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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오롯이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는 듯한 오만함.

단검은 클라우드와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이끌린 건가.

그가 무의식적으로 공중에 떠 있는 단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손을 뻗어 만지려는데 단검에서 어둠이 쏟아졌다.

쏴아아―

그 어둠은 순식간에 클라우드를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공간에 홀로 떨어진 그는 놀라지도, 그렇다고 겁을 먹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할 뿐.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카시미르 가에서 제대로 된 놈을 보냈구나.]

“누구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네 가문을 세운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구나.]

기억 속에 있었다.

아스란 국왕의 친우이자,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에 손꼽히는 소드 마스터.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을 세웠다는 글랜 카시미르의 이야기를 말이다.

무림에서도 후인을 위해 안배를 남기는 일이 있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 인가 보다.

단검을 매개체로 해서 나타난 걸 보니,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 되었다.

‘줄 거 있으면 빨리 주시오.’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말했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신이, 어떻게 최고의 자리로 올라갔을까.

흑영심법을 익히다가 무공을 남긴 이를 지금과 같이 만난 적이 있으니.

딱히 신기하진 않았다.

클라우드의 태도가 너무 평온해서 그런가.

시조인 글랜 카시미르의 목소리가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허, 신기한 놈일세, 넌 내가 궁금하지도 않단 말이냐. 물어볼 것도 없어?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말이 상당히 많은 글랜 카시미르였다.

클라우드는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됐고, 저를 부른 이유가 멉니까?”

[고얀놈이로고.]

“용건 없으면 그냥 갑니다?”

암전된 공간에서 몸을 돌리자, 글랜 카시미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넌 시조에 대한 예의도 없느냐.]

“제가 개망나니란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하필 성격도 거지 같은 놈이 오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전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그가 한발 물러서며 클라우드를 불렀다.

[요즘 애들은 싹수가 노랗단 말이야. 알았다, 나도 시간 없으니 간단하게만 말하마.]

목소리만 들리던 어두운 공간에 한 명의 장년인이 나왔다.

한데 에드가 백작과는 거리감이 느껴진 이유가 뭘까.

백작의 몸은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된 것과 다르게 시조는 호리호리한 몸매라 그런가.

상반된 모습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물론 얼굴의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가문의 비밀은 알고 왔겠지?]

“모릅니다.”

[뭐? 가주가 안 가르쳐 줘?]

“네.”

[그런데 너 이곳에 왜 왔냐?]

“시조께서 불러서 왔지 않습니까?

[아, 아니. 기운이 상당해서 가주가 보낸 줄 알았지.]

글랜 카시미르의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허… 이야기가 꽤 길어지겠구나.]

그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치며,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클라우드가 그의 앞에 앉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넌 내가 어쌔신이던 것도 모르지?]

“전혀 몰랐습니다.”

명망 높은 기사 가문의 시조가 어쌔신이라니.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에드가 백작도 전형적인 기사였다.

[우리 가문이 왜 차남이 대를 잇는 건지 알려 주마. 귓구멍 크게 열고 잘 들어라.]

“그러죠.”

[내 특이한 성질 때문이다. 즉, 오러의 기운 때문이지. 내가 가진 은밀한 기운을 가진 오러는 내 자식들에게도 영향이 갔다. 물론 전부가 날 닮은 건 아니였지.]

장남인 첫째는 글랜 카시미르를 빼다 닮았지만, 차남은 아니었다.

육체의 그릇이 크고, 단단했다.

딱 기사에 맞는 체형.

[그래서 고민에 빠졌지. 날 닮은 녀석을 후계자로 세워야 할지, 아니면 기사의 성질을 가진 차남을 세워야 할지.]

고민은 날로 커졌다.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카시미르.

친우인 아스란 국왕 빼고는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했다.

밤의 암살자.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서서 사람을 죽이는 자.

겉으론 내색하지 않지만, 대륙이 어쌔신이란 직업을 꺼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거기에 정점에 오른 글랜 카시미르는 오죽할까.

그래서 걱정이었다.

자신처럼 장남인 아들도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을까봐.

대륙은 무력이 다가 아니었다.

정치와 신성을 믿는 세상.

무력만으로는 세상에 홀로 설 수 없었다.

