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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증거가 있소? 만약 증거도 없이 나를 핍박했다면, 신성 모독죄로 국왕께 보고할 것이오.”

물론 심증만 있을 뿐, 증거는 없었다.

클라우드가 무턱대고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포포비치 데미안이 어쌔신이란 걸 밝힐 수 있는 자신감.

이 하나로 충분했다.

증거?

머리 아프게 물증을 찾을 필요가 있나.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된다.

증거는 부가적인 요소.

압도적인 강함 앞에선 무의미할 뿐이다.

“해, 그 전에 내가 먼저 네 정체를 알아내면 되니까.”

말을 마친 직후 클라우드는 곧바로 움직였다.

자신이 생각한 포포비치 데미안은 어쌔신.

어쌔신이라면 누구보다 약점을 잘 알았다.

기습이나 암습이 아니고선 무력이 현저히 약하다는 점 그것을 노렸다.

순식간에 그의 지척에 다다른 클라우드는 처음부터 발을 묶어 버리기 위해 하단을 공격하자.

스르륵―

포포비치의 신형이 빙판에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신관의 발걸음이 너무 가볍다 했어. 이래도 발뺌할 건가.”

“허허, 내가 당신을 얕잡아 본 것 같소.”

도련님에서 당신으로 바뀌었다.

“위에 있는 애들이나 불러.”

클라우드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자신의 기감으로 잡히는 인원만 족히 스무 명이었다.

“이 늙은이가 개망나니라 소문난 당신…….”

팡!

포포비치의 말이 끊겼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에 가늘게 실선이 그어지고 피가 새어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단검이 예배당 벽에 박혀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던졌으면, 아직도 단검이 부르르 떨었다.

“…에게 실수한 것 같소.”

딱!

포포비치가 손가락을 튕기자, 숨어 있던 어쌔신들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죽어 주셔야겠소.”

화아악!

그의 기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자애롭던 얼굴은 날카롭게 빚은 칼날처럼 잔뜩 벼려 있었다.

예배당에 켜져 있는 불이 기의 파동으로 인해 꺼졌다.

암전된 예배당에는 어쌔신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로 가득했다.

클라우드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몸에 털이란 털이 바짝 곤두섰다.

이렇게 긴장을 느낀 적이 있던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생각보다 강한데?’

포포비치의 경지가 예상 외였다.

이젤라를 습격한 이들보다 한 수 위 정도?

자신과도 별 차이 없었다.

이런 자가 고작 예배당에서 썩고 있었다니.

무슨 목적으로 카시미르가에 잠복해 있는 걸까.

그러나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어쌔신들이 살기가 사방을 점하고 점점 좁혀 온다.

챙!

이젤라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빼 들었다.

“당장 멈추십시오, 카시미르가의 장남을 해할 작정이십니까?”

“자네는 빠지게, 내 살려 줌세.”

“그럴 수 없습니다, 제 일은 주군을 지키는 일입니다.”

“허허, 기사의 충정은 이해하지만, 의미 없는 죽음이네.”

포포비치의 말에도 이젤라는 꼼짝하지 않았다.

되레 검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조금 전까지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가셨소. 카시미르가의 장남께서 여기사의 뒤에 숨다니. 에드가 백작이 자식을 잘못 기른 모양이오.”

그가 비웃음을 흘렸다.

이곳이 카시미르가 안이라는 걸 잊은 건지, 너무 여유로웠다.

“뭘 믿고 그렇게 설치지?”

“레르히 여신님을 믿소.”

“장난치지 말고.”

“내 힘을 믿소.”

정답이었다.

포포비치의 여유로움은 무력에서 나오고 있었다.

클라우드를 죽이고도 여길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는 자신감.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의 자신과 똑같았다.

‘내 앞에서 오만을 떤단 말이지?’

기가 찼다.

검이나 창을 든 자가 자신의 앞에 한껏 여유로움을 피운다 해도 열받을 것이다.

그런데 어쌔신이.

암천제인 자신의 앞에서 유세를 떨고 있으니 분노를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앞에 있는 벌레를 당장 치우고 싶었다.

“이젤라, 비켜.”

“주군! 위험합니다.”

클라우드가 이젤라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밀쳤다.

“괜찮으니 나가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네 주군이라면 말 들어.”

“주군…….”

그녀는 클라우드의 눈동자를 봤다.

단호한 눈빛에 어떠한 말로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주군의 명이라 예배당을 나가려는데.

“가주전으로 가.”

이젤라는 하나의 신호라고 착각을 했다.

‘주군께서 지원군을 불러오라는 신호야.’

