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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장. 거트루드의 밤


에드워드 맥퀸은 안 그래도 꼬여 있는 골목들을 몇 번이고 다시 돌았다. 이 빌어먹을 골목 따위에 전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친 얼굴로 노크 하나 없이 민트색 문을 열어젖혔다.

“레슬리.”

한숨이 섞인 친우의 목소리와 함께 깨끗한 셔츠와 바지가 던져졌다. 몸을 반쯤 일으켜 잡아챈 레슬리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린 채 깨질 것 같은 머리를 털어 냈다.

“여긴 어디지?”

“메이핏 11번 골목, 어쩌다 여기까지 기어온 건데?”

낮게 갈라지는 레슬리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성적인 느낌이 남아 있었다. 에드워드는 느릿하게 옷을 입고 있는 그의 악우인지 주군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를 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찾느라 한참 걸렸어. 알아?”

“그게 네 역할이지. 개자식아.”

오만하게 뱉어지는 욕설에도 잘난 얼굴에 묻어 있는 품위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 안에 들어오는 햇살이 레슬리의 밝은 금발에 부서지면서, 신전의 벽화에서 볼 법한 천사 같은 얼굴에 그늘이 졌다.

“넌 쓰레기야. 레슬리. 입에 문 걸레는 좀 치울 나이 아닌가?”

아름다운 얼굴과 완벽한 몸을 갖고 있다고 해도, 에드워드는 그게 그에 대한 평가를 상쇄시켜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겉으로야 예의바른 척을 하고 살아도 속이야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진 미친놈.

“왕실모독죄는 즉결 처형도 가능해.”

“뒷골목에서 여자랑 뒹굴고 있던 왕자가 할 말이라고 생각해?”

“좋아. 서로 할 말이 없으니 닥치자고.”

레슬리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그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얇은 입술에서 작은 신음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얼마나 취했는지 단편적인 기억들이 조각처럼 머릿속에 흩어져 있었다. 하얀 피부나 푸른 눈동자 따위가 떠오르자 그는 입매를 비틀었다.

또 비슷한 여자를 찾았군.

“에드워드, 평소보다 두 배는 쳐서 줘.”

뒷골목의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 탈색한 싸구려 금발이 손에 엉켰던 감각과 함께 스스로 놀랄 만큼 흥분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힐끗 침대를 확인했다. 흰 시트 위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처음이었을까. 아니 처음이 아니라도 밤 내내 그의 체력을 감당하다 보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체념한 친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레슬리는 어젯밤의 여자에 대해 스스로 꽤 깊게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발. 레슬리. 언젠가 네가 살해당하면 범인은 나일 거야.”

“미리 유언장에 범인은 너라고 적어 두지. 친구.”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자 붉은 색이 묻어났다. 과하게 얼굴을 덮은 화장에 탈색한 금발.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딱히 기억할 만한 것이…… 아.

그는 문득 멍이 든 것처럼 보라색으로 눈 전체를 칠했던 얼굴을 기억해 냈다. 분장에 가까운 화장이었다. 그는 목 끝에 매달린 웃음을 삼켰다. 웃긴 여자네.

“빌어먹을 새끼.”

“그걸 지금 알아먹은 것도 아니면서 입 아프게 왜 그래?”

술에 뇌까지 절여진 뒤에 보내는 하룻밤은 레슬리 웨이필드에게 늘 똑같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제법 괜찮았다. 이런 날은 처음 있는 날이었다.

레슬리는 신기한 기분으로 어제 입었던, 반쯤 찢어진 흰 셔츠를 주워 그것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그 행동의 결과물을 보고 결국 소리까지 내서 웃었다.

보라색, 붉은 색, 분홍 색, 파란 색, 아주 가지각색의 색깔들이 흰 셔츠에 묻어났다. 도대체 누가 화장을 그딴 식으로 한단 말인가.

그는 어젯밤의 여자가 샬롯과 닮았다는 생각을 취소했다. 그 작고 불행한 아이는 그런 화장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누구에게도 그런 화장은 어울리지 않았겠지만, 그는 도무지 샬롯이 얼굴에 갖은 색깔들을 칠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샬롯과 닮지 않았다. 그건 레슬리의 기분을 굉장히 나아지게 만들었다.



