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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1. 거트루드의 밤(3)


그냥 미친 거지, 그게 언제부터인지 알게 뭐람 말인가.

알리시아는 제 약혼자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왜 해가 뜨고 지는지를 고민하는 게 더 이로워 보였다. 적어도 레슬리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내가 아는 한,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니까 신경 끄는 게 더 이로워.”

알리시아는 딱 잘라 말하면서 에드워드의 빈 술잔을 빼앗아 지나가는 시종에게 건넸다. 에드워드는 비어 버린 손을 알리시아에게 뻗었다. 에드워드와 알리시아가 플로어로 나아가자 악단은 재빨리 음악을 느리고 우아한 것으로 바꿨다.

음악에 맞춰 느리게 춤 스텝을 밟으면서 에드워드는 아름답고, 유능하면서, 정상적인 인간인 왕국의 또 다른 후계자에게 속삭였다.

“알리시아. 네가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약혼녀에게 할 말은 아니네. 그렇지?”

“네가 남자여도 난 널 사랑했을 거야.”

알리시아는 짧게 코웃음 쳤다. 그 사탕발림에 넘어가기에 그녀는 기회주의자인 에드워드를 이미 잘 알았다. 에드워드는 레슬리에 대해 진저리치면서도, 훗날 주어질 달콤한 권력에 끝끝내 레슬리 옆에 붙어 있는 인간이었다.

“에드워드 당신이?”

“진심이야. 게다가 알리시아 너라면 정말 좋은 왕이 되었겠지.”

에드워드의 중얼거림에 알리시아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녀는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에드워드를 향해 물었다.

“오늘따라 더 심하네. 요새 레슬리가 더 끔찍하게 굴어?”

“아니. 차라리 더 끔찍하게 굴면 예상이라도 가지.”

“그럼 뭐 때문에 그래?”

올 초부터 유난히 더 미친개처럼 굴었던 레슬리를 알고 있던 알리시아는 에드워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에드워드는 그 위로에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기분이 오락가락해. 완전히 미쳐 날뛰고 있다고.”

“사춘기 때처럼?”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으며 조소했다.

“사춘기 때 그 새끼는 기분이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기분이 더럽거나, 끔찍하거나, 역겹거나. 셋 중 하나였지. 난 그 새끼 열여섯일 때 정말 레슬리를 죽일 뻔했어. 참기 더럽게 힘들었지.”

그 당시 레슬리의 취미 중 하나는 천사 같은 얼굴을 이용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하는 인간을 반쯤 죽여 놓는 짓이었다. 하고 나서 기분이 더 더러워졌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레슬리는 꾸준히 그 돌아 버린 짓을 반복했다.

물론 뒷수습은 에드워드의 몫이었다. 에드워드는 늘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레슬리를 건져 내 왕궁으로 던져 놓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는 수도의 귀족들 중에 뒷골목을 포함한 수도의 지리와 밑바닥 인간들의 뒷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레슬리던지.

“레슬리가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다는 거지 그 말? 그러면 좋은 거 아니야?”

“알리시아. 레슬리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우리끼리 있을 때, 너한테 다정하게 ‘사랑하는 알리시아’라고 부른다고 생각해 봐.”

알리시아는 조금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남매는 서로에 대한 무시와 애증 어드메쯤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고─물론 레슬리 쪽은 무시가 좀 더 커 보였지만─, 그중에 긍정적인 것은 찾아보려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에드워드.”

“내 말이. 레슬리의 기분이 좋다는 건, 내 평생 없었던 일이라고.”

“이유가 뭐 때문인데?”

레슬리를 닮은 노란 눈이 샹들리에의 빛에 반사되어 맹수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에드워드는 가끔 이렇게 남매 간 닮은 점을 발견할 때마다 조금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몰라.”

흐음. 가벼운 신음이 고민하는 알리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미간을 조금 모으고는 중얼거렸다.

“올 초에 그 애가 나갈 때 예민함이 하늘을 찌르긴 했는데……. 갑자기 좋아졌다고?”

“그 애? 뭐 요새도 대부분은 늘 그렇듯이 나쁘지. 드물게 좋을 때가 생길 뿐. 봐. 저 새끼가 세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잖아. 지금. 미쳤어.”

