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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돌지 않는다.

1화





프롤로그





“놈들이 옵니다. 아무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인 것 같습니다.”

젖혀진 막사 사이로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보고했다. 막사 안에서 둥그렇게 선 채 회의 중이던 여섯 명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보고를 듣자 긴장감과 두려움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약속을 한 것처럼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막사 한쪽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는 금발의 기사에게로.

금발의 기사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찻잔에서 모락모락 향긋한 향이 피어올랐다. 순간 이곳이 정말로 전쟁터 한가운데가 맞긴 한 걸까,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사치스럽고 평화로운 티타임이었다.

“뭘 그리들 긴장하는지?”

기사가 차를 찻잔 위에 내려놓으며 짧게 물었다.

“놈이 이미 죽은 지금 이 시점, 저쪽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놈들을 쓸어버리는 건 어린아이 팔을 비트는 것보다 손쉬운 일이지.”

“하지만…… 기마병과 보병을 통합해 적어도 팔천 기의 병력.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인다 합니다.”

그들이 처음 예상했던 병력인 오천 기의 병력을 훌쩍 뛰어넘는 수였다. 도대체 아르훼나 어디에 그만한 병력이 남아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금이 저릴 만한 소식이었으나, 막상 그들의 우두머리는 아침 인사를 들은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멍청한 것들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나 보군.”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고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따분함과 무료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제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여섯 기사를 훑어보았다. 비록 표정에는 감추려 노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10년을 넘게 전장을 떠돌아다닐 동안 그를 가까이서 보좌하던 기사들은 여러 번 바뀌었다. 개중 몇몇은 전투 중 목숨을 잃었지만, 대부분은 오랜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쟁터를 오가며 시달린 정신적 스트레스에 조용히 낙향의 길을 선택하곤 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안달이 난 호기 어린 젊은 기사들이 꿰찼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거대한 야망과 포부를 가슴에 안고.

저들이 느끼는 저 긴장감은. 저 두려움은 삶을 향한 집착에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이클레이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본질적인 열망.

그는 제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미지근하게 식어 버렸지만, 여전히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텔 로드?”

마땅한 명령이 내려지지 않자 기사 하나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행여나 그의 심기를 거슬리진 않을까,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다행히 언짢아 보이진 않았다.

“텔 로드. 부디 명령을.”

“당연한 걸 묻는군.”

피도 눈물도 없다고 알려진 적안의 악마라 불리는 금발의 기사, 이클레이. 그는 지금 팔천 여기의 대군이 그의 목을 베기 위해 이곳으로 똑바로 전진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싱긋 웃었다.

“손님이 오신다는데 맞을 준비를 해야지.”



◇ ◆ ◇



버러지 같은 것들.

앞을 가로막던 병사 하나를 일격에 쓰러트린 이클레이가 생각했다. 피가 뿜어져 나왔으나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그의 온몸은 피칠갑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몰려드는군.

벌써 몇이나 베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말라붙은 피 때문에 칼날은 무뎌졌고, 오른쪽 팔뚝과 왼쪽 허벅지에 깊지 않은 상처도 입었다. 보통 텔 로드들은 군대의 후방에서 전투를 지휘하지만 이클레이는 달랐다. 계획은 이미 자신의 참모들에게 지시했으니 알아서 잘해 줄 것이었다. 그는 출전 후 전투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전방에서 뛰어들었다. 그러곤 오로지 사람을 베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일격에.

그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쟁터에서 무사하게 살아남은 것도, 제 군대를 대륙의 최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막강하게 키워놓은 것도. 모두 다 그의 뛰어난 실력 덕분이었다.

이클레이의 주변에 쌓여 가는 산더미 같은 시체들을 본 적군은 더 이상 그에게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드레모어에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하얀 악마가 있다더니, 그것은 과히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자들의 피를 듬뿍 뒤집어쓰곤, 소름 끼치도록 붉은 눈을 번뜩이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저자가 악마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간혹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무작정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 오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클레이에겐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채 머리가 몸뚱이를 떠나갔다.

