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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돌지 않는다.

2화





퉁―!

……이게 무슨?

두 번째 공격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이클레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우연이라고 치더라도 두 번째 공격까지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마구잡이로 베어 낼 때 그의 검을 막아 낸 병사들도 여럿 있었지만 이 경우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누가 베이던지 상관이 없었기에 무작위로 퍼부었던 공격이었기에 가능했지만 이건 제대로 한 사람을 노리고 계산한 공격이었다. 게다가 현재 그는 말까지 타고 있었고, 병사는 두 발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클레이는 병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두 번째 공격으로 병사는 들고 있던 검이 손을 떠난 상태였고,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마저 벗겨져 있었다. 병사의 짧은 금발머리가 넘실거렸다.

“우, 우욱.”

비록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으나 그래도 육체가 작지 않은 타격을 받았는지, 몸을 일으키려던 병사가 헛구역질해 댔다. 혀를 깨물었던지 그는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불안정한 숨을 몰아쉬며 휘청거리는 그는 미처 제 뒤쪽에 서 있는 이클레이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이클레이의 시선에 그의 가는 목선이 들어왔다. 그대로 검으로 내려치기 딱 좋은.

광기에 휩싸인 야수의 그것처럼,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끝이다.”

이클레이가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지 병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본능에 따라 뒷걸음질을 치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둘 사이의 간격은 눈 깜짝할 새에 좁혀졌다. 이클레이가 그대로 허공으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 선 병사의 두 눈에 두려움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병사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클레이는 그를 향해 검을 내려치려던 제 행동을 멈추었다. 알 수 없는 익숙함. 그리고 이질감이 느껴졌다. 정말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는, 그런 짧은 망설임이었다. 그리고.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르, 하고 무언가가 약하게 떨리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등 뒤 어깨 부근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만 아니었더라면 이클레이는 어쩌면 그 소리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여기고 넘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칼날 끝에 생명이 바스러질 뻔했던 병사 역시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랐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경악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이클레이가 손을 통증이 전해져 오는 부근에 갖다 댔다. 축축한 액체 사이로 단단하면서도 얇은 길쭉한 막대기 같은 것이 만져졌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는 단박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심했다.

뒤늦은 깨달음. 그와 동시에 같은 방향에서 또 하나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이번에는 그의 허리에 꽂혔다. 불에 덴 듯한 홧홧한 통증이 뒤따랐다. 꽉 다문 이클레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나지막하게 새어 나갔다. 주인의 부상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가 타고 있던 말이 서럽게 울부짖으며 뒷다리로 일어서더니 난폭하게 뛰어 댔다. 안간힘을 다해 말의 고삐를 붙잡았으나 부상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세 번째 화살이 날아와 그의 말의 목을 꿰뚫었다. 목이 꿰뚫린 말은 미친 듯 몸부림을 쳤고, 그 반동으로 이클레이는 말 위에서 떨어져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면 시간이 느려진다고 했던가. 소리가 없어지고 색깔이 사라진 그 순간부터, 이클레이는 자신이 말 위에서 낙마하여 제 몸뚱이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태껏 살아왔던 인생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둔탁한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의 위로 그가 타고 있던 말 또한 엎어졌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빠득, 하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다리가 그대로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꼼짝없이 말 아래에 깔린 채 고통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그의 머리 위로 작은 그림자가 하나 늘어졌다.

“하, 하늘도 너 같은 악마는 버, 버리는구나.”

기쁜 건지. 아니면 슬픈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목소리. 병사는 어느새 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가냘픈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은 이클레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되어 있었다. 모처럼 잡은 기회에 의기양양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너, 너를 죽여 주겠어!”

병사가 소리쳤다. 공포를 느끼게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병사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분명, 사람은 한 번도 죽여 본 적이 없는 애송이었다. 덜덜 떨다가 검을 떨어뜨리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이윽고,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클레이는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래. 망설이지 말고 잘 찔러라. 기회는 한 번뿐이니.”

“뭐, 뭐?”

그가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빌지는 않을까. 생각했던지 병사는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날 죽이겠다며. 왜? 어디를 찔러야 할지 감이 안 오나? 그럼 여기를 찔러. 여기를 찌르면 즉사시킬 수 있거든.”

이클레이가 고개를 돌려 제 목을 보이며 친절하게 가리켰다. 워낙 전장에서 투구조차 쓰지 않는 그였기에 그의 말대로 그의 목 부분은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제 앞의 병사 같은 초보자도 쉽게 찌를 수 있도록.

괜히 저를 떠보는 건가? 허풍을 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소문대로 단단히 미친놈인 것뿐일까? 병사의 눈동자가 혼란에 가득 차 이리저리 흔들렸다.

“살고 싶지…… 않은 거야?”

병사가 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말투.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가냘팠다.

“설마…… 설마 죽고 싶은 거야?”

강렬한 햇빛이 비쳤다. 해를 등지고 있었기에 역광에 의해 병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그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던 이클레이는 눈을 두어 번 끔벅이다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 ◆ ◇



수백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고 유명한 무장들과 대결해서 살아남은 이클레이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이름도 없는 애송이에게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는 정말 어떻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원래부터 제 삶에 애착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삶의 자비를 얻어 태어나고 또 죽음을 따라 사그라졌다. 자신 또한 그 이치를 따르는 것일 뿐. 마치 제삼자가 되어 이 상황을 바라보는 것만 같이 담담할 뿐이었다.

“상관…… 없다고?”

병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네 목숨을 거둬 가도 넌 아무렇지도 않다…… 이 말인가?”

“…….”

“하지만 그러면 내 분노는…… 내 원한은…… 어디에다 풀어야 하는 거지?”

원한? 생각지 않았던 의외의 단어에 이클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본 것 같다 생각했는데 정말 구면이었던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병사가 고개를 들어 흘끗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드레모어의 기사들이 보였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병사의 표정이 어둡게 굳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는데……. 하. 기쁘다기보단 허무할 뿐이구나.”

병사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클레이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끝까지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네가 미워.”

“…….”

“그리고 그런 너를 죽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내가 밉다.”

그가 부들부들 떨며 심호흡을 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후 다시 질끈 떴다. 전에는 없었던 굳은 결심이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너를 저주한다.”

그가 제 손에 든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너를 저주하고, 또 저주한다. 그저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제발. 내 모든 것을 바쳐야 해도 좋다. 내 목숨을 내놓아도. 아니. 내 영혼을 내놓아야 한다 해도 좋아. 언젠가는 네놈에게 꼭 그가 겪었던 그 고통을. 그리고 내가 겪는 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모조리 돌려줄 수 있기를.”

감당할 수 없는 증오심에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큼지막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의 원수여.”

그의 눈동자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클레이의 모습이 비쳤다.

“죽음의 끝. 그 너머까지라도 쫓아가마.”

병사의 손이 움직였다. 곧, 목 언저리가 따끔따끔했다. 찌르르, 묘한 기운이 둘을 감싸 안았다. 돌풍이 불어오고, 이내 아득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