그녀가 또 오해하고 말았다.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예배당을 나가려 하자, 어쌔신들이 그녀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포포비치가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이젤라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더니, 이윽고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차피 클라우드만 죽이면 우리의 임무는 끝이다. 죽이고 왕국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듣고 있는데도 서슴없이 말하자.

“하, 이 늙은이가 사람 열 받게 하네.”

“……!”

“이런 무시 정말 오랜만이야. 아주 기분 더러워.”

클라우드가 손을 풀며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보오?”

“그럴 리가, 과거에 내가 너 같은 놈을 어떻게 잘근잘근 밟았는지 생각 중이었다.”

“뭐라?”

“늙어서 귓구멍이 막혔나 보군. 나이 들었으면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 뭘 기어 나와.”

“이, 이 쳐 죽일 놈을 봤나. 오냐, 널 갈기갈기 찢어 오크의 밥으로 주고 말지어다. 목숨만 붙여놔.”

포포비치의 명령이 떨어졌다.

어둠에 몸을 맡기고 있던 스무 명의 어쌔신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가문은 비상이 걸렸다.

카시미르가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가주전의 외벽을 무너트린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올코프 기사단장이 기사단원과 병사들을 닦달했다.

“저택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범인을 찾아라!”

“네!”

기사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조를 나눠 움직였다.

그중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에드가 백작과 부인도 보였다.

에드가 백작은 분노할 법도 한데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윽고 율리를 나직이 불렀다.

“율리, 사절단에게 가 보아라.”

“외벽을 무너뜨렸다는 건 그들의 목표가 아버지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내 집에 침입한 놈에 의해 죽을 것으로 보이느냐? 됐으니, 사절단으로 온 이들을 다독이거라.”

율리가 머뭇거리자 백작 부인이 등을 떠밀었다.

“그래, 백작님껜 어미가 붙어 있을 테니 사절단에겐 네가 가거라. 너를 위해 온 손님 아니니.”

그녀는 이번 기회에 사절단에게 눈도장을 쾅 찍으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율리가 모친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율리를 보낸 채 환하게 웃던 백작 부인의 얼굴에 한 점 그늘이 졌다.

“걱정이라도 있소?”

“네? 아니에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을 거요.”

그녀가 백작 몰래 손톱을 물어뜯었다.

일이 너무 크게 벌어졌다.

클라우드를 죽이려고 왕국의 암살단 고요한 숲을 요청했다.

깔끔하게 처리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흘렀다.

너무도 요란하고 떠들썩했다.

이러다 에드가 백작이 알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율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는 여기사가 한 명 있었다.

털썩.

에드가 백작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클라우드 도련님이 위험합니다.”

흠칫 놀란 백작 부인이 마음을 감췄다.

에드가 백작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위험하다니?”

“포포비치 신관, 그자가 도련님을 죽이려 합니다. 빨리 예배당으로 병력을 보내주십시오.”

“그자가 왜?”

“도련님 말로는 신관이 어쌔신이라 했습니다.”

백작 부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얼굴은 핏기가 사라지고, 창백해졌다.

에드가 백작의 음성이 카시미르가에 울렸다.

“올코프와 사막의 안내자들은 예배당으로 집결한다.”

“백작님의 명을 받듭니다.”

“앞장서라.”

에드가 백작이 예배당으로 가려는데, 백작 부인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러시오?”

“저 여기사의 말을 어떻게 믿어요? 확인이라도 해 보시고 가시는 게 어떠세요?”

“우리 백작가의 기사요. 그녀를 안 믿으면 누굴 믿는단 말이오. 그리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클라우드가 위험하오.”

그녀는 시간을 끌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벌인 짓이라고 들통 날 수 있었다.

‘아냐, 분명 포포비치 신관이라면 진작 해치웠을 거야.’

목표가 망나니 클라우드였다.

수습 기사를 이겼다고 하나 포포비치 신관은 강함의 격이 달랐다.

왕국의 최정예 어쌔신 중 하나.

그가 직접 나섰다면 병사들이 예배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을 끝내고 자취를 감췄을 터.

생각을 마치니 안심이 되었다.

빠르게 움직이며 예배당으로 가는 인원들.

쿵쿵쿵!

가까워질수록 파공성이 커졌다.

“저기 좀 봐!”

한 병사가 가리킨 곳에서 두 개의 빛이 번쩍거렸다.

“유령인가?”

실력이 없는 병사들은 빛을 유령으로 착각했다.

기사들이나 돼야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포포비치 신관님?”

“상대는 누구야?”

