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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무도회가 열리는 저녁.

백작 부인은 저택에서 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그녀가 멈춰 선 곳은 사제들이 기도하는 신성한 예배당.

안쪽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 사제가 손을 모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사제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레르히 여신의 가호가 있길.”

“레르히 여신의 가호가 있길.”

두 사람이 손을 모으고 빛의 여신인 레르히에게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기도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날 법도 한데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클라우드에게 가한 흑마법의 세 고리 중 하나가 풀렸소.”

흠칫.

백작 부인의 어깨가 잠시 들썩였다.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사제를 봤다.

“고리가 풀리다니요. 어떻게 그런 일이?”

“그건 나도 모르오. 하나 확실한 건 있소.”

“뭔가요?”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더 강한 힘이 내부에서 작용했다는 것이오.”

내부의 힘이란 마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마나 하트를 연성할 수 없는 몸이었다.

흑마법의 세 고리로 내부를 꽁꽁 묶어 놨는데, 내부에서 강한 힘이 일어나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백작 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사제의 음성이 들렸다.

“혹여 에드가 백작이 수작을 부렸다거나…….”

“그이의 힘으로 흑마법의 고리를 어쩌지 못한다는 건 포포비치 신관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백작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제.

그는 카시미르 가의 신성한 예배당을 맡고 있는 포포비치 데미안이었다.

“허허, 이런 괴상한 일이.”

“만약… 두 고리가 다 풀린다면 그 후엔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동안 몸속에 웅크리고 있던 마나가 전부 모여 전무후무한, 마나 하트가 형성될 것이오. 물론, 몸이 버텨 준다는 가정하에지만.”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들을 백작가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별짓을 다 했다.

한데 거의 끝에 와서 일을 모두 망치게 됐으니.

혹시라도 에드가 백작이 클라우드가 흑마법에 걸린 걸 알기라도 하는 날엔.

녀석과 율리가 다시 경합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죽여야겠어요.”

“사람의 이목이 많이 몰린 이 시기에 말이오?”

“외부인이 많은 시점이라 지금이 적기에요.”

그녀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겠소?”

“신관께서 도와주셔야죠.”

“설마, ‘고요한 숲’을 빌려 달라는 말이오?”

“그래야지 신관께서도 국왕 폐하께 면이 서지 않겠어요?”

포포비치 데미안은 아스란 국왕의 명을 받고 카시미르 가에 잠복해 있었다.

그는 클라우드 카시미르에게 걸려있는 흑마법의 관찰을 명받았다.

만약 수상한 움직임이 있을 시 즉시 사살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왜 이런 임무가 떨어졌는지는 모르나, 하나는 확실했다.

왕국에서 클라우드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도와드리겠소.”

“감사할 따름이에요.”

“별말씀을.”

“클라우드는 항상 이젤라란 여기사의 호위를 받고 있어요. ‘고요한 숲’의 실력이 어떤지 기대가 되네요.”

“레르히 여신의 가호가 있길.”

이로써 클라우드의 죽음은 기정사실화가 됐다.

백작 부인이 말한 ‘고요한 숲’은 적국에서 몰래 잠입한 이들을 색출해 내 죽이는 암살단이었다.

아스란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어쌔신들이 모인 집단.

그들의 목표가 클라우드 카시미르가 되었다.

한숨 놓인 백작 부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정말 고요한 숲을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예배당의 사제가 포포비치 신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부인의 부탁인데 그래야지요.”

“잘못하다간 고요한 숲이 카시미르 가에 잠입해 있다는 걸 들킬지도 모릅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브루안 사제.”

포포비치 신관의 눈에서 안광이 쏘아져 나왔다.

범접할 수 없는 기세.

브루안 사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곁을 지키는 여기사가 있다는 말 들었을 거다. 깔끔하게 처리해.”

“명을 받듭니다.”



***



저택에서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단의 연주는 무도회의 분위기를 한껏 달아올렸다.

참여한 사절단 중 제일로 신나 보인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엘리나 일행이었다.

“엘리나 구두 참 예쁘다?”

“아이참, 오라버니 또 놀리신다.”

“아니야, 정말로 예뻐. 장신구도 어쩜 빛이 나는지.”

일행 중 한 명인 오른 제아고가 엘리나가 신은 구두부터 장신구까지 훑어보며 눈이 잠시 몽롱해졌다.

“오른, 숙녀를 두고 말실수는. 신고 있는 사람이 천사여서 빛이 난 거야.”

“디온 오라버니도 그만 놀리세요.”

“이 무도회장에서 네가 제일 돋보여.”

엘리나는 두 사람의 칭찬에 신이 난지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무도회장에서 누군가를 찾았다.

고개를 연신 돌렸지만,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네 약혼자 찾아?”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의 마법을 간단히 막은 인간.

사람들이 개망나니로 생각하는 클라우드가 무도회장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사절단으로 온 이유를 둘러댔다.

“카시미르 백작가에 초대된 사람들을 살폈어요.”

“임무를 깜빡했네.”

카시미르 가에 초대된 손님들을 면밀하게 살펴볼 것.

그게 자신들의 가문에서 내려진 명이었다.

어떤 세력이 줄을 서려고 하는지, 왕국에서 고위 관료가 왔는지 알아야 했다.

“무도회 첫날이라 신경 써야 할 자는 없어.”

“하긴, 중요한 인사들은 마지막 날에 참석할 거야.”

“우리 가문보다 괜찮은 가문은 없네.”

같은 또래들.

그들은 눈치만 볼 뿐, 감히 세 사람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백작가의 후계자들.

지방 귀족 자제는 말 한마디 섞기 힘들었다.

그럴수록 세 사람의 콧대는 하늘로 치솟았다.

