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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대련이 끝났다.

연무장에 홀로 남은 율리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후우욱.”

형과의 대련이 있기까지.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없었다.

밤의 끝자락을 이긴 형이나 자신 또한 그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이자, 차기 검성 후보로 거론된 자신이었으나.

형과의 대결은 비참할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전력을 다해 공격을 펼쳤다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텐데, 형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다.

실력 차이는 명확하다 못해 비교할 수 없었다.

‘완패였어.’

지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 생각은 어느새 날아가고 없었다.

‘대체, 그건 뭐였지?’

어둠이 자신을 집어 삼킨 순간 꼼짝할 수도 없었다.

오러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 저항했는데, 소용없었다.

그저 패배를 순응할 수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겁이 났다.

만약 적이었다면 속절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정말 대단했어.’

대단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소드 익스퍼트의 상급에 달하면 대적 가능할까?

율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

소드 마스터라면 가능할지도.

왕국에서도 보기 힘든 경지였고, 그만큼 도달하기도 어려웠다.

형은 자신의 안목으로 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렸다.

‘후련해.’

이젠 마나 하트도 만들지 못하던 형이 어떻게 굉장한 힘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형이 변했다는 게 율리에겐 중요했다.

대련과는 별개였다.

속에 있는 말을 형에게 다 했으니, 뒤의 결과는 따를 뿐이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니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검이나 한 번 더 휘둘러야지.’

목표가 없는 율리에게 드디어 목표가 생겼다.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는 형.

그를 목표로 삼았다.

‘꼭 따라잡고 말겠어. 따라잡을 수 없으면 뒤꽁무니라도 쫓아야 해.’

율리의 다짐이었다.

여태껏 어머니의 암수로부터 형을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마음의 짐.

이제는 온 정신을 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 때문에 열린 무도회도 잊은 채 검을 본격적으로 휘둘렀다.



***



율리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긴 무렵.

클라우드는 이젤라를 데려오기 위해 무도회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옷이 엉망이야.’

율리가 일으킨 흙먼지 덕분에 옷이 더러워졌다.

헝클어진 머리는 정리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섰다.

그러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경지가 한층 오른 클라우드에게 무도회장 안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듣는 듯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중 유독 신경이 거슬리는 목소리.

엘리나의 음성이었다.

[정말이야? 몰락한 귀족도 모자라, 큰 죄를 지은 가문의 자식이 클라우드 오라버니의 전속기사면…….]

그녀가 운을 띠우자, 주변의 귀족 자제들이 음담패설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동경어린 눈으로 이젤라를 보던 귀족 자제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행동하는 인간은 언제나 있기 마련.

문제는 분란을 일으키는 자였다.

자신의 것을 건들이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저년을 그냥 놔둔 게 잘못이야.”

클라우드의 걸음이 빨라졌다.

쾅!

무도회의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힌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엘리나의 앞에 섰다.

“내가 분명히 네 연극에 놀아날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귀가 썩었나? 아니면… 날 무시하는 건가.”

화아악―

그의 몸에 거대한 기운이 일렁였다.

패기.

그것도 일반적이 패기가 줄기차게 뻗은 게 아닌, 새로 얻은 암천의 권역이었다.

무도회장에는 때 아닌 어둠이 내려앉았다.

암전.

주위는 온통 어두워졌다.

더욱 소름 돋는 건 곁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안 들렸다.

어둠속에 혼자 떨어진 기분이었다.

쿵!

지축이 한 번 울리자, 무도회장에 있는 이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때 들려오는 만년설 같은 음성.

“내 영역에서, 그것도 내가 아끼는 전속 기사에게 주제도 모르고 행동한 대가를 치루 게 해주마.”

자신이 이젤라를 굴리고 괴롭히는 건 됐다.

하지만 남이 자신의 부하를 헐뜯는 건 참지 못한다.

그녀가 당하는 건 자신이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마음껏 버텨봐라.”

무도회장은 암천의 권역으로 지정되었다.

패기는 귀족 자제들을 짓눌렸다.

덜덜.

“이, 이게 무슨!”

“저, 저희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그들의 손, 발이 떨려 왔다.

이는 탁탁 부딪치며, 눈은 클라우드와 마주치지 않고 내리 깔았다.

도저히 그를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

그들은 오러나 마나로 저항할 생각은 진작 포기했다.

아니,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엔 공포가 지배했으니까.

가장 심한 사람은 엘리나였다.

클라우드의 패기를 전통으로 맞이한 사람.

엘리나는 자신의 마나로 그의 패기에 맞섰다.

‘지, 질수 없어.’

그의 무심한 눈.

한 없이 냉정한 그의 태도가 그녀에겐 더 없이 충격적이었다.

언제 이런 냉대를 받은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가만 안 둘 거야!’

마나를 극한으로 끌어올릴수록 그의 패기는 그녀의 기운을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그럴수록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아, 안 돼. 싫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무리였다.

4서클이나 5서클이상의 마법사가 아니면, 클라우드의 패기는 함부로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암천의 권역을 거두었다.

귀족 자제들은 핼쑥해진 안색으로 숨을 토해냈다.

“허어어억.”

“푸하, 주, 죽는 줄 알았어.”

“…이게 밤의 끝자락을 이긴 힘이라니.”

소문은 믿을 게 못됐다.

과장이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소문이 덜한 느낌이었다.

직접 겪어보니 자신들과는 강함의 격이 다른 존재였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게 아님에도 그들의 옷은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놀란 감정을 진정시키자, 그들에게 이상한 게 느껴졌다.

“어디서 구린내 나지 않아?”

“진짜.”

“윽! 냄새. 누가 오줌이라도 지린 거야?”

