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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온 클라우드는 예배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르히 여신상 아래에 마법 문자 통신구를 놔뒀다고 했지?’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포포비치의 소식이 없다면 왕국에서 의심할 터.

클라우드가 저택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형님!”

“무슨 일이야?”

헐레벌떡 뛰어오는 율리.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용서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네 어머니를 용서했다면 너까지 못 보게 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 없다. ”

그러고 나서 매몰차게 뒤돌아 걸어갔다.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후계자 자리를 포기…….”

우뚝.

클라우드는 걸어가던 발음 멈춰 세웠다.

“그깟 후계자 자리 때문에 네 어머니를 살려줬다고 착각하나 본데, 아니다.”

일부로 냉정하게 말했다.

율리의 얼굴엔 미안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평생을 감금당한 채 아들을 못 보고 죽을 텐데.

‘저렇게 여리니 여태껏 낳아 준 어머니에게 휘둘리는 거지.’

율리의 나이는 15살의 소년이 아니었다.

20살이 넘은 어엿한 청년.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벗어날 나이였다.

자신에겐 큰 짐이 있다는 착각 속에 살며 허우적거렸다.

형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짐.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는 좀 나아졌으나 아직 멀었다.

좀 더 놓아도 됐다.

“가문의 가주 자리는 관심도 없다. 귀찮기도 하고, 네가 해라 후계자.”

“네?”

“난 어디 한 곳에 얽매이는 건 질색이거든.”

한 단체를 이끌어 간다는 건 머리털이 하얗게 변할 만큼 골머리를 썩는 자리였다.

클라우드도 이전 삶에서 한 단체를 이끌던 인물.

그 조직이 카시미르 가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하나를 결정하는데, 수많은 인물의 생사가 결정된다.

밥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한다.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수면 시간도 부족했다.

그런 삶은 과거로도 충분했다.

이곳 다른 세상에서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결혼도 하고 살고 싶었다.

‘후계자는 무슨. 줘도 안 해.’

가문은 동생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자신은 수호자고 뭐고 마음대로 살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보마.”

클라우드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원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율리는 벙찐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



클라우드가 예배당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도하는 사제들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카시미르 가의 장남이 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클라우드 도련님 오셨습니까?”

예배당의 사제들은 대부분 레르히 신전 소속.

그러나 이곳 카시미르 가만은 달랐다.

외부에서 파견 나온 사제 말고는 모두 카시미르 가의 가솔 출신이었다.

그래서 호칭을 도련님이라 불렀다.

원래 있던 사제들이 그리 부르니 파견 온 사제조차 호칭을 똑같이 했다.

“잠시 찾을 게 있어 왔습니다. 하던 기도 계속하세요.”

클라우드가 왔는데 어떤 누가 아무렇지 않게 기도를 하겠는가.

사제들이 그가 하는 행동을 멀찍이 지켜만 봤다.

‘저긴가?’

예배당의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레르히 여신상.

석고로도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한 여신의 모습이 조각된 곳으로 걸어갔다.

여신상의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을 발로 여기저기를 밟으며 무언가를 찾았고,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발로 밟은 부분.

정말 미세하게 사각형 모양의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안력을 돋우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크기였다.

쾅!

주먹으로 바닥을 강타해 무너트리자, 마법 문자 통신구와 장치를 여는 열쇠가 있어 집어 들었다.

예배당에서 할 일은 끝났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도 마저 하세요.”

클라우드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도구를 가지고 당당하게 예배당을 나섰다.

“…….”

“…자자, 멍하니 있지 말고 레르히 여신께 기도합시다.”

사제들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아 다시 기도에 집중했다.

예배당에서 나온 클라우드.

꿈의 정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가문에서 외진 곳이라면 단 두 곳이 있었다.

자신이 쓰는 연무장과 이 꿈의 정원.

여기라면 마법 문자 통신구를 발동해도 누가 볼 염려는 없었다.

철컥―

열쇠를 꽂아 돌리자, 경쾌한 소리가 나며 통신구가 열렸다.

안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이 있었다.

“어디 작동해볼까?”