샬롯은 마담이 마련해 준 방 안에서 거의 하루를 꼬박 앓아누웠다. 속으로 온갖 욕설이 난무했지만, 그 모든 것을 뱉을 힘도 없었다. 그녀를 부축해 준 여자는 끼니때마다 들어와 묽은 스프를 놓고 갔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녀는 샬롯을 동정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시한부 삶이나 복잡한 가정사를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동정에 샬롯은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끔찍한 상태인가?

아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씹어 놓은 의붓오라버니, 레슬리의 흔적들을 확인하며 그녀는 둘째 날이 돼서야 겨우 약을 붙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담의, 그러니까 그녀가 딱 하루 일하기로 했던 코와르 살롱─샬롯은 왜 이딴 곳을 살롱이라고 부르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의 방 한편에 머무른 지 닷새째 되는 날에 그녀는 드디어 욕설을 내뱉으며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 댔는데 설마 안 됐을까.

샬롯은 관계를 즐기는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이게 뭐가 좋다는 거지? 그녀는 의붓오라버니의 애를 가진다는 게 좀 소름 끼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피도 안 섞인 오라빈데 그냥 한 번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기랄……. 무능한 레슬리.”

위트니가 직접 만든 임신 확인 시약─3일이면 확인 가능─은 샬롯의 피가 섞여 들어갔음에도 아무 변화 없이 투명했다. 샬롯은 신경질적으로 베개를 물어뜯었다.

“또 그 짓을 내가……. 아, 제발. 엄마는 왜 남자 없이 임신할 수 있는 약을 안 만든 거야. 왜? 왜…….”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방문에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샬롯은 이 방에 들어오는 인간은 그녀의 식사를 전해 주는 여자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들어오라 외쳤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

샬롯처럼 탈색한 금발이 아니라, 정말 타고난 예쁜 금발을 늘어트린 여자는 샬롯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제 묽은 스프가 아니라 빵과 과일이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응. 괜찮아. 그동안 고마웠어. 밀레나.”

샬롯의 말에 사르르 눈을 접어 웃는 밀레나는 참 예뻤다. 왕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금발이 아니었더라도 돌아볼 만큼 예쁜 미인이 금발이기까지 하니 마담이 자부한 대로 이 가게의 제일 인기 많은 여자일 법했다.

“뭘. 로테. 원래 처음엔 다 힘든 걸. 나도 처음에는 마담이 많이 도와줬어.”

“그 마담이?”

샬롯은 마녀인 그녀보다 더 마녀처럼 생긴─예쁘긴 했다.─ 마담 코와르를 떠올리며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가게에 처음 들어온 애들한테는 좀 차갑게 굴긴 해.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마담 가게에서 일한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 해. 중간에 돈도 꽤 정산 잘해 주고, 사정도 나름 봐주는 편이라서.”

그것참.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거래의 신뢰가 이 바닥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확인하게 되었군. 샬롯은 찢어진 드레스를 대신해 새로 받은 올 핑크의 레이스 드레스를 펄럭이며 생각했다.

“참. 마담한테 들었는데 오늘부터 다시 일 나갈 거지?”

“응.”

“아직 그래도 얼마 안 되었으니까 심한 손님을 받진 않을 거야. 이따 저녁에 보자.”

샬롯은 밀레나가 떠나가면서 남긴 바구니에서 빵을 꺼내 물었다.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진한 분홍빛의 드레스 위에 빵가루가 흩어졌다. 그녀는 도무지 사람들이 왜 드레스를 입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편하고, 거슬리기만 한 걸.

그녀는 빵을 크게 삼키면서, 빨리 임신해서 이 바닥을 뜨겠다고 결심했다.

얼굴에 덮는 화장도 답답하고 드레스도 불편했다. 샬롯은 다시 무능한 레슬리에 대해 욕설을 중얼거리고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화장대에 앉았다.

오늘은 초록색이 끌리는 걸.

