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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까강!

테라스에선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곳에선 이젤라가 대여섯의 어쌔신을 혼자 막았다.

디온은 아까 클라우드에게 손목을 당한 것 때문인지, 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몸엔 상처가 늘어났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릴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디온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찌되건, 그는 백작가의 손님이고, 자신은 이곳의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한 어쌔신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허벅지와 어깨가 길게 베었다.

“으윽!”

처음으로 신음을 입 밖으로 토해 낸 그녀가 어쌔신을 향해 호통을 쳤다.

“감히! 카시미르가에 침입한단 말이냐!”

“조용히 비켜 주면 사지만 자르고 목숨은 살려주마. 우리의 목표는 클라우드다.”

브루안이 디온을 향해 고개 짓을 했다.

“주군?”

그녀가 갸웃거렸다.

디온에게 클라우드라니.

저들이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였다.

저 남자가 어딜 봐서 주군을 닮았다는 말인가.

생김새부터가 전혀 달랐다.

“이봐! 사람 잘못 봤어. 난 클라우드가 아니고 디온이다. 센이드 가의 장남 디온 센이드란 말이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그냥 죽어.”

달 한 점 없는 암흑이라 그런가.

어쌔신들은 디온의 고함을 무시하고 단검을 찔러갔다.

쉬이익―

단검에 살갗이 베여 피가 튀었다.

“으윽! 시발것들아. 난 디온 센이드라니까!”

어쌔신의 착각으로 디온은 죽을 만큼 억울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무기로 사용하던 대검도 없고, 있다 해도 아까 손목을 다쳐서 쓸 수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오는 어쌔신들의 공격이 디온으로써는 절망적이었다.

“죽엇!”

이젤라를 공격하던 어쌔신을 제외한 브루안과 남은 이들이 클라우드로 착각한 디온의 목을 향해 단검을 그어갔다.

디온은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한 감정 속에서 눈을 감았다.

채앵!

“읍!”

서걱 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엄한 신음이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이젤라의 목소리.

눈을 뜨자,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을 상대하던 어쌔신을 무시하고, 디온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다.

“다, 당신이 나 대신?”

“카시미르가에 초대된 손님이 죽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드레스는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범벅이 되었다.

부욱―

그녀가 거추장스러운지 드레스를 허벅지 위로 찢고는 검을 고쳐 잡았다.

“내가 상대해 줄 테니 와라.”

“망나니 도련님에게 목숨을 바치는 게 참으로 안타까워.”

브루안을 제외한 다섯의 어쌔신들이 이젤라에게 달려들었다.

졸지에 혼자가 된 디온.

얼떨떨한 상황에 손가락만 빨게 되었다.

그에게 브루안이 단검을 휙휙 돌리며 다가갔다.

“방해꾼은 없으니, 죽어 주실까?”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몰라서 묻나? 넌 너무 나댔어. 작당히 찌그러져 있으면, 목숨은 연명하며 살았을 터. 안타깝게 됐다.”

“사람 잘못 봤다고 몇 번을 말해! 난 센이드가의 장남 디온 센이드다!”

저택을 떠나가라 외쳤지만, 이놈들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고군분투하는 여기사를 봤다.

어쌔신들이 그녀의 고운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하얀 다리와 팔에선 피가 흘렀다.

그녀의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젠장! 손만 멀쩡했더라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니.

자신의 무능력에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잘가라, 외롭지 않게 네 기사도 함께 무덤으로 보내 주마.”

브루안이 역수로 잡은 단검을 심장에 박아 놓으려는 순간.

“내 기사도 함께 무덤으로 보내준다고?”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는데.

푸욱―

“커헉!”

단도가 옆구리에 박히자, 피가 한 사발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순간의 정적.

이젤라를 공격하던 어쌔신들도 작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를 못했다.

그들의 상관인 부루안이,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되레 기습을 받았다.

자신들이 누군가.

어중이떠중이인 용병이나, 고용된 암살자가 아니었다.

고도로 훈련된 왕국의 최정예만을 모인 고요한 밤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쉽게 믿겨 지지 않을 수밖에.

“누구냐…….”

“너희들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클라우드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섬뜩한 미소엔 광기가 가득했다.

“뭐……!”

“그런데 말이야, 내가 얼핏 듣기론 누구를 함께 묻어 준다고 들었는데. 설마 저기 있는 이젤라는 아니겠지?”

“이, 무슨… 컥!”

