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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곳에 한 남자가 달리고 있었다.

가을에 서리가 내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빠르게 나아갔다.

주변 경관이 수시로 바뀌었다.

나무가 가득 들어선 곳에서, 초원으로 다시 나무가 들어선 곳으로.

‘남동쪽이라 했지?’

남자는 카시미르 가의 영지에서 나온 클라우드였다.

페시아의 고향은 가문에서 일주일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여자 혼자서 왕복하기에는 위험한 길이었다.

길에는 사나운 늑대와 야생 곰도 출몰 간혹 출몰했다.

‘경공으로 3일이면 충분해.’

쉬지 않고 달리면 된다.

혹여나 중간에 도적이라도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낮과 밤이 수시로 바뀌었다.

“허억, 헉.”

클라우드의 숨은 거칠었다.

내공이 떨어진다 싶으면 잠시 운공을 한 후, 다시 달렸다.

그러기를 3일 동안 반복해서 했다.

운공하면 피로도가 가신다지만, 내공을 사용해 3일을 내리 달리니 피로도가 극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꿋꿋이 남은 내공을 쥐어짜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왔어.’

페시아의 고향 포트 마을.

포도주로 유명한 곳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쉬고 싶었으나, 페시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었다.

클라우드가 마을로 들어가려는데.

“정지!”

병사들이 손을 들어 그를 가로막았다.

“…….”

숨을 돌리기도 바빠 말할 힘도 없었다.

“외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왜…지?”

간신히 짜낸 목소리.

물도 마시지 못해, 건조할 대로 건조해 음성이 쫙쫙 갈라졌다.

그 목소리에 막던 병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의 모습은 거지였다.

꾀죄죄한 모습에 며칠은 씻지 않았는지, 냄새가 진동했다.

마을에 성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다른 마을에 있던 거지가 자리를 옮겼다고 생각한 병사가 그의 어깨를 밀쳤다.

“브레어 남작 가의 명이시다. 썩 물러가!”

카시미르 가의 영지에 속한 남작이자, 포트 마을을 다스리는 지방 귀족이었다.

병사는 브레어 남작가에 속한 병사였다.

‘귀한 분이 있는 마을에 어디 거지같은 차림을 한 놈이 오려고, 안 되지 암. 그분은 존경을 한 몸에 받을 분이 되실 건데.’

단호하게 말한 병사가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클라우드는 병사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힘없이 넘어졌다.

피로가 온몸을 지배해서 대항하지 못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한주먹거리도 안 된 병사를 혼쭐내줬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공 회복이 급선무야.’

병사 한 명도 제압하지 못한 상태.

만약 안에 페시아가 없다면 그녀를 찾으로 돌아다녀야 했기에 텅 빈 단전을 채워 넣어야 한다.

‘조용한 곳에서 운기부터 하자.’

클라우드가 마을로 들어가는 걸 포기 하고 입구와 떨어진 나무 그늘 밑으로 가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걸 병사가 보자.

“저 미친놈 뭐하는 거야?”

“입구 지키는 일을 배정 받으면 별의별 또라이들이 보인다니까.”

동료 병사가 동의하며 클라우드를 무시했다.

두 시간 후.

텅 빈 단전을 절반정도 채웠다.

피로는 여전히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전보다 나았다.

클라우드가 다시 입구로 가서 자신을 밀친 병사를 쳐다봤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나?”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는데 병사들은 숨이 턱턱 막혀왔다.

식은땀이 절로 나며, 그의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빨리 눈앞에 사라졌으면 좋겠단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려는 그때.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났다.

“페시아.”

“도련님?”

걱정되어 찾아온 그녀는 무사히 잘 있었다.

그것도 비단으로 된 순백의 옷을 입고 고운 자태를 드러내며 말이다.



***



페시아의 방.

작은 침대 두 개 정도 들어갈 크기에 선반 위에는 가지런히 놓인 화분이 있었다.

페시아가 찻잔을 넌지시 내밀어 물었다.

“도련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네가 가문으로 안 돌아와서 찾아왔다.”

“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무슨 일 있는 거냐?”