열쇠를 반대쪽으로 돌리자.

구슬이 투명하게 변하더니, 빛이 뿜어지며 공중에 문자가 나열되었다.

“오∼”

무림에 없는 도구.

마법이라는 건 꽤 신기했다.

시간이 지나자 허공에 여러 문자들이 나타났다.

손을 휘휘 젓자 나열된 문자가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고,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이건 포포비치가 왕국에 보낸 문자 기록이군.”

과거부터 최근 기록까지 전부 쓰여 있었다.

첫 번째로 보낸 문자를 보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왕국에서 내게 흑마법을 건 거였어.”

백작 부인의 사주로 흑마법이 걸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국왕의 명으로 클라우드의 몸에 흑마법을 시전 했다고 쓰여 있었다.

기록을 전부 보았다.

모두 자신에 관한 내용들.

문자의 내용들을 보면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부 나를 경계하는 내용들이야.”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개망나니를 왜 두려워할까?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글렌 카시미르와 아스란 국왕이 약조한 내용.

피의 저주이자, 명예를 짊어질 수 있는 자리.

그들이 경계하는 건 수호자의 탄생이었다.

“몇백 년은 잘 유지가 됐을 테지만.”

수백 년이 지나며 초대 국왕의 유지는 퇴색되었다.

남은 건 오직 경계심뿐.

왕국도 두려워해야 할 힘을 가진 카시미르 가의 장남을 말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왕도 다를 바 없었군…….”

귀찮은 일은 질색이나, 하필 자신을 건드렸다.

클라우드의 육체에서 정신이 깨지만 않았더라면 관여치 않을 텐데.

이번 일은 자신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문자를 조합해 나갔다.

[클라우드의 두 번째 금제가 개방됨, 더 지켜보다가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음.]

이 하나의 편지로 포포비치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렸다.

이 정도면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터.

그 동안 자신은 경지를 더 높일 필요가 있었다.

“대어가 낚일까 아니면 잔챙이가 낚일까?”

둘 다여도 상관없었다.

따로 따로 처리하려면 귀찮음도 두 배가 된다.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철컥―

열쇠를 가운데로 돌려 빼고, 마법 문자 통신구를 닫았다.

클라우드가 팔짱을 끼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허, 이래서 활불 그 땡중이 낚시를 즐겼나? 왜 이렇게 기대가 되지?”

어떤 물고기라도 좋다.

자신을 재밌게 해 줄 물고기면 더 좋을 거고.

처음의 귀찮음은 마음속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



웅장한 기사의 조각상들이 좌우로 늘어선 대전 안.

왕좌에 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레이먼스 아스란.

아스란 왕국의 통치권자인 그가 권태로운 표정을 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말해 보아라.”

무릎을 꿇은 남자.

고개를 숙여서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10조장 포포비치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였나이다.”

“아니, 그다음.”

레이먼스 아스란 국왕이 의자에 기댄 등을 일으켜 세웠다.

“카시미르 가의 장남이 두 번째 금제를 해제했다고 했나이다.”

“에드가 백작이 관여한 건 아니고?”

“감히 1왕자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문입니다. 왕국과의 옛정을 봐서 수호자의 역할과 맞바꿨는데, 그럴 리가 있겠나이까.

국왕이 다시 의자에 기댔다.

잠깐 눈을 반짝이는 것 빼고는 권태로운 표정은 여전했다.

“다른 말은?”

“좀 더 지켜보겠다는 말이 끝이었나이다.”

“시험을 해 봐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국왕이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말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광대부터 턱까지 일자로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있었다.

냉혹한 인상의 사내의 입이 열렸다.

“최근 블라드 가와 카시미르 가의 사이가 안 좋아졌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나이다.”

“두 가문은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

“그렇긴 하오나, 블라드 가의 장녀가 카시미르 가에서 안 좋은 꼴을 보였다는 소문이옵니다.”

권태로운 표정을 하고 있던 국왕의 얼굴에 드디어 흥미로운 기색을 띠웠다.

“블라드 가를 이용해 클라우드를 시험하자?”

“그렇나이다.”

“좋은 방법이 있나?”

