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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클라우드가 무도회장에 나타나자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자신의 무용담처럼 떠들던 남자들도, 가슴이 설렌다고 표현하던 여자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누구 하나 선뜻 말 거는 이가 없었다.

인상이 워낙 차가워서 함부로 다가서기 힘들었다.

한순간에 개망나니에서 엄청난 고수로 탈바꿈한 것도 한몫 했을 터.

그가 두리번거리면서 무도회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파티가 너무 조용한 거 아니야?”

그때 엘리나 블러드가 눈웃음을 치며 친한 척을 해 왔다.

“오라버니 오셨어요?

“내가 언제부터 네 오라버니지?”

“아휴, 제가 다가오는 게 부끄러워서 또 그러신다.”

그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행동했다.

“꺼져, 널 보려고 무도회장에 온 게 아니야.”

그의 말에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지만, 엘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클라우드의 가치는 너무나 높았다. 자신의 자존심은 구석에 처박아 놓을 정도로…….

그녀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흑흑, 너무하세요.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절 계속 밀치시기만하시고…….”

“하, 그 가면 언제까지 쓰고 있을 작정이지?”

“약혼녀에게 가면이라니요. 말씀이 심하세요. 오라버니가 절 싫어하신다고 너무 막 대하시는 거 아니에요?”

비련의 여주인공 느낌이랄까.

그녀는 작정하고 연기를 했다.

그럴수록 클라우드의 인상은 절로 구겨졌다.

싸움의 여파로 진탕된 내부를 안정시키다 보니 하루가 금세 갔다.

백작 부인에게 가기 전 율리와 만나 볼 요량으로 무도회에 참가한 건데, 생각지도 않는 방해꾼이 나타났다.

‘기가 차군.’

그녀가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알았다.

꿈의 정원에서 보여 줬던 실력으로는 긴가민가했겠지.

그러나 밤의 끝자락을 잡은 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그녀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카시미르가에 소문난 건 클라우드가 밤의 끝자락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내용이었다.

명성이 하루아침에 바뀌니 놓치고 싶지 않겠지.

‘날 어떻게 해보겠다는 수작 같은데, 어림없어.’

마음속에 뱀이 여럿 숨어 있는 여자는 딱 질색이었다.

그녀를 무시하며 무도회장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려는데, 적막하던 회장이 수근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들의 목소리가 클라우드의 귀에까지 들렸다.

“가엾은 엘리나님.”

“상대방을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불쌍해진다잖아.”

“어떡해, 내가 봐도 눈물 나…….”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은 안타까워 탄식을 질렀다.

클라우드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왕도로 가서 정치해도 잘하겠어.”

여자들의 연기에 속으면 안 되겠단 생각이 무럭무럭 치솟았다.

과거에 결혼도 안 해본 그여서 경계를 더 해야 했다.

클라우드는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집착으로 인해 카시미르 가문에 어떤 파문이 일어나는지.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자를 잘 모르는 클라우드는 무심코 넘겨 버렸다.

때 마침, 율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형님,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안 그래도 너랑 이야기를 나눌까 했다.”

“여기선 그렇고, 잠시 나갈까요?”

“그래.”

클라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는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무도회장에 참석한 귀족 자제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



클라우드의 전용 연무장.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할 말이라는 게 뭐냐.”

율리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으며 입을 열었다.

“저랑 대련을 해 주세요.”

“너랑 대련을?”

“네.”

“너와 대련을 해야 할 이유는?”

“끝나면 말씀 드릴게요.”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클라우드는 동생의 전신을 훑어봤다.

흠잡을 대 없는 몸가짐.

경건하게 검을 대하는 자세.

모든 게 훌륭했다.

하지만.

‘저 표정 마음에 안 들어.’

동생은 전처럼 건방지게 행동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철철 넘쳐흐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에 걱정만이 가득했다.

‘녀석도 백작 부인의 일을 알고 있겠지.’

그래서 저런 얼굴을 하고 대련을 하자고 했을 터.

생각을 고쳐줄 필요가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

자신의 심장이 뛴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아닌, 기쁨과 흥분이었다.

율리는 마주하면 언제나 이랬다.

몸의 전 주인은 그를 무척이나 아꼈으니.

옛날같이 살갑게 다가와 주던 동생이 아니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이번만은 클라우드 네 생각대로 해 주마.’

어떻게 클라우드의 몸을 차지한 건지는 모른다.

그의 영혼은 없다 하더라도, 몸은 자신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클라우드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며 말했다.

대련을 수락하자, 율리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알고 있어요.”

“난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알아서 잘 피해봐.”

밤의 끝자락과 싸우고 알았다.

아직 정면 대결은 무리라고.

과거의 무수한 경험 덕에 목숨을 건졌을 뿐이다.

‘밤의 끝자락과 별 차이가 없어.’

정말 한 끗 차이.

율리의 대련으로 앓아누울 수는 없었다.

클라우드는 처음부터 자신의 장기를 활용했다.

어둠이 내리 깔린 곳은 그의 영역이었으니까.

클라우드의 신형이 유령이 되어 사라지려는 찰나.

쾅!

율리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지며 땅을 강타했다.

‘배우긴 잘 배웠어.’

어쌔신은 숨기 전에 공격하면 약점이 노출된다.

율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이 헛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당해 줄리 없는 클라우드였다.

까강!

단검과 검이 교차하자 클라우드는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멀찍이 멀어짐과 동시에 어둠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하늘에 뜬 달빛에 의지한 채 자신을 찾는 율리.

그렇게 형제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



호랑이가 산에 없으면 여우가 왕 행세를 한다고 했나?

