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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데릭 브레어의 빵빵한 볼이 출렁였다.

남작가인 자신의 아버지도 모자라 차남인 자신까지 무시했다.

그러나 곧 사제가 될 페시아가 보고 있어 화를 꾹 눌러 참았다.

물론 사제가 될 거라는 말은 거짓이지만.

“이 거지새끼가, 아니지. 크흠, 오늘은 마음씨 좋은 내가 참을 테니, 내 앞에서 썩 꺼지도록.”

“나도 급이 많이 떨어졌군, 저런 놈까지 나대는 걸 보니. 페시아 눈이 더럽구나 빨리 가자.”

“네? 네.”

그녀가 클라우드의 뒤편에 서자 데릭 브레어의 눈이 커졌다.

“페시아, 어딜 가려고! 거지새끼가 누군지는 몰라도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에 병사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전 사제가 될 생각이 없어요.”

“레르히 교단의 결정을 무시하겠다는 거야?”

“네, 싫어요. 전 카시미르 가에서 일하는 게 좋아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데릭 브레어의 입이 비틀렸다.

“흐흐, 이건 말이지 카시미르 가에서도 허락한 내용이라고.”

“네?”

그녀가 당황하며 클라우드를 쳐다봤다.

“난 못 들은 내용이다.”

“제가 직접 가주님께 말씀드리고, 맞다고 하면 사제로 가겠어요.”

“이봐, 네 주제를 알아야지. 오냐오냐해줬더니 벌써 사제가 된 줄 아는데, 에드가 백작님께서 너 같은 평민을 직접 만나실 줄 알아?”

데릭 브레어의 말이 페시아에겐 비수로 꽂혔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좋게 말할 때 따라와. 대접해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안 그러면 네 앞에 있는 놈과 보육원 아이들이 무사하지 못할 거니까.”

페시아가 가문으로 복귀하지 못한 이유.

저 돼지 같은 녀석이 그녀를 협박해서 못 오고 있는 거라 확신했다.

병사들의 감시도 한 몫했을 터.

클라우드는 듣다가 귀가 썩을 것 같아 끼어들었다.

“에드가 백작의 직인이 찍힌 동의서를 보여라.”

“저 미친놈을 봤나, 에드가 백작? 그분이 네 친구냐? 어디서 굴러온지 모르는 근본 없는 거지새끼가 함부로 이름을 지껄여.”

“흥분하는 걸 보니 동의서는 거짓말이군.”

데릭 브레어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다.

자신의 말에 따박따박 반박하는 녀석.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행동.

잘생긴 얼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드 경, 당장 저 오만방자한 놈을 잡아다가 내 앞에 꿇려 오시오. 목숨만 붙여 놔도 좋소.”

“그러지요.”

40대의 한 기사가 위풍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그가 옆구리에 차여진 검을 빼 들고는 오러를 주입했다.

그걸 본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오오, 소드 오러다.”

“소드 오러를 뽑을 수 있으시다고 듣긴 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병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주위의 반응을 본 미드는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에 어깨가 으쓱했다.

‘흐흐, 이런 맛에 내가 지방에서 기사 노릇을 하는 거지.”

미드가 내보이는 경지.

검에 오러가 담겨 있으나, 완벽한 게 아니었다.

옅은 파란색.

소드 오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이가 봤다면 소드 오러라고 하지도 않았다.

클라우드는 미드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흥, 익스퍼트의 경지에도 못 오른 놈이 소드 오러는 무슨. 딱 봐도 소드 유저구만.’

미드의 경지가 딱 그랬다.

하지만 지방의 영지에선 그의 경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소드 오러로 네 녀석의 목을 치기 전에 어서 데릭 도련님께 사죄해라.”

“…….”

클라우드가 아무 말이 없자, 데릭 브레어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하하, 미드 경의 실력에 겁을 지린 모양이오.”

“과찬이십니다.”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고 있을 때였다.

클라우드의 작은 목소리가 그들의 귀로 들린 것이.

“재밌군, 그러면 나도 답례를 하지.”

내공을 끌어올리자 팔찌가 단검으로 변했다.

지하 감옥에서 얻은 글렌 카시미르의 무기였다.

손을 앞으로 내밀며 단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불길한 검은 아지랑이가 하나둘씩 단검에 모여들더니 날을 바짝 세웠다.

미드가 보였던 희미한 색이 아닌 완연한 색.

거기에 길이는 점점 길어졌다.