클라우드가 옆구리에 박은 단검을 비틀어 뽑고는 그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네깟 놈들이 어쌔신을 흉내 내는 것도 같잖은데, 감히 내 사람을 죽이려고 해?”

그의 눈에서 붉은색의 귀화가 피었다.

디온 센이드에게 보이던 귀화와는 전혀 달랐다.

피의 눈.

무림에서 이것을 적안으로 불렀다.

백운기가 심기가 많이 불편할 때만 드러냈다.

귀화를 피우면 그 자리에 있는 어떤 누구도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게 무림의 정설이었다.

“넌 마지막에 죽여 줄 테니 공포를 느껴라.”

클라우드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이더니, 브루안의 혈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나서 이젤라를 공격한 어쌔신들에게 향했다.

저벅. 저벅.

울려 퍼지는 발소리.

가주전에서 폭발음이 들려 소란스러운 것과는 정반대로.

이곳 테라스만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누구 하나 숨소리도 마음대로 내지 못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크게 숨을 내뱉는다면.

“후욱… 컥!”

지금처럼 클라우드의 단도에 찍혀 죽었다.

그가 자신들에게 당당하게 걸어오는데.

어쌔신들은 길 잃은 고양이 마냥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브루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뭣들하고 있어! 죽여. 아니면 우리가 죽어.”

상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두려움을 없앤 그들이 클라우드에게 달려들었다.

“늦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람 소리가 들리며 클라우드가 든 단도에 빛이 번쩍였다.

툭. 툭. 툭.

달려들던 어쌔신들은 그 자세 그대로 목이 바닥에 떨어져 신형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 검기?”

부루안은 눈을 부릅떴다.

‘저렇게 쉽게 죽을 놈들이 아닌데.’

경악스러웠다.

부하들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왕국이 클라우드에 대해 아는 정보는.

‘다 거짓이야, 마나 하트가 없는 것도, 색만 밝히는 망나니도 없어.’

오직 검기를 쓰는 클라우드만 있었다.

물론 그들도 소드 익스퍼트 초급의 경지라, 검기를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드처럼 선명한 검기를 뿜어내지는 못했다.

이미 자신의 임무는 실패했다.

남은 건 죽을 뿐.

하지만 자신에겐 할 일이 남아 있다.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클라우드의 대한 정보가 거짓이고, 카시미르가에서 이를 철저히 숨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 그가 손짓 몇 번을 하더니,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마나를 사용해 속박된 몸을 풀려는데 꿈쩍도 안했다.

그때 클라우드의 고운 손이 자신의 턱을 잡고 얼굴에 바짝 댔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내가… 가르쳐 줄… 것 같아?”

“알아, 너 같은 놈들은 자백할지언정 죽음을 택하는 부류지. 하지만 말이야, 난 그런 놈들을 너무도 잘 알거든.”

클라우드가 히죽 웃었다.

브루안은 내심 불안했다.

저 웃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속셈을 알아내려고 말을 하려는 고문은 소용없다며 소리치려는 찰나, 그의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고문은 안 할 거야, 너무 지겹거든. 그냥 죽어.”

푸욱!

클라우드가 단검을 브루안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켁! 비, 빌어…먹을.”

“굳이 네 놈이랑 말씨름하고 있을 생각이 없어. 너희가 예배당에서 나왔다는 걸 알고 있거든.”

“어, 어떻게!”

“정말이었나? 난 그냥 떠본 건데.”

예배당에서부터 쫓아 왔으니, 의심 가는 일 순위가 당연히 그곳 아니겠는가.

“개…새끼.”

“과거에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우두둑.

그리고 브루안의 목을 꺾어버렸다.

남은 이들은 이젤라, 디온 뿐.

클라우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디온에게로 다가갔다.

“네 사랑이 고작 여자의 뒤에서 보호받는 것이었나?”

“……!”

“한 번 더 이젤라에게 치근거렸다간, 네 눈을 파버릴 테니 얼씬도 하지 마.”

디온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치욕스러웠다.

그는 자신도 어쩌지 못한 어쌔신을 도륙하다시피 했다.

압도적인 무력차이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무도회장을 빠져나온 클라우드는 곧바로 예배당으로 향했다.

“가주전에서 폭발음이 일어났는데 안 가보십니까?”

“기사와 병사들이 그쪽으로 다 몰려갔는데, 우리까지 갈 필요가 있나.”