아직 미숙한 아들들은 세상의 풍파를 견디긴 힘들었다.

걱정거리는 점점 커졌다.

가문은 후계자 문제로 싸우는 횟수가 증가했다.

손 놓고 있다간 내분으로 망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자신의 친우이자, 국왕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괜찮은 제안을 해온 것이었다.

[장남은 왕국의 수호자 역할로 차남은 내실을 다지는 가주의 역할을 하면 어떠냐고 말하더군.]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였군요.”

[맞아, 장남이 왕국의 수호자지만, 활동할 때만 음지에 있지 평소에는 양지에서 활발하게 생활했어.]

장남은 카시미르 가의 검법도 익혔을 터.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또 한 왕국의 위기나, 패악을 부리는 국왕이 나타나면 수호자가 해결하게 만들었다.

왕가는 경각심을 가지게끔.

카시미르 가의 왕가를 수호하는 비밀스러운 직책은 이렇게 친우인 국왕가 글랜의 약조에 의해 탄생했다.

[수백 년은 잘 이어져 내려오다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어떤 문제입니까?”

[몇 대인지는 모르겠군. 가주가 아들들에게 가문의 비밀도 말하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일이 발생했어.]

수백 년의 유지를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이곳에 띄엄띄엄 오더니. 최근에는 자격도 없는 놈이 들어오더군.]

“자격이라면?

[전대 어쌔신의 아들이 왔어.]

“그러면 안 됩니까?

[내 피는 모든 명예를 짊어지면서 저주이기도 해.]

‘똑같은 혈계 아닌가?’

클라우드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 금지에서 나의 힘을 계승하고 나면, 그의 자식은 힘없이 약하게 태어난다.]

모든 힘이 계승으로 인해 아비에게로 갔으니.

계승자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은 약해졌다.

시조의 피는 가문의 저주이기도 하다는 말이 내심 이해가 갔다.

‘시조의 말은 즉, 장남이 왕국의 수호자가 되며 모든 명예를 지님과 동시에 한 세대로 그 영광이 끝난다는 거고, 차남은 가문을 잇는 식으로 둘로 나누어 가진다는 소리군.’

정말 빌어먹을 피었다.

자신도 시조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저주가 새겨져 있다는 말.

이윽고 그의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났다.

기나긴 침묵이 흐르다가 글랜 카시미르가 쓴 웃음을 지으며 침묵을 깼다.

[정말 씁슬해…….]

“뭐가 말입니까.”

[후손들에게 이 말을 전하면 다 너와 같은 표정을 짓더군.]

그럴 만하다.

누가 이런 저주를 좋아하겠는가.

[대화가 길어졌어, 계승 의식을 시작할까?]

“전 별로 받고 싶지 않군요. 거절하겠습니다.”

계승 의식을 받으면 자신의 자식은 쓸모없는, 막말로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었다.

명예?

무림에서 원 없이 받아 봤다.

여기서 그딴 명예 없어도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거절한 건데.

[…그럴 줄 알았다.]

글랜은 마치 예상하듯 대답했다.

“별로 화를 안 내시는군요.”

[수백 년을 지켜봐 왔다. 나라고 후손들에게 똑같은 상황을 겪게 하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 내 친우이자 국왕인 아스란과의 약조 때문에 계속 이어 온 것뿐이지.]

그의 말이 끝나고 암전된 공간에서 빛이 뿜어지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쉽군요, 좋은 거라도 얻어 갈 줄 알고 왔는데.

[계승은 못 해줘도 다른 선물을 주마.]

우웅.

그러자 단검이 말하듯 울었다.

“이름이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무기에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 있느냐. 없다.]

“마음에 듭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다.

무기는 살인을 저지르기 위한 도구에 불과 할 뿐.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짓은 정신 나간 미치광이나 하는 짓이었다.

클라우드가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단검에서 공명음이 들리더니 일자로 늘어지며 손목에 휘감겼다.

“하?”

무림의 십대신병 정도의 수준인가?

얼핏 보기에 좋은 무기인 듯 했으나, 직접 잡아보니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듯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문의 저주를 풀어 주길 바란다.]

“생각해 보죠.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일 없다, 이놈아.]