말을 꺼낼 듯 말듯 망설이며 말하길 꺼려했다.

그 모습에 클라우드가 손을 들어 보였다.

“사정이 있는 거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해?”

“네?”

“이곳에서 일이 있으면 다 마치고 나랑 같이 돌아가자.”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일이길래 말하기도 꺼리는 거지?’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클라우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바로 방으로 오는 바람에 마을을 구경은 하지도 못했거든.”

그가 페시아를 두고 나왔다.

밖에는 뛰어노는 어린아이들로 가득했다.

목검을 들고 싸우는 녀석과 지팡이를 들어 마법사 흉내를 내는 녀석도 있었다.

영락없이 어린 아이들의 모습.

자신도 모르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계속 쳐다봤다.

그런데 유독 한 꼬맹이만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클라우드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넌 거기서 뭐하고 있니.”

“놀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뭐?”

놀고 싶은 기분일 때만 노나.

그냥 생각 없이 뛰어노는 게 어린 아이들의 모습인데, 웃긴 녀석이었다.

꼬맹이가 얼굴을 들었다.

울었는지 눈물 자국이 선했다.

“페시아 누나가 우리 곁을 떠난데.”

“어차피 너희 누나는 귀족 가에서 일하지 않아?,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만 내려오는 거로 아는데.”

아이가 울먹이며 버럭 소리쳤다.

“그쪽 말고 다른 데로 간데, 병사 아저씨들이 그곳으로 가면 보육원으론 영영 못 돌아온다고 했다구!”

꼬맹이의 말에 클라우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누가 그래?”

“마을 입구를 지키는 병사 아저씨한테 똑똑히 들었어.”

어디를 가길래 고향으로 영영 못 돌아오는 걸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허리를 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맙구나. 내가 너희 누나 어디 못 가게 해 주마.”

“정말이야?”

“그럼∼ 이래 봐도 이 형이 힘 좀 쓰거든.”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아이의 얼굴이 금세 활짝 피었다.

꼬맹이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로 갔다.

클라우드를 보자 경직된 몸짓.

몇 십분 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몸이 굳은 것이다.

클라우드가 병사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물어볼게 있는데 제대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뭐, 뭡니까?”

아까는 반발했지만, 지금은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존대를 했다.

“페시아 알지?”

“아, 알죠. 그런데 그분은 왜?”

“그분? 페시아가 그분이라고 불릴 만큼 높은 신분을 가졌나?”

그녀는 이젤라처럼 몰락한 귀족의 딸도, 대상인의 딸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신분.

높임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이가 아니어서 알아챘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걸.

“이제 곧 레르히 교단으로 가서 사제가 되실 분이라.”

“사제? 예전에 후보로 됐다가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탈락한 거 아니었나?”

“거기까진 저도 잘…….”

입구를 지키는 병사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듯했다.

“페시아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성스러운 분을 모시는 영광을 거절할리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교단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맞다.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레르히 교단이었다.

아스란 왕국이 속한 남 대륙이 떠받드는 신.

교단의 성세는 왕국을 넘어 남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니.

함부로 거절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시는 건 좀.”

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클라우드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난 페시아를 이름으로 불러도 돼.”

그의 오만한 말에 병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가 카시미르 가의 망나니라도 되나? 아니면 아스란 왕국의 왕자라도? 아주 꼴값은…….’

포트 마을에선 다른 의미로 이름을 날렸다.

이곳은 아직도 그를 망나니라 여겼다.

그것도 성격이 포악하고, 개차반으로 유명했다.

또는 아스란 왕국의 왕자 정도라면 사제들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들과 맞먹는 사람은 교의 신관이나 대주교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있다.”

“뭡니까?”

병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포트 마을에 비상식적으로 병력이 많은데, 그 이유가 페시아 때문인가?”

“네.”

“누구의 짓이지, 브레어 남작?”

“맞습니다.”

그가 세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기세도 내보이지 않았는데 말에 위엄이 뚝뚝 떨어진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것 같았다.

‘누굴까? 브레어 남작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니까 신분이 꽤 높은 것 같은데.’

포트 마을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나가면 지방 귀족일 뿐이었다.