이클레이는 송골매처럼 빠르게 전장을 훑어보았다. 적군 인원 모두 섬멸해 버릴 작정이 아닌 이상, 이렇게 잔챙이들만 베고 있어 봤자 승패를 가리는 데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전투를 장기전으로 끌고 나가 봤자 얻는 것이라곤 더욱더 큰 사상자와 부상자 수. 그리고 지친 병사들뿐이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적장의 머리였다.

어디냐. 어디에 있는 거냐.

이클레이는 전장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제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댔다. 끊임없이 행하던 살생과 꾸준히 쌓여 가는 피로감에 구역질 날 정도로 비릿한 피 냄새가 평생 씻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들러붙었다.

그렇게 스무 명쯤 더 베어 냈을까.

“이클레이 반 드본 셰리어스!”

병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뒤섞이는 통에 전장은 매우 소란스러웠으나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클레이는 막 병사 하나를 찔렀던 검을 뽑아내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장인가?

그가 희열이 담긴 눈빛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말조차 타고 있지 않은 작은 체구를 가진 일개 보병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멍청한 병사는 아직 이클레이를 발견하지 못한 듯, 그가 있는 곳의 반대쪽을 향하여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약간의 놀라움. 그리고 그 뒤로 적지 않은 실망감이 잇따랐다.

잔챙이로군.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 같은 병사 따위는 어찌 돼도 상관없었다. 그는 병사를 무시한 채 앞으로 반대쪽으로 전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붙잡듯이 병사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클레이 반 드본 셰리어스! 이 비겁한 새끼! 나와! 숨어 있지 말고 나오란 말이야!”

목이 쉬었는지, 가냘픈 목소리였지만 확고한 의지만은 살아 있었다. 한낱 보잘것없는 병사 따위에게 자신의 이름이 두 번씩이나 불리고 또 도망치지 말라는 말까지 들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앞으로 말을 몰던 이클레이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가 천천히 병사 쪽으로 방향을 비틀었다. 그러곤 죽음의 사자가 병자를 찾아가듯,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그 병사를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날 찾았나.”

“아!”

막상 그리 소란 떨며 불러 놓고도 정말로 그가 나타나 상대해 줄 거로 생각하지 못했던지, 병사는 흠칫 놀라며 몸을 사렸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너, 너, 너는.”

병사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왜소한 체구였다. 이클레이의 몸에서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그대로 납작하게 짓눌려 버릴 것만 같이 보였다.

“나, 나는……. 나, 나는!”

검을 잡은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너, 너를 죽일 거다! 너, 너, 너를 죽여야만 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어정쩡한 자세였으나 병사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목청을 높였다. 그에 이클레이는 코웃음을 쳤다. 척 보아도 검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애송이었다. 철없는 시골 청년이 공을 세우고 싶어 분수도 모르고 덤빈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껏 이런 일을 겪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엽게 여기고 넘어가 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만한 동정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얘기를 해 줄까.”

이클레이가 검을 잡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네놈과 같은 말을 하며 내 앞에 검을 들이댄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뭐, 뭐……?”

“하지만 보다시피 난 아직도 살아 있지.”

“그게…… 무슨.”

“그러니 나는 내일도 오늘과 같이 살아 있을 거란 말이다. 곧 죽음을 맞이할 너와는 달리.”

이클레이는 말을 박차고 병사를 향해 달려갔다. 병사에겐 제대로 방어 자세를 갖출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말 달리는 기세 그대로 병사를 향해 제 검을 휘둘렀다. 이클레이는 이 어리석은 놈을 일격으로 끝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퉁―!

살갗을 찢는 소리 대신 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의 달리는 속도와 더불어 이클레이 역시 강한 힘으로 내리쳤기 때문에 작은 체구의 병사는 그 반동으로 데구루루 구르며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다만 예상외의 일이라면 조금 전의 일격을 병사가 가까스로 막아 냈다는 점이랄까. 의외의 결과에 이클레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동그라져 있던 병사가 비적 대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어떻게 막은 거지? 분명 검을 잘 다룰 줄 모르는 녀석인데.

살짝 의아했지만 이내 이클레이는 병사에게 다시 말을 달렸다. 그러곤 아직 완전히 일어서지도 못한 병사를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