나의 귀족 가문이 존재했다. 브루델 자작가. 현 가주의 오랜 조상이 델라이트 왕가에 어떠한 도움이 되어 귀족이 되었다고. 그게 언제 일인지. 혹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지 따위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브루델 가는 레빈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된 터줏대감이었다. 또한, 마을 내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귀족가였기에 자연스럽게 레빈 마을 사람들은 브루델 가를 ‘태생부터 다른 귀한 이들’ 이라 여기며 암묵적으로 존경하고 따라왔다. 브루델 가 역시 가주들이 대를 이어오며 자연스럽게 이 마을을 다스리는 역할을 도맡아 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일이었기에 브루델 가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물 흐르듯, 그렇게 지나갈 뿐이었다.
에스델은 그런 브루델 가문에서 일하는 여러 하녀 중 하나였다. 비록 아주 어렸을 때 그녀는 고아가 되었지만 듣기로는 그녀의 어머니도,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도 브루델 가문에서 하녀로 일해 왔다고. 대부분의 레빈 사람들처럼 에스델 역시 아무런 이의 없이 당연하게 제 부모들의 행적을 따라 브루델 가문에 하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작 열한 살 되던 나이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았지만 어린 그녀로선 그조차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7년이 흐르고, 어느덧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열여섯 살이 된 후로도 벌써 2년이나 훌쩍 지난 나이.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브루델 가문의 하녀였다. 월급은 아주 약간만 올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제 인생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지가 멀쩡히 달려 있고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여겼다. 만일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죽을 때까지 쭉 브루델 가문의 하녀로서 살다 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 ◆ ◇
“에스델, 다 했니?”
널어놓았던 이불들을 도로 걷어 내는 에스델의 등 뒤로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가벼운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와 햇볕이 너무 따뜻하다. 오늘 날씨 아주 좋은걸? 네 말대로 오늘은 이불 널어놓기에 최적인 것 같아.”
브루델 가 하녀들 중 에스델과 유일하게 동갑인 루이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직 줄에 널어 있는 이불 끝자락을 만져 봤다.
“뽀송뽀송하게 말랐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이불도 같이 말릴걸! 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안 돼, 루이자. 곧 있으면 해가 질 테고 그럼 우린 오늘 밤 이도 저도 아닌 눅눅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해. 아쉽지만, 우리 건 다음에 말리자.”
에스델이 웃으며 말했다. 루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으나 여전히 미련스러운 표정으로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에스델이 마지막 이불을 걷어 내 바구니에 넣었다. 이제 그것들을 갖고 올라가 정리해야 할 차례였다.
“도와줄게.”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바구니의 한쪽을 잡으며 루이자가 말했다. 그렇게 둘은 천천히 바구니를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힘겹게 끙끙대며 계단을 오르던 루이자가 구시렁댔다.
“하필 맨 꼭대기 층에 침구를 정리해 놓는 이유는 또 뭐람. 아휴. 무거워. 이런 잡일들은 사내들을 시켜야 하는데.”
“음. 그건 힘들지 않을까?”
에스델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루델 가에는 일곱 명의 하녀가 일하고 있었지만, 하인은 집사를 포함해 고작 셋뿐이었다. 집사는 나이가 지긋했고 다른 하나는 몹시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인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갈색 머리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위층에 서서 그녀들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루이자가 얼굴을 활짝 피며 말했다.
“한스 씨! 안 그래도 덕 좀 봤으면 좋겠다 생각 중이었어요. 널어놓은 이불을 침구 함에 가져다 놓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보다시피 무게도 꽤 나가고 침구 함은 저택 꼭대기 층에 있잖아요.”
“그런데?”
“네? 그러니까, 에스델이나 저는 가냘픈 여인들이고…….”
스스로 가냘프다는 말에 한스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나더러 도와 달라고 말하는 거야?”
“네!”
루이자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한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갑게 거절의 말을 내뱉은 그는 곧장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루이자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이내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만약 나올 수만 있었다면 그녀의 양쪽 귀에서 연기가 나오리라고 에스델은 생각했다.
“아니,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한두 번도 아니고, 너도 참.”
에스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스는 그들과 같은 고용인 신분임에도 콧대가 높기로 유명했다. 루이자는 그 이유가 한스가 부르델 가문 도련님의 곁에서 직접 시중을 들다 보니 마치 저 자신이 귀족이 된 듯한 착각을 하고 있어서라 했다.
사실 한스의 주된 임무는 도련님의 사냥 시중을 든다든지 아니면 검술 대련을 돕는다든지 하는 어찌 보면 다른 이들보단 조금 고상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무술을 배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암암리에 그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사실 3년 전쯤 이 마을에 슬그머니 나타난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는 가끔 고용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는 것조차 꺼리는 듯한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 이불감을 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차라리 당나귀에게 하늘을 날아 보라고 제안하는 게 더 현실감 있지 않을까.
“자기도 우리랑 같은 고용인 신분인 주제에 하는 싹퉁머리가 없어!”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에스델, 넌 방금 그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정말 도련님이나 가주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저딴 쓰레기 같은 남자를!”