“마침 재밌는 소식이 있어 잠시 지켜볼까 합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 ‘고요한 숲’의 단장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경과를 지켜보고 다시 보고하도록 하라.”

“국왕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포포비치가 죽은 지 한 달.

그동안 새로 습득한 암천의 권역과 익힌 무공을 되짚어 봤다.

내공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발전하는 속도가 여타 천재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연무장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던 클라우드가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캬∼ 시원하다.”

힘든 수련을 끝내고 먹는 물은 영약보다 좋았다.

아니, 너무 과장했나.

물을 마시며 잠시 쉬고 있는데, 문득 페시아가 생각이 났다.

클라우드가 같이 수련하고 있는 이젤라에게 말했다.

“페시아는 돌아오는 게 늦나 보지?”

“주변 시녀에게 물어봤더니, 기간을 어긴 아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 있나?”

두 달이라는 시간.

페시아가 없는 한 달은 마음이 공허하기만 했다.

다른 세계에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여서 그런가.

그녀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이젤라가 그 빈자리를 채워 줬지만, 페시아가 채워 주는 부분과는 엄연히 달랐다.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두 사람.

그중 한 명이 없으니 뭔가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제가 시녀들에게 한 번 더 물어볼까요?”

“아니야,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클라우드가 수련을 접었다.

그만큼 페시아가 궁금하다는 말.

그녀도 따라나서려는데, 그가 뒤를 돌아봤다.

“이젤라는 수련 계속해. 나 혼자 알아볼 테니까.”

“아닙니다, 저도 같이…….”

“됐어, 열심히 해서 하나의 벽을 또 뛰어넘어야지.”

하나의 벽이란 소드 익스퍼트 중급으로 가는 길.

그녀에겐 아직 멀고도 먼 경지.

클라우드은 그 벽 너머를 주문했다.

이젤라의 눈은 투지로 불타올랐다.

요즘 주군께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하고 있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 주군이 단독 행동을 할 때 나는 최대한 수련에 집중해야 해.’

이대로 방해꾼으로 전락할 수 없으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수련을 더 하다 가겠습니다.”

“어깨에 힘 빼고, 보폭을 좀 더 간결하게 하면 검을 휘두르는데 편할거야.”

그녀에게 충고를 해주고 페시아와 친한 시녀를 찾아 나섰다.

‘릴리라고 했던가?’

그녀를 찾으러 가문의 요리를 담당하는 부엌으로 갔다.

두리번두리번.

그러자 클라우드를 발견한 시녀가 놀라며 소리쳤다.

“클라우드 도련님?”

“크흠.”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릴리를 찾고 있다.”

찾고 있는 시녀의 얼굴을 알지 못한 그가 이름을 말하자.

“아, 잠시만요. 릴리! 첫째 도련님께서 찾아.”

안쪽 부엌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 도련님. 무슨 일로 절 찾으셨어요?”

“페시아가 고향으로 가면 원래 이렇게 늦게 오나?”

“아니요, 저도 그게 조금 이상해요. 원래 일주일은 빨리 오던 애인데. 오다가 도적이라도 만난 걸까요?”

“이런! 내가 그 생각을 왜 못한 거지?”

무림에서도 산적이 판을 쳤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 잡듯 죽이는 녀석들.

이곳이라고 다를 게 있나.

그리고 페시아는 여자였다.

그것도 어디 가서 보기 드문 미녀.

도적이 나타나면 눈이 회까닥 돌기에는 충분한 얼굴이었다.

“내가 가봐야겠어.”

후웅-

거센 바람이 부엌에 들이닥쳤다.

시녀들이 앞치마와 나부끼는 머리를 붙잡았다.

그녀들이 눈을 감은 사이 클라우드가 부엌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도, 도련님이 사라지셨어.”

“어디 가신 거야?”

“설마 페시아를 데리러 가신 걸까?”

“그런데 왜 내 가슴이 설레지?”

“꺄!”

클라우드의 움직임을 눈치 못한 건 시녀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관심사는 오직 그의 멋진 모습.

한동안 부엌은 클라우드의 이야기로 난장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