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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둡고 은밀한 기운이 이미 혈도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의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크흡!’

밀려오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신음을 토해 냈다간, 바로 주화입마에 빠지기에 악착같이 버텼다.

암천제란 위명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생각해야 했지만.

‘젠…장, 존나 아프…네.’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에 암살다닐 때 위중한 중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독화살이 등 짝에 박힐때도, 당가의 무형지독에 걸렸을 때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가 약해진 걸까.

아니면 약하디 약한 혈도를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넓히려고 하기 때문에 이러는 걸까.

고통에 정신이 잡아먹히려 하자, 상쾌한 기운이 어둡고 침침한 기운을 감싼다.

‘이건 스튜?’

스튜에 들어 있던 기운.

에드가 백작이 꼭 먹으라고 손수 챙겨 준 음식에 있던 기운이 다시 한번 자신을 구해 줬다.

한 기운은 어두우면서 음침한 기운.

잠자고 있던 기운은 청명하면서 날카로운 기운.

두 가지가 내부에 공존하더니 이내 합쳐졌다.

‘기운이 합쳐져?’

두 가지 기운이 합쳐진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단전에서 합쳐지기 시작했다.

우르르 쾅쾅!

그러다 천둥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천둥번개가 치지 않았지만, 클라우드의 귀에는 들렸다.

합쳐진 내기가 원통형 뿔이 되며 혈도를 거침없이 뚫었다.

“컥!”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건 번개였고, 벼락이었다.

뇌전이 온몸을 구석구석 헤집어 놓으니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눈알이 뒤집히는 걸 불굴의 정신으로 가까스로 참았다.

‘젠…장, 누가 이기나 보자.’

다행히 뇌전이 관통한 혈도는 자가 치유가 되는 듯 빠르게 원상 복구가 되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진작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자, 고요하던 대기가 요동치며 미세한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주위는 점차 그 검은 아지랑이로 뒤덮였다.

스스스.

한 겹, 한 겹.

검은 아지랑이는 클라우드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주변을 온통 새까맣게 물들여 버렸다.

“스읍.”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자 검은 아지랑이는 몸과 코로 들어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어둠에 휩싸여 있던 공간은 다시 밝아졌다.

“후우.”

클라우드가 눈을 떴다.

붉은 귀화가 활활 불타오르며 뇌전이 번쩍였다.

“하하, 웃기는 일이군.”

오성 끝자락을 목표로 했는데, 육성 초입에 도달했다.

엄청난 천운.

단 삼 개월만에 이룬 성과였다.

‘과거 육성 초입보다 더 강해.’

두 가지 기운이 합쳐진 상태였다.

육성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경지.

과거에 사용하던 음산한 기운에 현재는 뇌기까지 포함되었다.

새로 생긴 뇌기는 강력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또한 은밀했다.

자신의 기운과 잘 맞아떨어졌다.

마치 제짝을 찾은 신랑 신부처럼 궁합이 딱 맞았다.

기운을 끌어올려 봤다.

화악!

몸에 아지랑이가 퍼지며 주위를 잠식해 간다.

“호∼ 이건 또 뭐지?”

기운을 거두자, 포식자처럼 확장해가던 검은 그림자가 썰물 빠지듯 사라진다.

“신기하군.”

절대자였던 그가 봐도 대단했다.

비도술인 천살과 같이 쓴다면 과연 어떨까?

“이름이 있어야 할 텐데…….”

기를 퍼트려 일대의 공간을 장악하는 무공.

이와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했다.

수천 가지의 무공 단어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든 무공명이 없었다.

클라우드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한 단어를 되뇌였다.

‘암천, 암천…….’

수천가지의 무공 단어 중 마음에 든 것도 없고, 문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그였기에 단순히 생각했다.

“흠, 아무래도 내 별호의 앞 글자 암천에 무공이 일대를 지배하니 권역이라는 말을 넣자.’

정말 단순하게 무공명이 정해졌다.

새로 만든 무공은 암천의 권역이었다.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암천의 권역. 호∼ 생각보다 이름이 괜찮아.”

작명 실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가 홀로 자화자찬했다.



***



모든 일을 끝내니, 피곤이 몰려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경지를 넘어서 그런지 안도감이 몰려온 건가.

잠이 쏟아졌다.

풀썩.

클라우드가 침대로 가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편해, 이래서 내가 긴장감을 잊은 채 산 거야.”

과거의 자신은 천애 고아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곤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무공만이 버팀목이었다.

물론 이 세계도 마찬가지.

다른 게 있다면, 자신을 주군으로 떠받드는 이젤라와 시녀인 페시아 정도?

그 둘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한 명은 감정 없는 목각인형인 듯했고, 다른 한 명은 정반대로 감정이 과했다.

그게 두 사람의 매력이지만.

페시아가 고향으로 떠난 지 한달 밖에 안 됐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었다.

‘가서 일밖에 안 하는 거 아닌지 몰라.’

부지런한 그녀가 편히 쉬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안 그래도 보육원이 집인 페시아였으니까.

‘잘 지내겠지.’

그러다 아버지란 작자가 떠올랐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을 버렸다.

아들이 암살자의 손에 당하고 있는데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긴커녕 멀뚱멀뚱히 지켜만 봤다.

심지어 적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아예 방관자로 돌아섰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울화가 터져 나왔다.

만약 백운기 자신이 아니고 몸의 원주인이었으면, 골백번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에드가 백작의 행동으로 얻은 것도 있었다.

‘왕가와 가문 사이 밀약 같은 게 있어.’

정확히는 모른다.

이제 알아보면 될 일.

어떤 내용이기에 가문의 장남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지, 내심 궁금했다.

알아볼 방법은 한 가지.