“마, 말도 안…돼.”

미드가 경악성을 토했다.

완벽한 소드 오러.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만 쓴다는 전유물.

그 소드 오러가 지방 영지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클라우드는 소드 오러를 그들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쾅쾅쾅쾅!

단검에서 쏘아진 빛살이 모여 있는 병사들을 피해 땅을 때렸다.

뭉게구름이 일어나며 콜록거리는 사람들.

먼지가 걷히자, 모두가 경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쇼는 끝났으니까 이제 나한테 무례하게 군 대가는 치러야지?”

클라우드는 이곳에 모인 병사와 미드, 그리고 데릭 브레어에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퍽퍽퍽.

단검에 주입한 검기는 장식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맨손이면 충분했다.

한 명당 한 주먹.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크허허억!”

“사, 살려 주세요.”

“너희들은 주인을 잘못 둔 죄로 맞는 거다.”

“저, 전 명령에 따랐을… 악!”

병사와 미드가 나가떨어져, 바닥에 드러누웠다.

데릭 브레어만 남아서 이 모든 걸 두 눈으로 지켜봤다.

“너, 너 대체 누구야.”

“너 같은 놈에게 가르쳐 줄 이름 없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원하는 게 돈이라면 줄 게 아니면, 명예를 원해? 아, 아버지께 말해 기사 작위를 내릴 테니, 여기서 그만하는 게 어때?”

클라우드에게 돈과 명예를 말하고 있었다.

이미 그 부분에서 초월한 지 오래.

그게 아니더라도 명예의 중심에 있는 카시미르 가였다.

데릭 브레어가, 그의 아버지인 남작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장남으로서 가지고 있는 권한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정신을 못 차렸네, 그러니 좀 맞자.”

“히이익!”

퍽퍽퍽.

특별히 데릭 브레어는 한 번의 주먹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러 번.

아니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의 몸을 때렸다.

쓰러지려하면 넘어지지 못하게 팔목을 잡아 균형을 잡아다가 계속 때렸다.

한 번 때릴 때마다 그의 살이 출렁거렸다.

쓰러진 병사 중 제일 먼저 당한 이가 데릭 브레어가 맞는 장면을 보고 일어나려던 걸 멈추고 다시 조용히 몸을 뉘였다.

한동안 구타는 계속 이어졌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마을에 퍼졌다.

“개운하군.”

얼마 후, 클라우드의 앞에 일렬로 가지런히 서 있는 병사들.

데릭 브레어와 미드도 공손한 자세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눈에 멍이 들었다.

특히 데릭 브레어는 얼굴에 혹이 두 덩이가 올라와 사람인지 몬스터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돌아가서 아버님께 다 말할 거야.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너와 관계된 모든 놈을 죽이고 말겠어!’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클라우드가 그들을 향해 경고의 말을 전했다.

“돌아가서 허튼짓하지마, 두 번의 경고는 없어. 정 덤비고 싶다면 덤벼봐, 뒤에 있을 결과는 책임 못 지니까.”

그러고 나서 손을 휘휘 저었다.

가보라는 말.

눈치 빠른 미드가 데릭 브레어를 데리고 마을을 나갔다.



***



남작가의 성.

여자와 부둥켜 놀고 있는 50대의 남자의 방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그 소리에 남자가 신경질을 냈다.

“누구야, 내 즐거운 시간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

방 밖에서 한 남자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차마 앞을 보지 못했다.

아랫도리를 덜렁거린 채 알몸으로 두 명의 여자와 나뒹굴고 있는 사람.

포트 마을을 다스리는 브레어 남작이었다.

“데릭 도련님이 돌아왔습니다.”

“둘째가?”

“페시아를 끌고 왔나?”

“그게…….”

“왜? 못 끌고 온 거야?”

“직접 나가 보심이…….”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브레어 남작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마주한 차남과 병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데릭!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버지…….”

“그래, 그래, 말해 보려무나.”

못났다고 하나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들이었다.

그의 얼굴에 파란 멍 자국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남작이 분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페시아를 어떤 놈이 데려갔다는 것이다.

사제가 된다는 말은 거짓말.

마을에 제일 예쁜 미인이 귀족 가에서 돌아왔다는 소릴 듣고 한 번 배꼽을 맞춰 보고 싶었다.

강제로 취하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그래서 계획한 게 사제로 추천되어 남작 성으로 데려오려는 것이었는데, 방해꾼이 나타난 것이었다.