푸릇한 초록색으로 눈과 뺨을 칠한 샬롯을 보고 마담 코와르가 썩은 얼굴을 지었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방에 들어와서는 샬롯의 얼굴을 보고 흠칫하며, 다시 뒤돌아 나가는 남자들을 보며, 그녀는 뇌가 술에 절여진 레슬리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을 수 없을 만큼 자기가 못생겼는지 진지하게 의심했다.

그렇다고 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강간할 수는 없잖아. 제기랄.

밀레나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눈이 굉장히 나빠, 안경 없이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저런. 게다가 다른 여자들은 밀레나나 샬롯과 그다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물론 샬롯은 그럭저럭 예뻤다. 다만 그 누구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화장과 복장을 한 여자에게 호감을 갖기란 어려운 법이었을 뿐.

마침내 레슬리와의 하룻밤 이후로 열흘하고도 사흘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갖지 못한 샬롯은 어깨를 세 배쯤 부풀린 주제에 머메이드 형식을 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하늘색으로 입술을 칠한 채, 도대체 뭐가 문제일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마담 코와르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샬롯에게 물었다. 샬롯이 조금만 더 머무르겠다며 돈주머니를 건네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 돈주머니를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속삭였다.

“혹시 코와르의 인기를 떨어트리려고 누군가 보낸 용병이니?”

무슨 질문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샬롯이 맹한 눈으로 마담을 응시하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돈을 받아들었다.

“아니, 도대체 저런 옷은 어디서 구해 오는 거야…….”

작은 중얼거림에 샬롯은 마담이 그녀의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다. 포피 이모가 기뻐하겠는 걸.

“이모가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원하신다면 마담의 것도 부탁드려 볼까요?”

위에는 늪 같은 초록색, 아래는 쨍한 보라색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이번엔 다행스럽게 무난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늘 그렇듯 색깔과 그 위에 왜 박혀 있는지 모를 고양이 그림들이 문제였다.

마담 코와르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샬롯은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는 듯 상냥하게 웃었다. 오늘 화장 콘셉트는 고양이였다. 참고로 샬롯은 삼색 고양이를 좋아했다.

검고 노란 것으로 칠해진 얼굴을 한 샬롯은 마담을 위해 포피 이모에게 드레스를 한 벌 더 부탁해 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돈이 많았다. 충분히 대가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샬롯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입술을 좀 더 붉게 칠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입술이 아니라 남색으로 물든 눈과 보라색으로 물든 뺨이었지만 샬롯은 몰랐다.

포피 이모의 역작인 ‘밤하늘 냄비 드레스’의 치맛단을 정돈하면서, 그녀는 드디어 레슬리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손님을 기다렸다.

역시 그녀의 선물이 옳았던 것이다. 마담 코와르는 포피 이모의 드레스를 받고 감동을 받았는지 오늘 밤에 얌전히 방에 있으면 도망가지 않을 남자가 찾아갈 것이라 말해 주었다.

샬롯은 두꺼비 같은 초록색 눈을 좋아했으므로 그녀를 찾아올 남자가 초록색 눈이기를 조금 기도했다. 물론 아니더라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기란 어떤 눈이라도 예쁜 법이니까.

방 안은 깨끗했다. 스무 살 성인이 되자마자 궁을 나와서 포피 이모네에 머무르다 바로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드레스 몇 벌과 화장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샬롯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대모가 되어 줄 포피 이모의 은혜에 다시 마음속 깊이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새롭게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드레스 덕분이 아닌가!

메이핏 11번 골목에서 가장 끝에 있는 코와르 살롱의 이층 복도에서 좌측에서 세 번째 방.

싸구려 짚과 솜으로 속을 채운 것을 티가 나지 않게 흰 시트로 잘 감싼 침대와 민트색으로 칠한 작은 화장대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또 레슬리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아마 샬롯은 좀 더 포피 이모에 대한 찬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술독에 빠졌다 나왔는지 코를 찌르는 알코올 향기와 천사 같은 미인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샬롯은 다시 지지리도 운이 없는 그녀의 답 없는 인생에 대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