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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 거트루드의 밤(2)


“손님…….”

산책이나 운동이라는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샬롯과 달리 그는 필연적으로 바깥 활동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제법 탄,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레슬리의 억센 손이 눈가를 한 번 누르고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젠장.”

짤막한 욕설은 발음이 불분명하게 뭉개졌지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샬롯은 놀라 말을 멈췄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레슬리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인간이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어?

목구멍을 긁고 튀어나오는 낮고 재채기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문짝만 한 사내는 느릿하게 샬롯에게 물었다. 레슬리는 눈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웃음기가 숨겨지지는 않았다.

“얼굴에 도대체 뭘 그리려고 한 거지?”

좁은 방에 몇 걸음 걷지도 않고 레슬리는 팔을 뻗어 샬롯의 뺨을 검지로 살짝 쓸었다. 손가락에 보라색이 묻어났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살짝 물러났다. 취했는지 느릿하게 움직이는 남자는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 덩치가 그렇게 다가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레슬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상해요?”

그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끼익 소리를 내며 푹 꺼지는 침대는 정말 레슬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샬롯은 엄격하고 깐깐하다고 생각했던 의붓오라비가 생각과는 다른 인물이란 걸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녀가 인기가 없던 이유도.

샬롯이 그제야 다른 여자들과 자신의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화장이 문제였구나! 물론 옷도 문제였지만 샬롯의 사고는 아직까지 거기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 이상해.”

덩그러니 그를 응시하며 서 있던 샬롯의 허리가 레슬리에게 붙잡혔다. 마른 허리가 쉽게 붙잡혀, 샬롯은 어느새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샬롯은 뻣뻣하게 굳었다.

정말 이 인간이랑 또 자야 한단 말인가? 내 선택지란 어쩌면 이렇게 답이 없지?

샬롯은 마담에게 준 돈을 떠올리며, 이건 사기라고 생각했다. 적당한 신분의 사지 멀쩡한 망나니를 원했을 뿐인데, 왜 갖다준 건 이런 인간인 거지?

큭큭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술 냄새가 확 다가왔다. 커다랗고 거친 손이 샬롯의 뺨을 문질렀다. 그 손이 보라색으로 범벅이 되는 걸 보면서 레슬리는 제법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웃었다. 느른한 입가만 아니었다면 좀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제가……”

레슬리는 샬롯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봤더라면 절대 그녀에게 그렇게 웃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샬롯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색을 못 봐요. 그래서……”

그녀는 열 살 이후로 끊임없이 단련한 연기력을 한껏 끌어 올렸다. 절대 들키면 안 된다. 샬롯은 뺨을 자기 손등으로 살짝 문지르며 눈을 내리깔았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레슬리의 눈이 샬롯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무슨 색인가요?”

모방할 대상은 밀레나였다. 코와르 살롱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여자. 밀레나를 연기하는 건 쉬웠다. 열흘하고도 사흘, 밀레나는 늘 샬롯과 있었으니까. 샬롯은 밀레나가 그러했듯이 입술을 살짝 물고 곤란한 듯 웃었다.

“보라색.”

레슬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샬롯은 그녀의 연기가 제법 먹혔음을 깨달았다. 허리를 붙잡은 레슬리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서 약하게 앓는 신음을 내뱉자 그가 내려다보며 샬롯에게 속삭였다.

“많이 이상하진 않아.”

가까이 다가온 눈동자는 기대했던 초록색이 아니라 노란색이었다. 까맣게 보일 정도로 풀린 동공을 인지한 순간, 샬롯은 거칠게 맞부딪치는 레슬리의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억센 팔과 단단한 몸, 집요한 시선에 샬롯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무튼 이것도 샬롯의 계획은 아니었다. 또다시 찢어지는 포피 이모의 역작 드레스를 보며, 샬롯은 정말 이런 계획 따위는 없었다며 울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의미로 밤새 울기는 했다. 제기랄.



레슬리는 그렇게 취하지는 않았다. 온몸이 술에 찌들어 있기는 했어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기억이 끊기지 않을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닌가?