자연스럽게 격렬하게 싸우는 상대에게로 집중했다.

“클라우드 도련님이야!”

모두가 의문을 떠올렸다.

포포비치 신관의 움직임에 한 번 의문을 표하고, 그 상대가 개망나니라 알려진 클라우드라는 것에 의아했다.

“네 말이 맞구나, 포포비치 신관이 어쌔신이었어.”

에드가 백작의 말에 일순 파문이 일어났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동요했다.

빛의 여신 레르히를 모시는 신관.

그는 자비로웠고, 에드가 가주 다음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었으니까.

“신관께서 어쌔신이래.”

“그럴 수가…….”

“이때까지 우릴 속인 거야?”

포포비치 신관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배신감도 배로 왔다.

와중에 클라우드의 움직임에는 넋을 잃고 말았다.

“클라우드 도련님 맞아?”

“세상에나… 눈으로 움직임을 쫓기도 벅차.”

사막의 안내자 기사단이 감탄하고 있는 사이.

퍼억― 쾅!

클라우드가 포포비치의 발에 복부를 맞고 뒤로 튕겨져 나가 예배당의 지붕을 뚫고는 바닥에 처박혔다.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예배당은 폐허가 된지 오래다.

무너진 곳을 헤쳐 나온 클라우드가 욕설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젠장, 이렇게 처참하게 당한 게 얼마 만이야.”

그의 옷은 이미 걸레짝이 되었다.

고급 비단으로 만든 옷은 넝마가 되었고, 카시미르 가의 상징인 뇌룡의 표식도 찢어지고 없었다.

우득, 우득.

클라우드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근육을 풀고 일어난다.

“넌 뒤질 각오해.”



***



포포비치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변은 페허가 된 건물 사이로 기이하게 꺾인 다리와 팔이 보였다.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 된 채 죽어 있는 시신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아스란 왕국 최정예 암살단으로 꼽히는 자들.

고요한 숲의 단원이었다.

‘믿을 수 없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망나니 짓을 하던 놈이다.

자신과는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수하들도 죽일 수 없다.

제거하라고 갔던 브루안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죽은 모양.

거기까지는 운으로 해치울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고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단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다.

‘국왕께서 저놈을 감시하란 이유를 알겠어.’

왕국에 위협이 된다.

그의 검이 바깥을 향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거지만, 안쪽을 향한다면 상당히 위험하다.

국왕은 어떻게 클라우드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잠시 고민을 하던 포포비치는 이내 생각하기를 그만 두었다. 어쨌든 그가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이 자리에서 꼭 죽여야 해.’

병사들과 기사들이 몰려왔다.

거기에 에드가 백작과 백작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퇴로는 없다.

임무를 완수하고 에드가 백작에게 죽는 것 밖에 길이 없었다.

파견 나오며 국왕께 들은 말을 꺼낼 차례.

포포비치가 에드가 백작을 보고 말했다.

“내 소개를 하겠소. 고요한 숲에서 밤의 끝자락이란 과분한 칭호를 받고 있소이다.”

그 한마디로 장내는 또 한 번의 파란이 일어났다.

“바, 밤의 끝자락이라니!”

“왕국의 살성들?”

“소, 소름끼쳐.”

왕국의 최고 암살자가 자신들의 사이에 숨어 있었다고 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고요한 숲의 조장이 우리 가문에 숨어 있다고는 생각 못 했군. 그것도 신관의 신분으로 말이야.”

고요한 숲은 여타 기사단과 강함의 궤를 달리했다.

무려 열 명의 조장으로 이뤄졌으며, 한 명당 삼십 명의 수하를 뒀다.

총 인원 삼백 명으로 최대 규모의 암살단이다.

포포비치는 열 명의 조장 중 한 명으로, 변신의 귀제로 소문난 이였다.

에드가 백작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둘의 친분은 꽤 깊은 사이.

그의 태도가 단번에 변하자, 마음이 허했다.

‘이렇게 된 거 국왕 폐하께서 말하신 말을 써야겠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감시하라는 말과 함께 잠입했다.

혹여나 문제가 생기거나, 에드가 백작에게 정체를 들키면 이렇게 말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폐하께서 약속을 지키라 하셨소.”

그 순간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에드가 백작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약속… 지키지.”

밤의 끝자락인 포포비치는 궁금했다.

어떤 약조이기에 자신의 아들까지 버린다고 할까.

많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앞의 인물을 죽이고서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잘 생각하셨소. 국왕께선 백작과 카시미르가의 충정에 흐뭇해 하실 것이오.”

그 말이 불을 지폈을까.

백작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단, 당신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