시조 글랜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간수장과 기사들이 깨어났는지, 바깥이 시끄러웠다.

‘포포비치가 죽은 걸 봤군.’

위층의 소리의 집중하니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조심히 빠져나가야겠어.’

다행히 기사들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



다음날.

마지막 일정이 남은 무도회는 취소가 됐다.

블라드 공작가의 장녀가 수치심만 남기고 떠났으며, 센이드가의 장남도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이 그늘진 채 돌아갔다.

남은 사절단들도 에드가 백작을 만난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사절단까지 보내고도 카시미르 가문은 분주했다.

에드가 백작이 올코프 기사단장과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누가 죽였는지 사인은 안 밝혀졌소?”

“…네, 죄송합니다.”

“단장이 미안할 게 뭐가 있나. 시신은 내가 한 번 살펴보지.”

에드가 백작은 손수 포포비치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모공이 열려 있었고, 눈과 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어금니가 깨질 때까지 이를 악문 걸 보니… 죽기 전까지 심하게 고통스러워했군.”

양쪽 어금니가 나간 상태.

손바닥은 어찌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에 살이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심장을 관통한 상처.

“일격에 비수가 가슴에 박혔고.”

에드가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포포비치를 죽여서 이득을 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엔 누굴 시켜서 죽였을까.

오러가 봉인된 상태인 포포비치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영지 안에서 가장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는 장소였다.

백작이 곰곰이 고민을 하고 있는 그때.

“포포비치가 죽었나 보군요.”

뒷짐을 진 채 태평하게 걸어오는 인물.

“충!”

“첫째 도련님을 뵙습니다.”

클라우드 카시미르였다.

기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달라진 위상.

한때는 개망나니라 부르며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수고가 많다.”

오만할 정도의 당당함.

그러나 아랫사람을 깔보는 게 아닌, 상관이 당연하듯 인사를 받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꽤 골치 아프시겠습니다.”

그런 클라우드에게 에드가 백작이 넌지시 물었다.

“넌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절 죽이려는 사건을 덮자는 말이십니까?”

“아니, 그 일은 확실하게 매듭을 지을 생각이다.”

에드가 백작의 눈은 단호를 넘어 매섭기까지 했다.

“왕국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으음.”

백작이 신음했다.

딱히 방법이 없었다.

‘고요한 숲’의 조장이 카시미르 가에서 죽었다.

수년간 잠입을 했다지만, 엄연히 국왕의 명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죽었으니 이 일을 계기로 꼬투리를 잡을 게 뻔했다.

“제게 생각이 있다면 따르시겠습니까?”

“한 번 들어나 보자, 말해 봐라.”

“우선 약속부터 해 주십시오.”

이러나저러나 가문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왕국에서 장남인 클라우드를 죽이려고 했다지만, 그건 수년 전부터 있던 위협.

자신의 형이 왕국에 빛을 지고 나서부터 가문은 급격히 기울고 있는 추세였으니.

지금으로썬 방법이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러마.”

클라우드가 무림에서만 쓰는 전음은 쓸 수 없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드가 백작이 눈치를 채고 기사들에게 말했다.

“자리를 물려라.”

기사들이 저 멀리 떨어졌다.

“포포비치가 왕국과 연락을 주고받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제가 포포비치를 죽였으니까요.”

난데없는 고백에 그의 눈이 커지며 클라우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부인이 범인인 줄 알았는데, 아들이 제 입으로 죽였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포포비치는 어디까지나 부인을 압박할 증인이었으니까.

“네가 말이냐? 왜 그랬느냐?”

“이번 사건을 조용히 넘기려면 포포비치가 죽어야 했습니다.”

“부인을 용서해 준다는 말이냐?”

단호하던 얼굴과는 다르게 속이 많이 탔나 보다.

“그럴 리가요, 전 뒤끝이 깁니다. 율리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는 못해도 평생 가문의 저택 밖으로 못 나오게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율리의 이름이 나올 때부터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졌다.

“그건 네 말대로 따르마. 하지만, 왕국은 어찌할 셈이냐.”

“시간만 벌면 됩니다.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감당할 자신은?.”

자신에게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물어보는 건가?

천하의 암천제에게?

“조금의 시간만 벌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