루이자는 발끈하며 화를 냈지만 한스는 이미 오래전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결국, 둘은 다시 끙끙대며 바구니를 옮겼다. 겨우 꼭대기 층에 다다른 그들은 침구들을 차곡차곡 개어 정리했다. 일을 마치고 송골송골 맺힌 땀을 옷으로 훔치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하느라 바빠 점심도 건너뛴 에스델의 배 속에선 밥을 달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사실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한 에스델을 잘 아는 루이자는 혀를 끌끌 차며 주머니 속에서 잘 삶아진 감자 두 알을 꺼냈다. 루이자는 그중 알이 큰 감자를 에스델에게 건네주었다.
“너 또 점심 걸렀지? 정말, 너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밥 안 먹으면 다 말짱 도루묵이야.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밥을 안 먹으면 어떡해?”
“어디서 난 거야?”
“주방에서. 너 또 굶는 것 같으니까 가져다주라고 하더라. 실은 이거 가져다주려고 온 거였었는데. 이왕 줄 거면 치즈 한 조각 정도도 같이 주면 얼마나 좋아.”
루이자가 들고 있는 감자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머뭇거리던 에스델도 그녀를 따라 감자를 한입 물었다. 이미 식었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익힌 감자는 배고플 때 먹어서 그런지 참 달게 느껴졌다.
“아아,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이려나?”
루이자가 창밖으로 여전히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다른 고민거리 없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일상의 그들에겐 코앞의 식사 메뉴가 최대의 궁금 거리였다. 제발 감자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고 중얼대는 루이자의 곁에서 에스델은 소리 없이 웃었다.
3화
1부
대륙에는 열한 개의 국가가 존재했다. 그 국가 중에서도 가장 작고 힘없는 국가인 델라이트 왕국은 대륙의 남서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기름진 토지 대신 바위 밭과 메마른 땅이 대부분인 이곳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척박하고 먹고 살기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건 델라이트 왕국으로선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비옥한 땅이었다든지 아니면 혹 힘 있는 대제국 사이에 끼어 있었더라면 이 소왕국은 오래전 침략을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 때문에 주변 많은 국가가 서로 으깨 물고 짓이겨 대며 사라지고, 또 건국할 동안 델라이트 국민은 저들만의 땅에서 조용히 작은 평화를 즐기며 대를 이어왔다. 비록 삶은 고달프지만, 그들에게는 오백 년의 역사를 가진 델라이트 왕국을 향한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많은 국가들이 지식과 무력,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제 나라가 더욱 발전하고 강대해질 수 있을지에 힘을 쏟는 동안 델라이트 왕국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내년에 더 많은 수확을 내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생존 고민을 했다.
이렇기에 다른 왕국에서 방문한 많은 이들은 혀를 차며 델라이트 국은 아마 다른 대륙 국가들과 비교하면 많이 뒤처져 있다고 비웃곤 했다. 물론 델라이트 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니, 그들은 제 나라 밖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저 먼 곳 국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궁금증보단 당장 내일 아침 식탁 위에 빵 한 덩어리가 올라가 있을지 말지가 더욱 큰 관심사일 뿐이었다.
그 작은 델라이트 왕국 중에서도 남쪽 끝 변방에는 레빈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수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는 단 하나의 귀족 가문이 존재했다. 브루델 자작가. 현 가주의 오랜 조상이 델라이트 왕가에 어떠한 도움이 되어 귀족이 되었다고. 그게 언제 일인지. 혹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지 따위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브루델 가는 레빈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된 터줏대감이었다. 또한, 마을 내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귀족가였기에 자연스럽게 레빈 마을 사람들은 브루델 가를 ‘태생부터 다른 귀한 이들’ 이라 여기며 암묵적으로 존경하고 따라왔다. 브루델 가 역시 가주들이 대를 이어오며 자연스럽게 이 마을을 다스리는 역할을 도맡아 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일이었기에 브루델 가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물 흐르듯, 그렇게 지나갈 뿐이었다.
에스델은 그런 브루델 가문에서 일하는 여러 하녀 중 하나였다. 비록 아주 어렸을 때 그녀는 고아가 되었지만 듣기로는 그녀의 어머니도,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도 브루델 가문에서 하녀로 일해 왔다고. 대부분의 레빈 사람들처럼 에스델 역시 아무런 이의 없이 당연하게 제 부모들의 행적을 따라 브루델 가문에 하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작 열한 살 되던 나이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았지만 어린 그녀로선 그조차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7년이 흐르고, 어느덧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열여섯 살이 된 후로도 벌써 2년이나 훌쩍 지난 나이.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브루델 가문의 하녀였다. 월급은 아주 약간만 올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제 인생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지가 멀쩡히 달려 있고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여겼다. 만일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죽을 때까지 쭉 브루델 가문의 하녀로서 살다 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 ◆ ◇
“에스델, 다 했니?”