와중에 데릭 브레어는 서러움을 쏟아 내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나타나서 저희들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어요.”

차마 자신의 생각을 알릴 수 없어 아들을 위한 척 연기했다.

“어떤 놈이 우리 아들을!”

“가서 혼내 주세요.”

스무 살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미드 경은 어디 있어?”

“미드 경도 그 새끼한테 맞고 중상을 입은 바람에…….”

“허, 알았다. 곧 채비해서 오마. 성의 모든 병사와 기사는 집결하라고 명령을 내려라.”

자신에게 보고하러 온 남자에게 명을 내린 남작은 방으로 도로 들어갔다.

‘더 탐욕스러워져라. 그게 네놈을 살려 두는 이유야.’

브레어 남작에게 보고하러 온 남자, 로즈가 남작의 뒤에서 눈을 빛냈다.



***



데릭 브레어와 그의 병사들이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근심이 어려 있었다.

클라우드가 대단한 사람인 건 알았다.

하지만 그가 마을에 계속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뒷감당은 오직 마을 사람들의 몫.

그가 카시미르 가의 장남이란 사실을 모르는 그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산전수전 다 겪은 클라우드.

저들의 축 처진 어깨에 어떤 근심이 있는지 눈치챘다.

페시아를 데리고 바로 가문으로 돌아가려는 걸 하루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보육원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녀는 언니이자, 누나이자, 엄마였으니까.

아이들의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 그녀가 클라우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가문에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만약 가문에서 널 보낸다고 하면 내가 막아 주마. 이래봬도 네가 없는 동안 나를 보던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사실이었다.

그녀가 없는 두 달.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는 악명 높은 밤의 끝자락을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페시아는 못 들었을 테지만, 그로 인해 그를 보는 시선이 바뀐 건 사실이었다.

“혹시나 도련님께 피해라도 가는 날에는…….”

“남작 따위에 내가 피해를 본다고? 넌 나를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야?”

“저, 절대로 아니에요.”

페시아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장난이다. 역시 널 놀리는 건 재밌어.”

이 느낌이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건 언제나 편했다.

이젤라와 더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이기적인 생각이겠지만, 그녀를 사제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페시아가 울상을 짓다가 금세 표정을 풀고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빨리도 오는군.”

“네?”

“예상은 했는데, 어지간히 급한 성격을 가진 놈들이야.”

페시아의 고향까지 단번에 달려온 클라우드가 할 말은 아니었다.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 입구쪽으로 가니 백마를 탄 돼지 한 마리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남작이냐?”

“데릭이 말한 대로 정말 미친놈이 맞구나.”

초면에 반말을 찍찍 내뱉는 청년.

그런데 그를 보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를 아느냐?”

“몰라, 네가 나를 아는 거겠지.”

브레어 남작은 클라우드를 유심히 보았다.

‘어디서 얼핏 본 것 같은데.’

양아치 같지만, 움직임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기품.

곱상한 외모, 거지꼴을 하고 있으나 귀족이나 입을 법한 값비싼 비단으로 된 옷을 입었다.

“어느 집 자제지?”

“그게 중요한가?”

“말이라고.”

“감당할 자신 있나?”

“남작인 나보고 하는 말인가? 우습군, 감당할 자신 없으면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시 한번 묻지 어느 집 자제냐.”

“말하기 싫다면?”

브레어 남작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허허, 말하지 않는 걸 보니 몰락한 귀족이나 되는가?”

남작이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

어디서 한 수 배운 실력에, 몰락한 귀족.

빤한 스토리였다.

미모의 사제 후보와 바람이 나서 도망치는 멜로 연극.

‘별 볼일 없는 녀석이야.’

라고 단정 지어 버렸다.

좀 더 면밀히 볼 수도 있었는데, 브레어 남작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페시아.

그녀의 얼굴을 본 브레어 남작은 다른 일에 관심을 쏟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자를 밝힌 그에게 페시아의 미모는 최고였다.

왕국에서도 몇 없는 외모.

뽀얀 살결.

거기에 어린 나이까지.

그녀는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매력적인 여자였다.

남작가에 있는 성노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놈을 당장 죽여…….”

브레어 남작이 클라우드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려는 그때.

두두두두.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레어 남작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자 눈에 익숙한 깃발에 보였다.

“카시미르 가의 깃발?”

수 기의 말.

그 중 선봉에 선 적발의 여자가 탄 말에 꽂혀 있는 깃발은 카시미르 가를 상징하는 표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