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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내부가 진탕되었다.

만약 내공 이외의 기운이 단전을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 바닥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신비로운 힘.

클라우드는 그 힘이 어디서 생겨난 건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에드가 백작이 챙겨 준 스튜.

몸속에서 잠자고 있던 기운이 급격히 소모되는 내력을 보충해 줬다.

한 단계 오를 때도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이 기운 때문에 지금껏 버텼다.

하지만 체내를 맹렬히 돌던 그 힘도 점점 잃어갔다.

‘젠장, 천하의 암천제가 암살자에게 고전하고 있다니.’

수치스러웠다.

그동안 꾸준히 수련해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자신보다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고.

그러나 자만이었다.

평화스러운 나날이 지속된 나머지 과거보다 수련을 게을리했다.

이전에는 하루 한 시진(두 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세 시진은 기본으로 잤다.

‘너무 안일했어.’

에드가 백작에게 어쌔신의 위용을 보여 준다고 큰소리쳤다.

자신의 무공이 왕국을 넘어 제국에 통하는 걸 보여 주려고 했다.

음지와 양지 둘 다 가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고작 이런 곳에서 좌절하게 생겼으니.

짜증이 확 솟구쳤다.

아스란 왕국은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중소 국가.

왕국만 나가도 대륙에 큰 영지를 보유하고 있는 곳만 세 군데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더 짜증나는 건 아버지란 작자는 자신을 포기한 듯한 자세를 취했다.

‘확 엎어 버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눈앞에 이놈을 이기는 것.

그러기 위해 할 일은 하나.

자신이 제일 잘하는 걸 해야 한다.

그건 바로 암습과 기습.

지금처럼 정면에서 치고받을 게 아니라, 암살자로서 어둠 속에서 싸울 필요가 있었다.

현재까지 적으로 만난 사람 중에 제일 강한 이는 눈앞에 있는 포포비치 신관이었다.

‘그래, 저놈을 죽여 백작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겠어.’

주위를 둘러봤다.

폐허가 된 예배당이 눈에 들어왔다.

칼에 베인 듯 반으로 쪼개진 나무들.

몇 그루는 형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둠.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 말고는 빛 한 점 없었다.

달빛도 구름에 사려진 상태.

‘네 어둠이 강한지, 내 어둠이 강한지 두고 보자.’

클라우드가 지켜만 보는 병사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부는 거센 바람에 횃불의 등이 꺼져 암흑천지로 변했다.

병사들이 우왕자왕하며.

“엥? 웬 바람?”

“앞이 안 보이잖아, 횃불에 다시 불을 켜!”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서 빨리.”

그때 에드가 백작이 목소리에 오러를 담아 소리쳤다.

“모두 조용! 횃불은 켜지 마라.”

“하지만 상대는 왕국 최고의 어쌔신 중 하나입니다.”

올코프 기사단장이 우려를 표명했다.

가만히 있는 것도 불안한데, 횃불도 켜지 말라니.

에드가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였다.

주변은 암전되어 깜깜해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만이 앞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클라우드가 포포비치에게로 걸었다.

저벅저벅.

그러다 점점 그의 걸음 소리가 줄어들더니 이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포포비치 신관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허허,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냐? 나를 어둠에서 상대할 작정을 하고 말이야.”

“그 웃음 언제까지 이어지나 보지.”

어둠속에서 클라우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긴장하고 지켜봤다.

포포비치 신관은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클라우드의 움직임을 잡으려고 몸에서 맹렬히 회전하고 있는 오러를 귀와 눈에 집중시켰다. 나무, 저택, 예배당, 모여 있는 구경꾼들.

모두가 그의 감시 대상에 놓였다.

어디에 있을까.

5분이 지났다.

주위는 조용한 가운데 침이 꼴딱 넘어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10분이 지날 때였다.

스스스.

정말 작은 소리가 좌측에서 들린 순간.

까아앙!

단검과 단검이 부딪쳤다.