게다가 한때 금주령이 내렸을 때 만들어진 괴상한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고, 약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면 레슬리로서는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왕실의 파티나 사냥회에 이런 상태로 참석할 수도 있겠는 걸.

그랬다가는 여왕 폐하께서 당장이라도 그의 사지를 찢어 버릴 눈을 하겠지만. 레슬리는 문득 든 상상에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가슴팍 위에 누워 있던 여자가 눈을 찡그리며 그의 가슴이 침대인 양 뺨을 비볐다. 그는 아랫배가 술렁거렸지만 웃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몸이 푹 꺼질 것 같은 싸구려 침대 위에서 레슬리는 잔뜩 엉켜 있는 여자의 금발을 만지작거렸다.

이 짓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일 테지. 그는 몸 위에 올려놓았음에도 전혀 무겁지 않은 여자의 마른 등을 쓸었다.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까. 평소라면 정말 스치는 생각으로라도 궁금해하지 않을 생각이 들었다.

샬롯과 닮아서?

흰 피부와 파란 눈, 마른 몸……. 하지만 샬롯은 아니지. 그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절대 아니지. 그 애는.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소녀를 생각하며 그는 여자의 금발을 꽉 쥐었다.

그 소심하고 겁 많은 계집애보다 이 여자는 좀 더 밑바닥 삶의 냄새가 났다. 샬롯에게 마른 흙냄새가 났다면, 이 여자는 물비린내가 났다. 묘하게 축축하고 가라앉아 있는 그런.

“아…….”

엉킨 금발을 세게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자 깼는지 그녀에게서 탄식처럼 신음이 짤막하게 튀어나왔다. 눈을 깜빡거리던 여자는 흐릿한 시선으로 기대고 있던 레슬리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보라색과 노란색 물감을 칠한 것처럼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가 그를 올려다봤다.

“이거, 보라색이죠?”

여자는 멍청하게 웃었다. 싸구려 티가 줄줄 나는 엉킨 금발을 하고, 흰 피부는 잘 보이지도 않게 덕지덕지 화장품을 칠해 놓은 주제에, 잔뜩 번진 립스틱을 한 입술을 가지고 멍청하게, 그렇게 웃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여자는 흐릿한 웃음을 천천히 지워 냈다. 마른기침을 작게 뱉은 여자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얼룩덜룩한 염료가 그대로 묻어난 레슬리의 가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여자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에 닿았다.

지워 내듯 문지르는 손길에 레슬리는 그녀를 잡아당겨 다시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몸은 그의 성의 없는 도닥거림 몇 번에 잦아들었다.

“괜찮아. 그냥 자.”

옆으로 누워 팔베개를 해 주자 순하게 깜빡이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레슬리는 그의 목소리가 제법 다정하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갈라진 목소리가 뭔가를 변명하려다 흐려졌다. 그녀는 그를 보며 푸스스 웃고 있었다. 작은 몸이 꾸물거리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깜빡이는 속눈썹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그는 더 말하는 걸 관뒀다. 레슬리는 원체 다정한 이가 아니었다. 괜히 말을 해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만큼 남을 신경 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레슬리는 느리게 변하는 숨소리를 따라 눈을 감으면서 그 모든 생각들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어떤 의미로 이 오만한 왕자는 자기 합리화를 하는 데에 있어서 제법 천재적인 구석이 있었다.



* * *



에드워드 맥퀸은 야망도 능력도 있었다. 아직은 젊다는 이유로 레슬리 왕자의 뒤나 닦아 주는 신세지만 그는 왕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의 역할을 탐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이 망하거나 당사자가 죽지 않는 이상 이본느 여왕의 뒤를 이을 왕자는 레슬리 웨이필드가 유일했으니까.

서대륙에서 위튼 만한 성세와 역사를 유지한 왕국은 몇 없었다. 아니, 거의 유일하다고 봐야지. 대개의 공국들과 왕국들이 세워지고 무너질 동안 위튼은 굳건하게 몇 백 년을 서대륙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했다.