무도회장에 주인공이 없으니, 다른 이가 주인공 행세를 했다.

그 인물은 바로 엘리나 블라드.

블라드 백작가의 장녀로, 가문도 튼튼하고 얼굴 또한 예뻤다

마음씨는 얼마나 착한지.

지방 귀족의 남자 자제들은 그녀에게 홀딱 넘어갔다.

“엘리나님, 슬퍼하지 마세요.”

“그래요, 제가 미천한 힘이라도 보태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마음씨 좋으신 분들이 응원해 주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요.”

엘리나가 남자들에게 환한 웃음을 내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약간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슬프면서도 씩씩하려고 짓는 억지웃음.

남자들은 그 미소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서 더 그녀에게 푹 빠져들었다.

그녀의 미소가 자신에게 향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 하필 약혼자가 클라우드냐.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면 하는 생각에까지 빠져든 귀족 자제들이었다.

엘리나는 남자들의 눈에 질투심이 불타오르는 걸 느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남자들이란 멍청한 족속이야.’

자신이 연기하는지 모르는 썩은 눈깔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녀가 자리를 옮기려는데,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와인을 음미하는 이젤라가 보였다.

‘흥, 꼴에 기사라고 고고한 척은.’

여기사는 흔치 않았다.

전장에서 적진 한가운데에 나가 싸우고, 몸에 상처가 많이 나는 직업.

피부를 목숨처럼 아끼는 귀족 여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에 여자들은 기사가 되는 것을 기피했다.

‘클라우드 오라버니에게 붙어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부인이 되면 저년부터 바꿔야겠어.’

엘리나는 이미 클라우드와 결혼 한 것처럼 생각했다.

이젤라의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녀를 통해, 귀족 여자 자제의 질투심을 유발하려했다.

“어머, 클라우드 오라버니 기사님이 구석에서 뭐하세요? 다 같이 어울리시지.”

“전, 혼자가 편합니다.”

누가 기사 아니랄까봐 딱딱한 말투였다.

“이쪽으로 와서 같이 즐겨요.”

엘리나가 이젤라의 손목을 붙잡고 무작정 무도회 중앙으로 이끌었다.

그때였다.

“혹시, 이젤라 아그넬리?”

자신의 풀 네임을 아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시미르가에서도 가주와 단장밖에 모르는 풀 네임.

주군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이름이 불렸다.

“절… 아십니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한 여자가 나타났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주근깨 가득한 얼굴.

“정말 이젤라 아그넬리네.”

그녀를 보고 이젤라의 눈이 커졌다.

“사라…님?”

“어머, 날 기억해?”

이젤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기 싫은 추억.

아그넬리란 성을 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 존재했다.

그것도 사절단으로 초대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기억합니다.”

“출세했네, 클라우드 도련님의 전속 기사도 되고 말이야.”

주근깨 여자의 얼굴에 질투심이 가득했다.

엘리나는 두 사람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다.

‘재밌는 장면이 연출되겠는데?’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 나서 표정을 숨기며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시라, 이젤라님과 아는 사이야?”

“네, 아그넬리 가문이라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십 년 전에 아가씨 가문에 반기를 들다 멸문한 가문이에요.”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죽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이유였으니까.

그래서 그 사실만 쏙 빼고 말했다.

‘저년이 몰락한 귀족의 딸년이라는 말이지? 그것도 우리 가문에 반기를 들어서.’

시라 데용 가문은 왕국 동부에 위치한 블라드 백작가 안에 속한 가문이었다.

데용 가문과 아그넬리 가문은 이웃 영지에 위치해 있었고.

“정말이야? 몰락한 귀족도 모자라, 큰 죄를 지은 가문의 자식이 클라우드 오라버니의 전속기사면…….”

엘리나는 일부로 말을 끝맺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꼴 보기 싫은 이젤라를 쉽게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흡족했다.

자신보다 예쁜 여자를 무너트리는 건 언제나 짜릿했다.

엘리나가 음흉하게 생각하는 사이, 이젤라의 평정심은 이미 깨져버리고 말았다.

옛 인연을 만나서 그런가.

그녀는 평소답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몸에 전해졌다.

심장이 마구 두근댔다.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도 소용없었다.

곁엔 주군도 없어, 무도회장에 덩그러니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다들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문에서도 충성을 맹세한 주군도 배신했는데, 클라우드님도 배신당하는 거 아닌 가 몰라.”

“쌍년이네.”

“저런 년은 내 배 아래에서 허우적거리게 했어야 하는데… 아깝다.”

그녀에게 한마디도 말을 못 걸던 남자 자제들.

면전에 대고 쌍스러운 말을 서슴지 않아 했다.

박쥐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내뱉는 독설이 그녀의 귀로 박혀 들었다.

다행히 한 사람만은 달랐다.

“다 지난 이야기를 꺼내서 뭐해? 엘리나, 네가 이젤라님에게 면박 주려는 것 다 알아. 그만해!”

디온 센이드의 버럭에 엘리나는 기가 막혔다.

이때껏 한 차례도 자신에게 소리친 적이 없기에 더욱 짜증났다.

디온이 한마디 더 하려는데, 무도회장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클라우드가 나타났다.

저벅저벅.

어디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왔는지 옷이 더러웠다.

헝클어진 머리는 차갑게 빛나는 얼굴과 다르게 야성미가 넘쳐흘렀다.

그를 본 엘리나가 표정을 단번에 바꾸며 다가갔다.

“오라버니 어디 갔다 이제 오셨…….”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클라우드의 눈에 핀 붉은 귀화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