두 사람 더 추가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가주전에 누군가 침입해 에드가 백작을 해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소드 마스터의 실력에 근접한 에드가 백작.

그를 죽이는 건 웬만한 어쌔신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의 옆을 항시 지키는 사막의 안내자의 기사 단장 또한 있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가 봤자 헛수고일 뿐.

그 시간에 범인을 잡아내는 게 나았다.

걸어가는 도중 이젤라의 불편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절뚝이는 발.

신음을 안 내려고 이를 앙다문 입술.

얼굴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그뿐이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그녀에게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클라우드가 가다 말고 우뚝 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랬나?”

“무엇을 말입니까?”

“놈을 놔두고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제가 도망쳤더라면, 카시미르가의 명성은 바닥을 쳤을 겁니다.”

그녀의 기사도 정신.

좋다.

자신의 부하가 그 정도의 사명감을 가진 건 자랑스러운 일.

하지만 그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놓이기는 건 썩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둘 다 죽은 목숨이었다.

차라리 가문의 명성이 떨어지는 게 나았다.

“오늘 뭔가 이상합니다. 저런 자들이 침입 할 동안 경비들은 어디서 뭐를 한 건지…….”

이젤라의 말대로 오늘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사절단이 많고, 무도회에 정신이 팔린 상황이라지만, 경계가 너무 허술했다.

왕국의 방패라는 카시미르 백작가가.

‘한 놈 잡아서 캐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이젤라.”

“네.”

“그런 녀석을 보호하라고 내 곁에 둔 게 아니야. 앞으론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기도록.”

“카시미르가의 명성이 떨어져도 말입니까?”

“그래, 나에게는 그딴 명성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

이젤라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더 중요하다.’가 귀에 계속 맴돌았다.

양 볼이 붉게 변했다.

‘주군께서 저런 말을 한 의도가 뭘까? 혹시… 날?’

좋아하시는 걸까 하고 착각에 빠졌다.

이젤라가 아픔도 잊은 채 클라우드를 흘깃거렸다.

잘생긴 얼굴에 운동으로 자리 잡힌 잔 근육.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배필로.

‘내가 불경한 생각을…….’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 내었다.

“다 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

이젤라는 대답도 안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닐 거야, 괜히…….”

“이젤라.”

“네, 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했다.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는데?”

“아, 죄송합니다. 딴생각을 하느라.”

“기습을 당한 직후 긴장의 끈을 놓는 건 자살 행위야. 명심해.”

“알겠습니다.”

불이 켜진 예배당의 안.

한쪽에선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노인이 보였다.

이젤라가 클라우드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포포비치 신관이십니다.”

이렇게 말해 주는 걸 보니 예배당은 근처도 안 와본 모양이다.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신이 포포비치 데미안 신관이야?”

“주, 주군!”

다짜고짜 반말하자 옆에 있던 이젤라가 기겁을 했다.

레르히 교단은 왕국의 국교로써 고위 귀족이라 할지라도 예의를 차려야했다.

더불어 그는 에드가 백작도 예의를 차리는 인물.

그런 자를 클라우드가 대놓고 반말을 지껄이니, 이젤라가 식겁한 것이다.

포포비치 신관은 태연하게 기도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고개를 들어 클라우드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클라우드 도련님께서 이 누추한 곳엔 어인 일이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 나를 죽이려고 지시한 사람, 당신이지?”

클라우드는 포포비치 신관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알아챘다.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살수의 기본 중 하나.

목표의 음성, 발자국 소리, 버릇을 알아야 했고, 클라우드은 최고의 경지에 다 달았던 사람.

그렇기에 명령을 내리던 사람이 포포비치 신관이라는 걸 확신했다.

“참으로 무례한 말이군요. 오늘 이 일 좌시하지 않겠소.”

“아버지께 일러바치기라도 하게?”

“아무리 망나니라곤 하나, 여긴 레르히 여신을 모시는 예배당이오. 말을 삼가셨으면 좋겠소.”

예배당에 포포비치 신관의 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에드가 백작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엔 클라우드를 가만 안 놔둘 것이다.

신관에 대한 무례는 물론, 신성한 레르히 여신을 모독한 죄를 물을 수도 있다.

신성 모독죄.

왕국에서 반역 다음으로 가장 큰 죄에 해당된다.

“그러면 다른 걸 묻지. 당신 어쌔신이지.”

클라우드의 말에 포포비치 신관의 여유롭던 표정에 미세하게 균열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