“그 애, 그린필의 사생아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사라?”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그 애를 싫어했던 레슬리였지만, 알리시아는 그와 달리 그 사생아한테 관심조차 없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여전히 대공한테 존중이라곤 하나도 없지.”

“너도 마찬가지면서. 새삼스럽게?”

알리시아는 냉소했다. 여왕 폐하의 애완견한테 더 존중을 보일 필요가 있어?



* * *



샬롯은 커다란 덩치와 근육에 걸맞게 그녀의 침대를 아예 폭삭 내려앉게 만든 레슬리를 떠올리며 침대를 두드렸다. 혹여 임신에 문제가 생길까 봐 3일 동안 일부러 가만히 방에서 쉬기만 했는데!

슬프게도 투명한 시약은 또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취하지도, 기억이 없지도 않은데.

또 실패했단 말이야?

샬롯은 진지하게 레슬리가 씨 없는 놈인지 의심했다. 아니, 그쯤 했으면 씨가 없더라도 임신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뭔가 불공평했다. 누구는 10분 만에 임신에 성공하는데, 그녀는 하룻밤을 통째로 써도 임신을 못 했다.

아니면 혹시 그녀가 불임일까? 샬롯은 미간을 모은 채 배를 문질렀다. 불임이라면 차라리 빨리 혼인을 해서 양자를 입양하는 게 나았다. 이건 검사해 봐야겠는데.

그녀는 손가락을 딱 하고 맞부딪쳤다. 작고 새까만 까마귀가 그녀의 손 위에 뿅 하고 튀어나왔다. 샬롯의 비루한 마력으로도 소환할 수 있는, 오로지 간단한 연락 말고는 도무지 능력이라고는 무엇도 없는 그녀의 소환수였다.

“예쁜 아우디야. 포피 이모한테 내가 내일 간다고 전해.”

샬롯은 처음에 그녀의 소환수에게 ‘영광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려 했으나, 그렇게 부르면 소환수는 도무지 명령을 알아 처먹지를 못했다. 결국 아우디의 꺄악거리는 강력한 요청으로 까마귀의 이름은 아우디가 되었다.

참고로 아우디는 앞에 귀여운, 예쁜, 아름다운, 깜찍한 따위의 호칭을 붙여 주지 않으면 작은 부리로 그녀의 손바닥을 쪼았다.

“꺄악.”

“그래.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아우디야. 제발 중간에 딴 데로 가지 말고. 잘생긴 수컷이 있어도 쫓아가지 말고. 응? 똑똑하고 멋진 아우디야.”

“까악!”

손바닥 반만 한 까마귀는 날개를 부풀린 채 근엄한 척 보송보송한 솜털을 날리며 창가로 폴짝 뛰어 총총 사라졌다.

샬롯은 두 손을 모아 제발 아우디가 오늘 안에 포피 이모에게 도착하기를 빌었다. 무능력한 것이 참으로 샬롯 그녀를 닮은 소환수였다.

그리고 덕택에 방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팔꿈치를 기댄 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샬롯의 모습을 보게 된 밀레나는 오히려 안경을 끼고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고민했다.

“로테?”

“어서와. 밀레나. 안경 쓴 건 처음이네.”

“여기선 거의 안 써. 오늘은 집에 갈 거라 끼는 거야.”

태연하게 몸을 일으킨 샬롯의 말에 밀레나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수줍게 웃었다.

“할머니랑 산 댔지? 난 내일 이모 댁에 잠시 들리려고.”

샬롯은 친구란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인간 친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아예 나한테 호의적인 인간을 본 적이 없잖아? 다시 정의하자면, 밀레나는 샬롯에게 처음으로 아무 대가 없이 호의를 보여 준 인물이었다.

그리고 샬롯은 세간에서는 이런 관계를 친구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었다. 죽은 엄마와 포피 이모 외에 그녀에게 새로운 관계가 생긴 것이다.

“4번 골목에 사신댔지? 이모님은 건강하셔?”

이전에 드레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했던 말을 기억했는지 밀레나가 물었다. 샬롯은 처음 가져 본 친구─밀레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와의 친근하고 사적인 대화에 조금 두근거리는 심정을 안고 대꾸했다.

“관절염이 조금 있으시지만 괜찮으셔. 나이가 나이시니까.”

참고로 마녀 포피의 나이는 126살이었다.