그때 무도회의 문이 열리며 체격이 건장하고 멋들어진 청년이 들어왔다.

“왕국 최강의 방패, 유서 깊은 귀족 중의 귀족. 카시미르 가의 차남 율리 카시미르 도련님께서 드십니다.”

드디어 무도회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율리는 환한 미소를 보인 채 하나하나 인사를 해 주었다.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이나, 자작의 자제에게도 존댓말 하는 인성.

귀족 가 여인들의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듬직한 넓은 등에 한껏 여유로운 미소.

거기에 걸맞은 엄청난 검술까지.

신랑감으로 최고였다.

엘리나는 율리를 보자 붉은 입술을 핥았다.

꼭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탐욕 어린 눈빛과 똑 닮았다.

그런데 같이 있는 오른의 눈도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와 비슷했다.

물론 곧장 숨긴 탓에 두 사람은 보지 못했다.

엘리나는 율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라버니! 저희 여깄…어요.”

“칫,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좋겠어.”

디온이 투덜거리면서 질투했다.

왕국 아카데미에서 언제나 수석이던 녀석.

졸업하기까지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주지 않았다.

검에 미친 귀신이라도 든 건지, 수련은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따라잡을 것 같으면 언제나 두 발 먼저 앞서 나갔다.

그런 건 둘째 치더라도.

저기 보이는 미소.

여자를 무장해제시키는 미소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남자인 자신까지도 호의적으로 변하게 만들었지 않는가.

“오래 기다렸지, 분위기는 어때?”

“좋아요, 악단의 노래도 제 취향이에요.”

“어머니께서 손수 왕궁 악단까지 초대하셨어.”

“어쩐지, 귀가 즐겁다 했어요.”

율리가 고용인들에게 포도주를 받아 직접 세 사람의 잔에 따랐다.

“와줘서 고마워 친구들.”

“섭섭한 소릴.”

“언제나 초대해달라고. 먼 곳에 있어도 달려올 테니.”

그들은 술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며 껄껄 웃었다.

율리가 오자 분위기가 많이 풀어져서일까.

엘리나 일행에게 접근하지 못하던 지방 귀족의 자제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도란 가문의 페이스 도란님 아닙니까?”

“제 이름을 아세요?”

“당연히 알아야지요.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직접 초대장을 보냈으니까요. 부디, 편하게 즐겨 주세요.”

율리가 무도회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귀족 자제들은 이때다 싶어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그때였다.

무도회장의 문이 다시 한번 열리는 것이.

“왕국 최강의 방패, 유서 깊은 귀족 중의 귀족. 카시미르 가의 장남 클라우드 카시미르 도련님과 그분의 기사 이젤라님께서 드십니다.”

떠들썩하던 연회장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소문으로만 듣던 클라우드에게로 쏠렸다.

온몸에 귀찮다는 듯한 행동이 배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품이 느껴졌다.

웅성웅성.

조용하던 무도회장이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들은 바로는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라 하지 않았어?”

“분명히 개망나니라고 했는데…….”

“헛소문이었나?”

클라우드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문은 아직 타 가문의 귀로 흘러가지 않았다.

“우와, 저 여기사 좀 봐.”

사람들은 클라우드에게서 한 발짝 뒤에 따라오고 있는 여기사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드레스도 예쁘지만, 유독 빛나는 건 얼굴이었다.

잡티 한 점 없는 깨끗한 피부.

남자들은 이젤라의 얼굴을 보고 침을 질질 흘렸다.

여자들은 눈을 흘기며 질투 어린 시선으로 봤다.

‘저년 마음에 안 들어.’

엘리나 역시 똑같았다.

무도회장의 모든 남자가 자신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봤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젤라 때문에 또 관심을 뺏기고 말았다.

그녀는 웃는 얼굴을 하며 클라우드에게 다가갔다.

“클라우드 오라버니 늦게 오셨네요.”

“그 역겨운 가면 좀 벗지?”

엘리나는 기분이 나쁜 걸 꾹 참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오후에 있던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클라우드의 말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엘리나의 곁에 있던, 오른과 디온이 발끈했다.

“숙녀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내 말이 어때서?”

“몰라서 물어?”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클라우드 오라버니는 제가 약혼녀인 게 싫으신가 봐요.”

블라드가의 장녀이자, 3서클의 마법사.

그 정도의 여자가 개망나니에게 무시당했는데도 참고 있으니.

주위의 시선은 엘리나를 불쌍한 여자로 봤다.

그녀가 한껏 침울한 표정으로 디온의 팔을 붙잡으니, 그가 더욱 흥분하며 나섰다.

“당장 사과해!”

“싫다.”

“이자가 그래도!”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앞으로 뛰쳐나가 클라우드의 멱살을 잡았다.

“오라버니 그만 하세요.”

엘리나가 말리는 척했다.

“이 자의 무릎을 꿇려 사과하게 할 거다!”

두 사람 때문에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이던 악단의 연주가 멈췄다.

이젤라가 나서려 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율리가 제지하고 나섰다.

‘디온의 상대로는 어떨까.’

한 달 전에 자신에게 선전포고 했던 말.

세 달이라는 시간.

그중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무장에서 수련했다고 하니.

과연 지금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궁금했다.

‘디온은 소드 익스퍼트에 갓 들어섰어. 그도 못 이기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보다 한 단계 아래인 친구도 못 이기면 약속은 끝이었다.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게 해야 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급한 성미를 가졌다.

이 정도의 기다림만으로도 좀이 쑤실 것이고, 자신보다 먼저 움직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움직이기 전에 내 손으로 끝내야 해.’

그래야지만 카시미르 백작가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해 싸늘한 시체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만은 막아야만 했다.

그게 자신이 형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