클라우드가 몸을 드러냈고, 포포비치는 그를 도망치지 못하게 연속 공격을 하려는데 상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장난은 정도껏 해, 그래봤자 헛수… 헛!”

쉬익―

단검이 앞에서 불쑥 튀어나와 포포비치가 급히 허리를 뒤로 꺾었다.

흰 수염이 몇 가닥 잘려 나갔다.

‘녀석의 기를 느끼지 못했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

천하에 밤의 끝자락이 애송이의 이동 경로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챙!

여기저기서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심장을 노리는가 하면, 종아리와 팔을 노리기도 했다.

하단의 아킬레스건과 정수리까지.

까강깡깡―

시간이 지나다 보니, 정신없이 단검을 막고 있었다.

“이익!”

포포비치는 클라우드의 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정정당당히 나와 싸우자.”

“하,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어이가 없군, 저딴 말을 하는 게 왕국 최고의 어쌔신 중 하나라니.”

포포비치는 클라우드의 힐난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저딴 말을 지껄여?’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긴장이 몸을 지배했다.

자칫 방심하다간 바로 죽음 목숨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포포비치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어디서 이런 실력을 배웠을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움직임이었다.

유령 같은 움직임에 한발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란 왕국 최고의 어쌔신 중 한 명인 자신이 애송이에게 농락을 당했다.

클라우드가 어둠에 동화된 지 무려 한 시간 반이 흘렀다.

그동안 포포비치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얼굴엔 땀이 흘렀다.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오러를 주입해 클라우드를 찾고 있으니 안색도 헬쑥해졌다.

그의 나이는 60세.

현역에서 은퇴할 나이였다.

아무리 오러를 오래 쌓았다고 하나,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 시간째에는 괜찮았다.

그래도 명색의 왕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든 어쌔신이니까.

그러나 그 후로는 달랐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자 죽을 맛이었다.

방대하던 오러는 밑바닥이 보였다.

그리고 10분이 더 지난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할 정도로 음험한 목소리가 포포비치 신관의 뒤에서 들렸다.

“끝이다.

“이, 이게 대체…….”

“하나만 묻지.”

“…….”

포포비치 신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뒤가 잡혔다.

애송이에 불과한 클라우드에게 말이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흑마법으로 인해 제약을 받은 몸으로 어찌.

“왕국이 왜 나 같은 놈을 죽이려 하지?”

클라우드는 궁금했다.

자신의 영혼이 들어오기 전엔 개망나니에 불과했다.

그런 녀석을 왜 죽이려 하는 걸까.

어떤 비밀이라고 숨겨져 있는 게 아니면, 죽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카시미르 백작가는 율리가 이끌어 갈 테고 몸의 원주인은 방탕하게 살다가 언젠가 사라질 테니.

“모른다, 알아도 내가 가르쳐 줄 것 같아?”

“그래? 당신이 제대로 말 해주지 않으면 국왕에게 내가 직접 찾아가지 뭐.”

“무엄하다! 일개 백작가 공자 따위가…….”

“내가 못할 것 같아?”

클라우드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포포비치는 그의 얼굴을 못 봤으나, 뒷목에서 전해져 오는 서늘함을 느꼈다.

그는 진심이었다.

자신을 이긴 어쌔신.

어쩌면 왕국의 담벼락도 넘을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국왕을 만나기 전에, 최악의 인물을 만나겠지만.

고요한 숲의 단장인 그 괴물을.

“날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상으로 너한테 재밌는 이야기를 해 주마.”

포포비치가 비열하게 웃음며 누군가를 바라봤다.

흠칫.

그와 마주친 인물은 다름 아닌 백작 부인이었다.

“뭐지? 시원찮으면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포포비치가 클라우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네 새엄마라는 사람이 너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책임질 수 있나?”

“밤의 끝자락인 내 명예를 걸지.”

“목숨은 조금 더 붙여 두마.”

클라우드가 손날로 포포비치의 목을 가격해 기절시켰다.