널어놓았던 이불들을 도로 걷어 내는 에스델의 등 뒤로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가벼운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와 햇볕이 너무 따뜻하다. 오늘 날씨 아주 좋은걸? 네 말대로 오늘은 이불 널어놓기에 최적인 것 같아.”
브루델 가 하녀들 중 에스델과 유일하게 동갑인 루이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직 줄에 널어 있는 이불 끝자락을 만져 봤다.
“뽀송뽀송하게 말랐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이불도 같이 말릴걸! 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안 돼, 루이자. 곧 있으면 해가 질 테고 그럼 우린 오늘 밤 이도 저도 아닌 눅눅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해. 아쉽지만, 우리 건 다음에 말리자.”
에스델이 웃으며 말했다. 루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으나 여전히 미련스러운 표정으로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에스델이 마지막 이불을 걷어 내 바구니에 넣었다. 이제 그것들을 갖고 올라가 정리해야 할 차례였다.
“도와줄게.”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바구니의 한쪽을 잡으며 루이자가 말했다. 그렇게 둘은 천천히 바구니를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힘겹게 끙끙대며 계단을 오르던 루이자가 구시렁댔다.
“하필 맨 꼭대기 층에 침구를 정리해 놓는 이유는 또 뭐람. 아휴. 무거워. 이런 잡일들은 사내들을 시켜야 하는데.”
“음. 그건 힘들지 않을까?”
에스델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루델 가에는 일곱 명의 하녀가 일하고 있었지만, 하인은 집사를 포함해 고작 셋뿐이었다. 집사는 나이가 지긋했고 다른 하나는 몹시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인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갈색 머리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위층에 서서 그녀들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루이자가 얼굴을 활짝 피며 말했다.
“한스 씨! 안 그래도 덕 좀 봤으면 좋겠다 생각 중이었어요. 널어놓은 이불을 침구 함에 가져다 놓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보다시피 무게도 꽤 나가고 침구 함은 저택 꼭대기 층에 있잖아요.”
“그런데?”
“네? 그러니까, 에스델이나 저는 가냘픈 여인들이고…….”
스스로 가냘프다는 말에 한스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나더러 도와 달라고 말하는 거야?”
“네!”
루이자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한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갑게 거절의 말을 내뱉은 그는 곧장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루이자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이내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만약 나올 수만 있었다면 그녀의 양쪽 귀에서 연기가 나오리라고 에스델은 생각했다.
“아니,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한두 번도 아니고, 너도 참.”
에스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스는 그들과 같은 고용인 신분임에도 콧대가 높기로 유명했다. 루이자는 그 이유가 한스가 부르델 가문 도련님의 곁에서 직접 시중을 들다 보니 마치 저 자신이 귀족이 된 듯한 착각을 하고 있어서라 했다.
사실 한스의 주된 임무는 도련님의 사냥 시중을 든다든지 아니면 검술 대련을 돕는다든지 하는 어찌 보면 다른 이들보단 조금 고상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무술을 배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암암리에 그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사실 3년 전쯤 이 마을에 슬그머니 나타난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는 가끔 고용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는 것조차 꺼리는 듯한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 이불감을 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차라리 당나귀에게 하늘을 날아 보라고 제안하는 게 더 현실감 있지 않을까.
“자기도 우리랑 같은 고용인 신분인 주제에 하는 싹퉁머리가 없어!”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에스델, 넌 방금 그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정말 도련님이나 가주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저딴 쓰레기 같은 남자를!”
루이자는 발끈하며 화를 냈지만 한스는 이미 오래전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결국, 둘은 다시 끙끙대며 바구니를 옮겼다. 겨우 꼭대기 층에 다다른 그들은 침구들을 차곡차곡 개어 정리했다. 일을 마치고 송골송골 맺힌 땀을 옷으로 훔치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하느라 바빠 점심도 건너뛴 에스델의 배 속에선 밥을 달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사실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한 에스델을 잘 아는 루이자는 혀를 끌끌 차며 주머니 속에서 잘 삶아진 감자 두 알을 꺼냈다. 루이자는 그중 알이 큰 감자를 에스델에게 건네주었다.
“너 또 점심 걸렀지? 정말, 너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밥 안 먹으면 다 말짱 도루묵이야.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밥을 안 먹으면 어떡해?”
“어디서 난 거야?”
“주방에서. 너 또 굶는 것 같으니까 가져다주라고 하더라. 실은 이거 가져다주려고 온 거였었는데. 이왕 줄 거면 치즈 한 조각 정도도 같이 주면 얼마나 좋아.”
루이자가 들고 있는 감자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머뭇거리던 에스델도 그녀를 따라 감자를 한입 물었다. 이미 식었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익힌 감자는 배고플 때 먹어서 그런지 참 달게 느껴졌다.
“아아,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이려나?”
루이자가 창밖으로 여전히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다른 고민거리 없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일상의 그들에겐 코앞의 식사 메뉴가 최대의 궁금 거리였다. 제발 감자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고 중얼대는 루이자의 곁에서 에스델은 소리 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