레슬리는 혀끝에 느껴지는 씁쓸한 맛에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의 끄트머리를 씹었다. 그가 담배를 끊은 지 벌써 5년째였다. 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그의 몸에 담배 냄새가 배는 것이 싫었다.

골초처럼 내내 담배를 물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레슬리는 그때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음에도 몸에서 냄새가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을 때도 몸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그 냄새는 결벽적인 레슬리의 성정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레슬리는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샬롯을 견딜 수가 없었다.

“씨발.”

레슬리는 초초하게 씹던 담배를 손으로 우그러트렸다. 담뱃잎을 손으로 털어 내며 그는 반쯤 누워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라면 나가지 않겠어. 레슬리. 폐하께서 네가 없는 걸 알면 널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좋겠네. 미래의 여왕 폐하. 나한테 선물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알리시아의 말에 레슬리의 입에서 거침없는 조롱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경멸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그와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몸을 뒤로 뺐다. 그 행동에 레슬리는 냉소했다.

“네 개가 없으니 무서워?”

“레슬리. 안타깝지만 에드워드는 네 개야.”

둘은 한 공간에 있어야 하는 짧은 시간조차 얌전히 넘기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사이가 좋은 남매란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적어도 다른 남매들은 한 명이 레슬리가 아닐 테니 최소한 이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그리고 회의에 불참하면, 진짜 여왕 폐하께서 널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앉아.”

“그거 정말 무섭군.”

알리시아는 그 짤막한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방을 나서는 레슬리의 등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할 때는 그래도 잘하는 인간이 왜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변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줄을 당겼다.

“에드워드 맥퀸 경을 모셔오렴. 할 일이 생겼으니.”



샬롯은 울고 있는 눈앞의 사내를 보고 지지리도 없는 그녀의 운을 한탄했다. 친구의 손에 끌려 왔다는 이 인간은 실연의 고통에 눈이 멀었는지 그녀에게 손 하나 까딱이지 않고 울고만 있었다.

“끅, 그래서, 릴리는, 그래서, 끅, 흡, 우리는 정말…….”

“네. 그러셨군요.”

입으로 허탈한 위로를 내뱉으면서 샬롯은 침대 위에 남녀가 앉아서 어떻게 이토록 건전할 수가 있냐고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혹시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레슬리가 다시 올까 봐 집에 가려는 밀레나를 붙잡고 ‘원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진하지만 이상하지는 않은 화장’까지 마쳤건만.

그리고 받은 첫 손님은 뭐 보다시피.

마담 코와르의 남자 보는 눈이 거지같은 걸까. 아니면 그녀가 쥐여 준 돈이 모자랐던 걸까. 왜 이런 놈들만 골라 주는 거지. 젠장.

“릴리와, 흡,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그러시군요.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가는 건 어떨까요.”

퉁퉁 부은 눈을 한 사내, 이름이 뭐였더라 제임스였나. 기억도 안 났다. 아무튼 그 사내는 희망이 섞인 눈으로 샬롯을 쳐다봤다.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녀는 ‘빨리 내 방에서 꺼져.’라는 속마음을 대신해서 대꾸했다. 샬롯은 이런 남자가 아닌 그녀와 열심히 아이를 만들어 줄 남자가 필요했다. 이런 순간에도 점점 시간은 가고 있었다! 아이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면 빨리 임신을 해야 했는데 말이다. 제기랄.

“고맙습니다! 로테 양!”

샬롯은 그녀를 갑자기 덥석 끌어안는 인간의 등을 어색하게 도닥였다. 빠르게 쏟아 내는 인간의 말은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꼭 가서 고백에 다시 성공하겠습니다. 정말 이번에는 잘하겠다고 약속하고, 절대 그녀의 마음에 상처 주는 일 따위는 만들지 않겠습니다. 용기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로테 양의 위로 덕분에……”

샬롯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등을 도닥이던 남자가 갑자기 증발했다.

“아아악!”

그녀는 허공에서 발이 떨어진 채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자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다른 손님 받고 있었나?”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던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얼굴을 보이는가 싶더니 짤막한 비명과 함께 울던 남자가 방문 밖으로 던져졌다.

샬롯은 익숙하지만, 절대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에 속으로 신이 있다면 그녀를 싫어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