그보다 높은 인물들은 널렸으나, 적어도 이 주변에서 브레어 남작을 낮게 볼 인물은 많지 않았다.

병사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클라우드도 주변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병사가 많은 건 이해하는데, 저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유독 병사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

보육원 주변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도망치지 못하게끔 경계를 하는 듯했다.

‘사제가 되고 싶은지 페시아의 생각을 물어봐야겠어.’

생각을 마친 그가 바깥으로 나온 페시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



“구경 다 하셨어요?”

“그래, 둘러보니 재밌는 걸 알아냈어.”

“뭔데요?”

“네가 레르히 교단의 사제가 된다고 하더군.”

페시아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그에게 말하지 못한 말.

고향에 편히 가라고 마차까지 대동해 보내 줬는데,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죄송해요.”

“네가 왜 미안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아닌데, 누가 강제로 시키기라도 해?”

클라우드가 슬쩍 물었지만, 페시아가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넌 사제가 되고 싶나?”

그녀의 솔직한 감정을 듣고 싶어 대놓고 물었다.

“아니요, 전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런데…….”

“그거면 됐다, 뒷말은 필요 없어.”

클라우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보육원의 꼬맹이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눈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넌 아직도 내가 못 미더운가 보구나.”

“그게 아닌데.”

그녀가 망설였다.

눈은 흔들리며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때를 노려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할 거 같았다.

“나는 널 가문으로 데려갈 거다. 나와 같이 가겠어?”

“네, 도련님이랑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클라우드가 작게 웃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면 됐다.

듣고 싶던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혹여나 사제가 되고 싶다고 했다면, 마음이 텅 비어 한동안 식음을 전폐할 것만 같았다.

“나와 돌아가자.”

“네!”

그제야 페시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보육원으로 짐을 가지러 올라간 그녀.

밖에서 한동안 그녀를 기다리는데, 병사들이 마을 입구로 집결했다.

일렬로 늘어서 누군가를 맞이했다.

선임 병사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남자에게 경례를 취하고 있었다.

“데릭 브레어님 오셨습니까.”

“잘 감시하고 있었어?”

“네, 페시아님은 보육원에 얌전히 있었습니다.”

“잘했다, 가보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

브레어가의 차남 데릭 브레어가 말에서 내려 뒤뚱뒤뚱 걸었다.

그러다 클라우드와 딱 마주쳤다.

“이 거지새끼는 또 뭐야? 뭔데 내 앞을 막고 서 있어?”

흔한 거지로 생각했는지, 클라우드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어왔다.

“하, 이 빌어먹을 왕국에 제대로 된 남자 새끼 한 명이 없다니.”

동생인 율리 말고 전부 다 한 쪽 뇌가 빈 것 같았다.

싸가지에 밥 말아 먹었으며, 상대를 파악하기도 전에 내려다보는 인성.

길가다 칼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클라우드의 말에 데릭 브레어의 얼굴이 푸들거렸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아니 몰라.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아냐?”

나이는 20대 초반, 성을 들어보니 브레어 남작가의 자제 같았다.

“내가 너 같은 거지 자식을 꼭 알아야해?”

“나도 똑같아. 너 같은 놈만 보면 구역질나니까 좋게 말할 때 그냥 지나가라.”

“이, 이새끼가 지금 그 말 나한테 한 거야? 어!”

엄청난 폭언에 데릭 브레어의 얼굴이 화산이 폭발할듯 붉어졌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어보고, 접대를 받아 봤을까.

어딜 가나 자신을 떠받드는 사람들뿐.

눈앞에 있는 남자같이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당장이라도 장식용 검을 뽑아 달려들려는데, 페시아가 보육원에서 나왔다.

데릭 브레어가 그녀를 보곤 클라우드에게 했던 태도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오, 페시아 마침 너를 보려고 오던 참이었어.”

그의 말에 클라우드는 어이없었다.

페시아는 여 사제가 될 사람.

남작가의 차남이 함부로 이름을 지껄일만한 신분이 아니었다.

“야, 넌 뭔데 페시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남작도 아닌 남작가의 아들 따위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