‘조만간 감옥에 있는 포포비치를 만나 봐야겠어.’

고요한 숲이라고 하던가.

그곳의 조장이라고 하니 아는 게 있을 거다.

그 나이에 카시미르가에 정체를 숨기고 위장까지 할 정도이니 정보가 있겠지.

‘없다 해도 백작 부인의 일로 찾아가 보긴 해야지.’

그의 눈이 번쩍였다.

적안으로 번뜩이는 눈은 흉흉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철컥!

불 꺼진 자신의 방에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클라우드는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들어온 사람이 대충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자신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침대 옆으로 온 인물이 조심히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나지막이 속삭이며 말했다.

“애비가 미안하구나. 애야.”

“…….”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에드가 백작이었다.

일부로 잠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흠칫 놀랐다.

그의 손이 올라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 무슨…….’

포포비치와 싸울 때와는 다른 따뜻한 손길.

자신이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성스럽게 쓰다듬어 줬다.

그러면서 고뇌하듯 말을 이었다.

“왕가로부터 가문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날 용서해다오.”

아들을 버렸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용서를 구한다.

목소리가 흐느껴지기까지 했다.

“비정한 아비라 느끼겠지만, 너 하나의 목숨으로 가문의 수많은 식솔들을 살릴 수 있다면, 언제든 널 버릴 수 있다. 그것이… 카시미르 백작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슬픔이 묻어 나왔다.

에드가 백작의 손이 클라우드의 손을 잡으려다가 말았다.

“더 강해져라. 왕가가 너를 건드릴 수 없을 때, 가문의 비밀을 가르쳐 주마.”

‘역시, 왕가와 가문 사이에 뭔가 있었어.’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길 원했지만, 에드가 백작의 말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깨지 않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나가기 전 뭐라고 말하곤 방문을 닫았다.

‘빌어먹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에드가 백작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는데, 지금은 마음이 쓰렸다.

심장이 아려오는 느낌.

에드가 백작의 마지막 말만 안 들었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 말이 귀에 떠나가지 않았다.

―못난 아비가 널 지킬 힘이 없어 미안하구나, 아들아.



***



율리의 생일에 때 아닌 폭풍이 지나갔다.

하나는 클라우드가 어쌔신으로 명성이 대단한 밤의 끝자락을 박살 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수하들까지 상대하면서 잡았다고 하니.

카시미르가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거기에 또 하나의 놀랄만한 소식이 더 해졌다.

어쌔신은 사람들에게 인식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대우 또한 마찬가지.

음지에서 살아야 했기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신분을 숨기고 변장한 채 평생을 산다.

임무가 있는 경우에만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고위 귀족은 어쌔신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다.

고결한 기사나, 마법사를 선호했다.

그런데 클라우드는 달랐다.

카시미르가의 고귀한 피를 이은 장남이 어쌔신을 선택해 많은 이들이 놀랐다.

그냥 어쌔신이라면 이렇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무려 밤의 끝자락과 그의 수하를 홀로 지운 사람.

카시미르가엔 클라우드의 평판은 하늘을 찔렀다.

사건이 종료된 다음 날 저녁.

이틀째 맞이하는 무도회가 정상적으로 열렸다.

큰 사건이 있었는데도 회장은 귀족자제들의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이야기의 화제가 된 이는 당연히 클라우드였다.

“클라우드 도련님이 그렇게 강하다며?”

“얘는, 강한 정도가 아니라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뽑힐 거래.”

“여태껏 실력을 숨기시고 있던 거였어.”

“어쩜, 너무 멋져.”

귀족 여 자제들이 흥분하며 비명을 질렀다.

남자들은 부러움에 질투를 내보였다.

“흥,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야.”

“형도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저와 생각이 똑같네요.”

“카시미르가에서 일어난 일이라 세간의 평판을 돌리려고 에드가 백작님이 잡았는데, 망나니에게 공을 돌렸을 수도 있지. 안 그래요?”

클라우드에게 자격지심을 가진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온님이 어제는 방심하셔서 당한거야. 안 그렇습니까, 디온님?”

남자가 디온에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들은 클라우드의 신위를 보지 알지 못한다.

디온은 눈으로 직접 봤다. 그리고 밤의 끝자락을 잡은 사실은 진실이었다.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이들 사이에 또 다른 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

엘리나였다.

정원에서 클라우드의 진면목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율리보다 경지가 낮다고 판단한 그녀였지만, 실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속인 클라우드.

그녀는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그에게 혼약을 거절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려놔야 해. 그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 수 없어.’

다른 여자들이 탐내니 더욱 가지고 싶었다.

모두의 경외심을 한 몸에 받는 남자가 자신의 옆에 서 있으면 자신 또한 빛나는 법.

‘가문을 총동원해서라도 혼약을 진행할거야.’

그녀가 클라우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무도회의 주인공인 율리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형님은 어머니가 이미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잘못이야, 형님을 더 유심히 지켜봤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쩌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자신의 어머니는 저택에 감금되다시피 됐다.

아버지가 직접 포포비치 신관.

아니, 이제는 신관이 아닌 그를 직접 심문한다고 했다.

만약 형님이 말한 것이 사실로 밝혀지는 날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아버지의 성격이라면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가문의 명예와 위험을 중요시하는 아버지.

그리고 기사도를 목숨과도 같이 여겼다.

패륜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

자신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카시미르가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에게 본보기를 내세울지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늦었을지 모르지만… 형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때마침 무도회장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입장했다.

“왕국 최강의 방패, 유서 깊은 귀족 중의 귀족. 카시미르 가의 장남 클라우드 카시미르 도련님과 그분의 기사 이젤라님께서 드십니다.”

모두의 이목이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남자는 부러움과 질투, 여자들은 선망의 대상의 눈으로 클라우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