그러고 나서 질질 끌어 에드가 백작의 앞에 던져 놨다.

풀썩.

“저를 기습한 자입니다.”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대단한 명성을 지닌 이를 잡고도 대수롭지 않아 했다.

“…….”

“왜 아무 말도 없으십니까?”

그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에드가 백작이었다.

암중호위를 맡긴 카시아스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니, 오직 클라우드의 힘으로만 이겼다는 말.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은 건 당연했다.

클라우드는 에드가 백작이 아무 말도 없자, 백작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포포비치와 잘 아는 사이입니까?”

“무, 무슨?”

“이자는 당신을 잘 아는 듯하여 물었습니다.”

“다, 당연히 잘 알지, 신관으로 지내온 세월이 얼만데. 나도 감쪽같이 속았어.”

백작 부인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렇습니까? 절 죽이라고 사주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하던데 말입니다.”

클라우드의 말을 이곳에 모인 모두가 들어버렸다.

“그게 정말이야?”

“부인이 왜?”

“으음…….”

에드가 백작도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가문은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다.

밤의 끝자락인 그를 클라우드가 이긴 순간부터 어쩌면 가문의 위기가 찾아온 건지 몰랐다.

가문과 왕가의 약조는 지켜져야 했기에.

하지만 클라우드가 실력을 선보임으로 이미 왕가와의 약조는 어긴 셈이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에드가 백작이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 들은 말은 모두 함구해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밖으로 새는 날엔 내가 친히 벌하겠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까.

안 그래도 충성심하면 카시미르가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에드가 백작이 함구하라고 하면, 무덤까지 가지고 갈 이들이었다.



***



털썩.

클라우드는 방으로 들어와 주저앉았다.

“피곤하군.”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싸웠다.

밤의 끝자락이라고 하던가.

지금까지 본 암살자 중 제일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기본기도 탄탄하고, 경험도 풍부했다.

운이 나쁘게도 그는 자신의 무공을 살면서 겪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림의 무공과 이 세계의 무공.

비슷하다고는 하나 둘은 분명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단전에서 힘을 내는 무림과 달리 이 세계는 심장에서 힘을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경험의 차이로 실력을 메꿨으나, 그의 경지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낭패를 볼 사람은 자신이었다.

포포비치는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이곳도 무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살수 무공을 쓰는 사람들.

즉, 어쌔신들의 평판이 무림과 다를 바 없이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 편견을 깨려면 압도적인 힘이 필요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힘.

자신에게 덤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힘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가부좌를 틀었다.

‘오성 끝에는 도달한다.’

흑영심법은 오성부터가 제일 어려웠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리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

무림의 살수들에게 흔한 무공이지만, 흑영심법을 오성 위로 올린 사람은 백운기가 다였다.

전무.

흔하디흔한 무공이나 익히기는 까다로워 모두가 포기했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무모하게 도전했고, 자존심은 처참하게 부셔졌다.

오직 백운기만이 익힐 수 있는 독문 무공.

저잣거리에서조차 구할 수 있던 무공이 천고의 절기가 된 이유였다.

거기에 그의 심득이 더해졌으니.

그만이 대성할 수밖에 없는 심법이었다.

클라우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쓰읍, 후우.”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

그러다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10초, 30초, 1분, 3분, 5분.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10분 동안 호흡이 멈췄다.

“후우우우.”

심법을 끊임없이 돌렸다.

내부의 은밀한 기가 돌아다니며 싸움에서 생긴 내상을 치료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상처를 치유하면서 벌어진 통로를 더 벌렸다.

과거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은밀한 기는 내상만 치료해 줄 뿐, 통로는 넓혀 주지 않았다.

자칫하다간 주화입마에 빠지기에 어느 정도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때 강제로 넓히는 방법을 섰다.

한데 지금은 은밀한 기가 스스로 넓히려고 한다.

고작 오성의 경지에서 말이다.

‘어쩌지? 이대로 기운에 몸을 맡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