귀족 자제들이 범인을 찾았다.

냄새를 따라 가니 자연스럽게 무도회 중앙에 쭈그려 앉은 엘리나에게 시선이 모였다.

그녀의 하얀색 드레스는 노랗게 젖이 있었다.

“에, 엘리나님!”

시라 데용이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부축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엘리나가 오줌을 지려 버렸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때, 클라우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은 이걸로 넘어가 주지. 하지만 두 번은 없어. 다시 내 영역을 침범한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기사 가문의 카시미르가의 장남이, 마법 가문의 블라드가의 장녀에게 경고를 보냈다.

이건 선전포고와 다를 게 없었다.

클라우드가 돌아 나가려다 뒤를 돌아봤다.

“이젤라 뭐해, 안가? 이런 쓰레기들만 모인 무도회에 계속 있을 거야?”

“아, 아닙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젤라가 뒤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엘리나가 표독하게 쏘아봤다.

‘개자식!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가문에 돌아가면 아버님께 말해 카시미르가부터 없애 버릴거야.’

이로써 두 사람은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



전날의 일이 있어서 그런가.

카시미르가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어 있었다.

3인 1조로 하여 병사들과 기사들이 철통같이 감시하며 저택을 돌아다녔다.

그들 사이로 클라우드가 지나가자.

“충!”

기사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군례를 취했다.

어제의 일을 못 들은 병사들은 이상한 눈으로 기사들을 쳐다봤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기사들이 망나니 도련님에게 군례를 취하니.

보기 드문 광경이라 얼을 타고 말았다.

한 기사가 클라우드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레밀 프런트가 클라우드 도련님을 뵙습니다. 혹, 무슨 일로 밖으로 나오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제의 일을 모르던 병사들은 뜨악했다.

기사의 말투에 존경과 동경이 뚝뚝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우드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 기사와 잠시 걷는 중이다.”

레밀은 그 말에 오해하고 말았다.

카시미르가의 장남이 이틀째 열리는 무도회도 안 즐기고 밖으로 나왔다.

그것도 전속 기사를 데리고.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었다.

어제의 일로 그는 전속 기사와 함께 순찰 중이다.

기사들과 병사들만이 아닌, 망나니의 모습을 청산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말이다.

감격스러웠다.

그럼에도 자신은 말을 전해야 했기에 할 일을 했다.

“도련님껜 당치도 않으나, 백작님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말하라.”

그의 말투에서 위엄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욕을 먹던 개망나니가 맞나 싶었다.

레밀은 어제의 일이 생생했다.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움직임.

주저 없는 손속.

상대의 심리를 이용한 전술.

결국 밤의 끝자락을 잡아내는 순간, 클라우드로 인해 어쌔신을 하찮게 생각하던 그의 생각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래서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백작님께서 저택 밖으로 나온 가솔과 사절단으로 온 손님들을 철저히 호위하라 하셨습니다.”

“난 됐다, 여기 이젤라와 다니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레밀이 순순히 물러났다.

그를 호위한다는 말은 얼토당토않으니까.

“수고하도록.”

“넵!”

레밀이 절도있게 인사하자, 병사들도 그에게 최고의 예를 표했다.

멀어져 나가는 세 사람.

클라우드와 이젤라는 계속해서 걸었다.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이젤라였다.

“저, 주군.”

말에 망설임이 느껴졌다.

“응?”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다고.”

“주군께 제 내력을 숨긴 것 말입니다.”

한참을 걷다 카시미르가의 성벽에 올라 멈춰 섰다.

요새로 된 자신의 가문.

성벽에 올라서니 황량한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뒷짐을 지며 말했다.

“됐어, 다 지난 일 아니야? 과거를 들춰 봤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내가 전에도 말했지 않나? 강해지라고, 그러면 사람들이 함부로 못한다고 했을 텐데. 벌써 까먹었어?”

“기억합니다.”

“과거도 잊게 할 만큼 네가 강해지면, 무도회의 쓰레기들과 엮일 일은 없을 거다.”

이젤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은 주군이 과거를 말하라면 말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주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강해지라는 말밖에 없었다.

주군의 방식은 늘 이랬다.

때론 짓궂은 장난을 좋아할 때도 있고, 위엄과 근엄이 공존할 때도 있었다.

정신을 뒤흔드는 무서움을 지니기도 했다.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모른다.

그러나 딱 하나.

자신을 아낀다는 사실 하나는 안다.

그렇기에 주군에게 충성을 다 할 수 있었다.

‘원하신다면 더 강해지겠습니다.’

그녀가 다짐했다.

이보다 더 강해져서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게 되기를.

“바람도 다 쐤으니까 들어가자.”

“저택으로 가십니까?”

“난 따로 갈 때가 있다. 넌 먼저 들어가.”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클라우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혼자 갈 때가 있어서 그런다.”

“이 시기에 혼자 다니 시기엔…….”

“하하, 몸 잘 챙길 테니 들어가서 쉬어.”

이젤라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절 찾으십시오.”

“알았다.”

그녀의 발이 무겁게 때어졌다.

계속 뒤를 돌아보는 걸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냈다.

‘이제 포포비치를 만나 볼까?’

그가 감금된 감옥이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더라도 뚫는 건 식은 죽 먹기.

은밀히 만나야 했다.

에드가 백작 모르게.

‘내가 왜 너를 안 죽이고 붙잡았을까.’

백작 부인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걸 말해줘서?

아니다.

그런 하찮은 걸로 절대 살려주지 않는다.

녀석을 죽이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뿐더러 알아낼 것도 있어 그저 목숨을 잠시 붙여 놓은 것이다.

클라우드는 이전 생에서도 절대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을 살려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