동대륙처럼 제국의 이름 아래에 대륙을 통합시키지는 못했지만, 위튼은 서대륙에서 가장 많은 땅과 가장 많은 황금을 가진 왕국이었다. 제국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는 것에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훌륭한 이본느 여왕 폐하의 아래에서 위튼의 신분 간 위계질서는 철저했지만, 대개의 나라는 그러지 못했다. 하물며 위튼도 이제 평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그보다 못한 다른 나라는 몇 번이고 신분 문제로 뒤집어졌다.

세금이고 군대고 제멋대로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 서쪽 끝에서는 아예 백성들이 왕의 목을 잘랐다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일들이었다. 에드워드는 그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 맥퀸은 노예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게 그것들을 동등한 존재로 봐서는 아니었다.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른다고 해도 같은 인간은 아니지.

제기랄. 물론 레슬리는 인간조차 아닌 것 같고.

에드워드는 그 인간의 몸에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몇 번이고 봤지만, 아직도 그게 저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인간이 나중에 위튼의 왕이 된다는 사실도 믿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본느 여왕을 비롯한 몇몇의 선례들은 그의 여동생 알리시아 또한 적법한 후계자의 자격이 있음을 알렸지만, 기본적으로 위튼 왕국은 남성 우선의 장자 상속이었다.

계승 순위가 먼 남자 왕족들까지 죄다 죽고 나서야 공주였던 이본느가 여왕이 될 수 있었으니, 희귀한 경우이기는 했다. 씨가 마른 왕족 덕분에 레슬리에게는 여동생인 알리시아 외에 위협이 될 경쟁자조차 없었다.

글쎄. 굳이 따지면 그린필 대공이 여왕에게서 새로 아들을 본다면 계승 순위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린필 대공에게는 안타깝게도 여왕은 이미 나이가 쉰이었다. 그리고 근 20여 년의 결혼 생활 중에서도 생기지 않는 아이가 지금 생길 가능성은 너무 낮았다.

그 모든 환경이 오히려 레슬리 웨이필드를 망친 걸까?

에드워드는 태어나면서부터 욕설을 지껄였을 것 같은 레슬리 웨이필드를 보며 나름대로 그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신뢰감이 가는 미소를 내보이는 세기의 미남을 보며 에드워드는 결국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한 가설을 철회했다.

레슬리는 철저하게 그 더럽고 까다로운 성질머리를 숨길 줄 알았다. 에드워드는 그가 정상적인 인간인 양 굴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뭐가 옳고 그른 건지 아는 주제에 어쩌면 저렇게 그른 짓들만 벌이는 걸까.

“……훌륭한 분이시죠. 물론 이번에 조금 곤란한 소문에 휩싸였지만,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기란 위험한 법이니까요.”

멀쩡한 얼굴로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조곤조곤 현 왕실의 재무대신인 휘링컴 백작을 두둔하는 레슬리의 얼굴을 에드워드는 차마 더 볼 수가 없었다. 모두 속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가 휘링컴 백작을 ‘개도 그딴 자식과는 붙어먹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이보다 더 수위가 높고 더러운 욕설들이 많았으나 에드위드의 뇌에서 자체적으로 걸러졌다. 제기랄.

“에드워드. 표정 좀 풀어.”

“하지만. 알리시아.”

양 손에 술잔을 쥐고 나타난 알리시아는 요새 유행에 따라 레이스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보석으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아름다운 약혼녀의 모습에 얼굴을 겨우 조금이나마 풀었다.

“술이나 마셔. 레슬리는 신경 쓰지 말고.”

이본느 여왕을 닮아 여성임에도 묘하게 낮고 독특한 운율을 가진 목소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냉정하게 속삭였다.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술잔을 받아 들고는 품위 없게도 한번에 전부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에드워드.”

알리시아의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까다롭고 도도한 약혼녀의 부름에도 에드워드는 우는 소리를 내뱉었다. 주변 겹겹이, 한 번이나마 말을 걸어 보려는 귀족들로 둘러싸여 있는 레슬리는 참 건실한 위튼의 후계자로 보였다.

“저건 언제부터 미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